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인 아내가 사별한 입양인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너무 그립습니다"

2023. 5. 2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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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입양은 결코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에리카 브릭만 해외입양인]
사랑하는 남편에게.

오늘은 당신 여권에 적힌 생일입니다. 당신은 2000년 친모와 재회한 후 실제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이날 당신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당신은 성대한 생일파티를 좋아하지 않았고 나와 아이들과 함께 외식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는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작은 생일 파티를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우리의 잃어버린 조각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조각 (the missing piece)'이라는 퍼즐을 샀습니다. 우리는 또 매년 당신의 생일에 한 것처럼 당신의 무덤에 꽃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런 후 우리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파이를 굽고 우리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할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날에는 항상 우리가 만난 날처럼 당신을 생각합니다. 한인입양인협회 창립 10주년 기념 파티에서였습니다. 주최 측은 내 작품 '한국에서 잔디는 항상 더 푸르게 보인다(The Grass Looks Always Greener in Korea)'에 대한 발표를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연과 양육의 관계를 다룬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2005년 국제입양에 관한 전시회 및 토론의 일부였습니다. 입양이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어렸을 때 양부모가 나를 받아들여 아름다운 나라에서 자랄 수 있게 해 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비롯됐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여기가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친부모님, 한국, 소속감이 그리웠습니다. 나는 내가 자란 곳에서 벗어났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도 나와 닮지 않았고, 내 인생의 시작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많은 것에 대해 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백인 특권을 가진 입양부모는 인종차별에 대처할 필요가 없었고,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를 도울 수 없없습니다. 우리가 외출할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영어로 말하거나 중국어를 말하는 척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와, 정말 말을 잘하는데 어디서 배웠어요?'라고 칭찬했습니다. 비난을 받는 더 나쁜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의견들을 무시했지만, 나중에는 나 자신을 위해 반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뿌리를 생각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김치와 같은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산낙지도 좋아했고, 저는 아트박스에서 한국 문구류를 사는 것과 같은 쇼핑과 다른 모든 멋진 음식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언어와 문화적 장벽 때문에 결코 한국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했고, 한국에 몇달 동안 여러 번 살았고, 전통에 대해 조금 배우고,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친부모를 여러 번 찾았지만 실패해 계속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부산 암남동 보이즈타운 앞 거리에 버려져 이름이 화OO인 택시 기사에게 발견되었다는 것이 제가 아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는 저를 발견한 후 부산 서부경찰서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1975년 9월 1일 당시 그는 24세였습니다. 1993년 나는 화OO씨를 찾았고 잠시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때까지 나는 그에게 두 딸과 아들이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2000년에 당신은 어머니 그리고 다른 두 명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찾으러 왔습니다.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엄마가 우리가 놓친 26년을 함께한 26년으로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때쯤이면 나는 56세가 될 것이고 엄마는 79세가 될 것입니다." 불행히도, 당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부모를 찾지 못했습니다. 생물학적 가족을 찾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답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때때로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떠난 지금, 내 생물학적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몇 년동안 닫았던 챕터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아무 것도 자랄 수 없기 때문에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맥락이 필요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를 닮았는지, 어떤 성격을 물려 받았는지, 우리 가족의 역사는 무엇이며 왜 포기했는지.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것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당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내 안의 공허함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집에 있는 것처럼 느꼈지만 당신이 죽은 후 다시 외로움을 느낍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깨진 조각들을 함께 붙여야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만났을 때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우리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은 후에 더 이상 올 것이 없다고 은밀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상실은 우리 삶에 짜여져 있습니다.

당신은 아주 어린 나이에 친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십대였을 떄 양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손윗 시누이가 당신과 당신의 형제를 고아원에 데려가기로 결정했고, 고아원에선 어머니 동의 없이 입양을 보냈기 때문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친부모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나라, 우리가 아는 언어, 음식과 문화도 잃었습니다. 나는 최근에야 이것을 손실로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전엔 의식적으로 슬퍼한 적이 없습니다.

엄마로서 가장 힘든 일은 자녀의 슬픔을 보는 것입니다.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낍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평온한 어린 시절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매일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물학적 가족에 대해서는 연민만 느끼고 비난이나 원한은 없습니다.

당신이 가고 나서 나는 싱글맘입니다.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돈을 벌면서 신체적 필요와 슬픔을 동시에 돌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제가 거의 포기할 뻔한 순간이 있었고, 더이상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돌볼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을 기억했지만 거의 약속을 어길 뻔했습니다. 절망적이고 외로웠지만 이런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저를 계속 나아가게 한 한 가지는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는 전망이었습니다. 당신이 죽은 뒤 내가 원했던 건 그것뿐이었습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한국은 항상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이 우리의 뿌리가 있는 곳입니다. 한국 땅에 서서 땅과 연결되고 한국에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작별 의식을 갖는 것이 매우 타당하게 느껴졌습니다.

2020년 5월 티켓을 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습니다. 2022년 여름 드디어 한국은 코로나 대책을 변경해 입국을 허가했습니다. 내가 얻은 첫 번쨰 기회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습니다. 전 경험은 매우 영적이었습니다. 어쩐지 우리는 모든 곳에서 당신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와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 덕분에 입양 및 입양 서류와 관련된 위법 행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입양 역사의 거대한 도약입니다. 모든 입양인들이 정의와 인정을 받기를 바라지만, 많은 고통을 겪은 친가족들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저는 한국 여행 중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대해 알게 됐고, 아동 인신매매와 그 밖의 위법 행위에 대해서도 알게 됐습니다. 모든 입양인의 인권이 침해됐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입양 서류가 거짓으로 작성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서야 그런 일이 대규모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실은 모든 입양 파일에 거짓말과 사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입양인이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드물게 만듭니다. 한때 나도 모르게 평화롭게 살 수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함꼐 100세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내가 모르는 한, 나는 나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묻습니다. "내 이야기가 사실인가?"

입양은 결코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나쁜 상황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됐습니다. 5살때 갑자기 부모님과 분리되기 전까지, 당신은 부모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국어를 할 수 있었고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곳으로 옮겨졌고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길거리에서 발견되었을 떄 나는 생후 8개월로 추정되었습니다. 내가 여전히 어린 아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아이와 부모 사이의 애착은 6개월에서 12개월 사이에 발생합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여러 명의 돌보미가 있었기 때문에 특정 개인과 유대감을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두 상황 모두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특별히 사후 관리를 받지 못했습니다. 1976년 11월 15일 양어머니가 BIA 국제 입양국에 쓴 편지에 따르면 나는 짜증이 많고 '버릇없는' 아이로 보입니다. 양부모님의 반응은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BIA는 문제가 있는 양부모의 후속 조치와 도와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당신이 죽었을 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최근 입양을 둘러싼 모든 뉴스에 대해 당신과 매우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 없으니 더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사망한 배우자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슬픔과 관련된 상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결코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오늘 당신의 생일에 이 편지를 선물로 주고 , 이 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25만 명 이상의 한국 입양인과 그 생물학적 가족에게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없는 미래로, 그러나 여전히 기대되는 미래로.

사랑하는 아내 서준희

▲이 글을 쓴 에리카 브릭만. ⓒ필자 제공

2022년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 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 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만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에리카 브릭만 해외입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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