성폭력 피해자 옆에서 ‘가장 보통의 편견’과 싸우는 사람 [사람IN]

김다은 기자 2023. 6. 1.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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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천주교성폭력상담소 김태옥 소장(63)은 빈 메모장 위에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재판정을 나와야 했다. 1·2심의 무죄판결이 뒤집히리라 기대하며 ‘새로 쓰일 판결문’을 받아 적으려던 메모장이었다. 지난 4월27일, 이날은 상담소가 지원한 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는 날이자 7년간 이어진 법정 투쟁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피고인 무죄’라는 원심 판결 확정이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는 이 사건의 피해자를 처음부터 지원해왔다. 1998년 천주교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천주교성폭력상담소는 지금은 종교와 관계없는 일반 성폭력상담소로 운영된다. 이곳은 특히 피해자와 오래 관계를 맺으며 장기적인 상담·조력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매해 40~50건 정도가 해를 넘겨 상담을 이어간다. 이날 재판정을 함께 찾았던 ㄱ씨 역시 7년 전 상담소를 찾아와 지금까지 함께 싸워온 피해 당사자다.

피해자 ㄱ씨는 2017년 5월5일 새벽, 술에 취해 항거불능 상태인 자신을 피고인이 서울 외곽의 모텔로 데리고 갔으며 그곳에서 성폭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모텔 CCTV 속 ㄱ씨는 가방도 없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허리가 90도까지 꺾여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성단체들은 이 사건을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이라고 불렀다. 항거불능 상태의 여성을 성폭행한 뒤 ‘사전에 동의한 성관계였다’라고 가해자들이 주장하는, 성폭력 상담 중 빈번하게 볼 수 있는 흔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CCTV 속 ㄱ씨가 항거불능 상태이고, 피고인이 만취한 ㄱ씨의 옷을 벗긴 사실은 인정되지만 무죄라고 판단했다. ‘옷은 벗겼지만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피고인의 진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준강간죄의 성립 요건은 두 가지다. 첫째, 피해자가 항거불능·심신상실 상태였는가? 둘째, 피고인이 이런 피해자의 상태를 이용해 고의적으로 간음했는가? 법원은 후자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봤다.

김 소장은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7년간 피해자를 희망고문 한 것”이라고 말했다. “2020년 5월, 2심 무죄가 선고된 이후 6400명이 넘는 시민들이 피해자를 응원하며 연대 서명을 했다. 그 글들을 엮으니 책 두 권이 되더라. 그 책 두 권과 전문가들의 의견서를 수차례 법원에 제출하며 최종 선고를 기다렸다. 대법원에서 계류된 시간만 3년이다. 재판부가 오래 숙고하는 만큼 다른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선고를 듣고는 멍해서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 상담을 오래 해온 활동가들은 준강간 사건을 ‘불기소율이 높고 무죄선고가 많이 나오는 범죄’라고 말한다. ‘왜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나’ 같은 피해자다움의 편견이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2020년, 67개 성폭력상담소를 대상으로 준강간 사건에 대한 사례조사를 한 결과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준강간 사건 피해자 760명 중 고소·신고한 피해자 수는 511명(67%)이며, 기소가 된 경우는 229명(30%), 유죄가 선고되어 가해자에게 처벌이 내려진 경우는 112명(14%)뿐이었다.

그래서 김태옥 소장은 형법을 개정해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에게 ‘당신이 심한 폭행과 협박을 당했음을, 사건 당시 항거불능 상태였음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가해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당신은 피해자에게 어떻게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받았는가?'

김태옥 소장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상 한 편을 소개했다. ‘Tea Consent’라는 제목의 이 영상은 내가 맛있는 차를 끓였어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먹여선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함께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상대가 ‘마시겠다’고 동의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신을 잃은 상대의 입에 억지로 차를 들이부어서는 안 된다. 어제 즐겁게 차를 마셨으니 오늘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누군가와 함께 ‘차를 마시는 일’에서도 동의를 얻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성관계도 그렇다. 김 소장은 이 ‘보통의’ 상식이 모두의 현실이 되길 바란다.

마흔다섯.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성폭력상담소 활동가가 된 나이다. 손에 익은 대로 사는 대신, 그는 다른 꿈을 꿨다. 성폭력 피해자 옆에서 ‘가장 보통의 편견’과 싸우는 일이었다. 완결되지 않은 꿈을 품고, 오늘도 김태옥 소장은 상담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맞이한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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