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과 보성강의 수려한 물길이, 서로 도와 빚은 풍광  

2023. 5. 24.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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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고을학교는 <곡성고을> ]

[프레시안 알림]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98강은 섬진강과 보성강의 수려한 물길 따라 자리잡은 전남 <곡성고을>을 찾아 고려, 조선의 개국공신 신숭겸, 마천목 장군의 유적과 청송심씨 집성촌 제월리, 그리고 구산선문(불교의 아홉 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 태안사를 두루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압록유원지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지점에 생긴 자연발생 유원지로, 추억과 낭만의 공간이다.Ⓒ곡성군

고을학교 제98강은 2023년 6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8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옥과IC(옥과향교)-오산면(가곡리오층석탑/영귀서원)-입면(제호정고택/함허정)-곡성읍(곡성향교/도동묘/덕양서원)-압록(점심식사 겸 뒤풀이)-죽곡면(장군단/태안사)-목사동면(용산재/계마석)-석곡면(마천목장군사당)-곡성IC-서울의 순입니다.

▲<곡성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8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통명산 자락에 고려와 조선의 개국공신 신숭겸, 마천목 장군 이야기가 널려 있습니다.
곡성의 산줄기는 중앙에 통명산, 북쪽에 동악산, 남쪽에 봉두산이 자리하고, 여기에 곡성의 중요한 역사유적지를 품고 있습니다. 군의 경계에는 동쪽으로 섬진강 건너 지리산에서 뻗어내린 천마산, 깃대봉, 형제봉 산줄기가 남원과 구례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 성덕산, 차일봉, 매봉을 잇는 산줄기가 화순과 담양에 접해 있습니다.

▲명찰 태안사로 들어가는 2㎞쯤 되는 계곡길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한여름의 무더위를 순간 식혀준다.Ⓒ곡성군

통명산은 곡성의 진산으로 통명산, 주부산, 곤명산을 잇는 산줄기가 섬진강과 보성강을 가르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는 고려 초와 조선 초에 주군이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한 명장, 신숭겸과 마천목이 태어난 곳으로 두 장군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산자락에 널려 있으며 특히 신숭겸 장군의 사당인 덕양서원과 마천목 장군의 묘와 사당이 바로 통명산 자락에 기대고 있습니다.

통명산 일대에 대한 풍수지리적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통명산 남쪽 주부산에서 성주봉을 거쳐 짧은 지능선이 장군봉과 천덕산 사이를 비집고 내려선 아래에 있는 죽곡면 봉정리는 비봉포란(飛鳳抱卵)의 형국이랍니다. 장군봉을 봉황의 몸통으로, 천덕산과 통명산을 봉황의 날개로, 주부산 능선을 봉황의 머리로, 그리고 봉정리 마을 앞 큰 바위를 봉황의 알로 비유하는데 봉황의 먹이인 대나무 순과 서식처인 오동나무가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곡성의 물줄기는 보성 일림산에서 발원한 보성강이 곡성의 통명산과 봉두산 사이를 북동류하다 곡성의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하고 곡성 오산면 관음사 대은샘에서 발원한 옥과천이 옥과면을 관통하여 섬진강과 합류합니다.

곡성의 중심이 통명산 아래 죽곡면에서 동악산 아래 곡성읍으로 옮겨졌습니다.
삼국시대는 475년 백제 문주왕이 군명을 욕내라 칭하였고 당시의 읍은 현 죽곡면 당동리에 두었습니다. 757년(경덕왕 16) 욕내군은 곡성군으로, 과지현은 옥과현으로 개칭되었고 곡성군에는 동복, 구례, 부유현 등이 영현으로 예속되었습니다.

고려 시대는 고려 초 승평군(순천시)에 속하였다가 1018년(현종 9) 나주목의 속군으로 이속되었고,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고려 말 1389년(공양왕 1) 왜구의 침입으로 읍이 함락되어 죽곡면 당동리 지역에 위치하였던 읍치가 동악산 아래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1413년(태종 13) 현으로 개칭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도호부에 합속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분리 독립하여 곡성현으로 복설되었습니다.

근대 초기 1899년(광무 3) 행정구역 명칭을 곡성군으로 개칭하여 군수를 두었고, 1914년에 담양, 구례, 순천, 남원 일부를 편입하여 11개면 126리로 개편되었습니다.

1979년 곡성면이 읍으로 승격됨으로써 11개 면에서 1읍 10면 126리로 개편된 후,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석곡면 운룡리가 순천시 주암면에 편입됨에 따라 1읍 10면 125리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함허정은 1534년(중종 38) 심광형이 지역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인데, 정자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해 주변 경관이 뛰어나다.Ⓒ곡성군

읍치구역은 곡성과 옥과에 있었습니다.
곡성향교는 1570년(선조 3)에 지었다고 전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중종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있고, 뒤쪽에 배향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내삼문, 전사청, 교직사 등이 있습니다.

옥과향교가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원래의 자리가 황산이었는데 율정으로 옮겼고, 1755년(영조 31)에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1796년(정조 20)에 수리하였으며, 1898년(광무 2)에 다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향교의 일반적 배치 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책 중 <양목재절목> <향교전곡출입절목> 등은 옥과향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료입니다.

단군, 안향, 신숭겸, 마천목, 윤관, 김인후를 모신 사당이 있습니다.
단군전(檀君殿)은 단군왕검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3·1운동 당시 곡성에서 만세를 주도했던 신태윤이 후학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1931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개천절에 국민들이 이곳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독립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도동묘(道東廟)는 안호가 1676년(숙종 2)에 우리나라 주자학의 시조인 안향과 중국 송나라 주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사당 안에는 주자와 안향의 초상화가 놓여 있으며, 용의 모습을 한 향로와 술잔이 있습니다. 해마다 봄(3월 15일)과 가을(9월 15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도동묘안향영정(道東廟安珦影幀)은 도동묘에 소장된 안향의 영정입니다. 소수서원에 모셔진 안향 영정(국보)을 1660년에 이모한 작품으로 영정 모사를 주관했던 안응창은 영정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흠모의 정을 더하여 당대 거유들의 찬문을 덧붙여 후손으로서의 자랑스러운 마음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영정은 붉은색 옷에 검은 복두를 쓴 모습으로 상반신만 그렸으며 의습의 필치는 유약하고 군데군데 끊긴 흔적이 있습니다.

영정의 상단에는 김상헌, 신익성, 이경석, 홍서봉 등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들의 찬문이 덧붙여있습니다. 이 작품이 제작되었을 때는 대부분 타계한 상태이어서 이 찬문들은 영정을 모사하면서 지은 것이 아니라, 앞서 지은 찬문들을 영정 모사 때 덧붙여 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초명은 유, 본관은 순흥, 자는 사온, 호는 회헌입니다.
1260년(원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었으며, 1289년(충렬왕 15)에는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손수 베끼고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와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널리 제자를 양성하여 그 이후 우리나라에 유학이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덕양서원은 1589년(선조 22) 신숭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곡성군

용산재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탄생지입니다.
용산재(龍山齋)는 장절공 신숭겸의 생가터로 1868년(고종 5) 신명희가 마련한 부지에 1897년에 유허비를 세웠습니다. 1929년에는 후손들이 태를 묻었다는 곳에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용산단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동상이 우뚝 서 있는 뒤편에는 장절공이 순절하던 대구 공산전투를 묘사한 <충렬도>와 기러기를 활로 쏘는 <사안도(射雁圖)>가 그려져 있습니다. 태조가 장군들과 평주 삼탄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공중에 기러기 3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는데 태조가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묻자 장절공이 나서 태조가 명한 대로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혀 떨어뜨렸습니다. 이에 태조는 장절공에게 평산신씨 성과 땅을 내렸습니다.

신숭겸은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서 태어나 어릴 적 이름은 능산, 시호는 장절공으로 평산(平山)신씨의 시조입니다.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을 왕으로 세웠고, 927년 후백제 견훤과 맞선 공산전투 때 왕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왕과 갑옷을 바꿔 입고 나가 순절했습니다. 장절공은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충절의 상징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태조 왕건은 공산전투 현장과 가까운 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절(지묘사)을 지어 명복을 빌었고 또 고려 태사로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현재 곡성 덕양서원과 용산재, 대구 표충사, 춘천 도포서원, 평산 태백산 성사, 동양서원 등에도 배향되고 있습니다.

덕양서원(德陽書院)은 1589년(선조 22) 신숭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고 사우와 위패만 보존되어 오던 중, 1603년에 사우를 중수하고 1665년에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건물을 중수하였습니다. 1695년(숙종 21) ‘德陽(덕양)’이라고 사액되었고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4년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 연서재, 신덕재, 내삼문, 강당, 전사청과 비각, 외삼문, 고직사, 중수비 등이 있습니다.

사우에는 신숭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연서재와 신덕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서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 겸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강당은 서원의 여러 행사나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제향 시 제수를 마련하여 보관하는 곳입니다. 내삼문은 성인문이라 하여 중앙의 신문과 양쪽 협문으로 되어 있으며, 고직사는 관리인이 주거하고 있습니다.

신숭겸의 묘는 곡성과 춘천 두 곳에 있습니다.
장절공의 묘소는 곡성 장군단과 춘천 두 곳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태안사 경내에 있는 장군단은 장절공 전사 후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가 공의 잘린 두상을 물고 달려와 태안사 뒷산에 와서 사흘간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태안사의 스님이 장군의 머리를 묻어주고 제사를 지냈으며, 훗날 이곳을 ‘장군단’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장군단 아래를 파헤쳐보니 석함이 나왔다고 합니다. 신숭겸은 평산신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곡성의 서낭당 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또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는 묘역은 특이하게도 봉분이 세 개인 일인삼분묘(一人三墳墓)입니다. 머리가 잘린 장절공의 시신을 수습한 왕건이 목공을 시켜 얼굴을 조각해 만든 다음 조복을 입혀 장례를 치렀는데 황금 두상으로 알려지면서 도굴을 피해 봉분 3개를 조성했다고 합니다. 출생지나 전사지와 멀리 떨어진 춘천에 묘역을 조성한 까닭은 본래 이곳은 도선국사가 왕건의 묘자리로 알려준 명당이었는데, 자신을 위해 희생한 장군을 위해 묘자리를 양보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의 예종은 1120년(예종 15) 서경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공신 김락과 신숭겸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참석하게 한 것을 보고, 왕이 그들의 공을 추도하여 노래를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도이장가(悼二將歌)>입니다. 두 장수를 애도한다는 뜻의 <도이장가>는 이두문(吏讀文)으로 된 향가 형식의 노래로 8구체를 4구씩 2분 하여 지었습니다

임을 완전하게 하신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넋은 갔지만
내려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했구나.

바라다보면 알 것이다
그때의 두 공신이여
이미 오래 되었으나
그 자취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마천목의 묘역에는 묘소와 초상을 봉안한 충정묘, 재실인 영모재가 있습니다.
마천목(馬天牧)의 묘는 1431년(세종 13)에 조성한 것으로 봉분은 직사각형이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유행하던 형태입니다. 무덤에는 묘표,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 석물이 남아 있습니다.

충정묘(忠靖廟)에는 마천목의 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묘는 왕명으로 지었으며 공신에 대한 예에 따라 교서와 녹권, 초상이 내려졌습니다. 처음 지은 뒤에 여러 차례 고쳐지었는데, 1990년에 고칠 때에 보물로 지정된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처럼 충정묘는 녹권의 보관 장소로도 의미가 있는 건물입니다.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은 절충장군 웅무시위사상장군 마천목에게 발급한 필사본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의 하나로 현재까지는 유일본입니다.

좌명공신(佐命功臣)은 조선 초기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 호로 마천목은 후에 태종이 되는 정안군을 도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 개국공신을 책봉한 예를 좇아,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으로 칭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하였는데 이때 마천목은 3등 공신으로 녹권을 사급받았습니다.

영모재는 1922년에 마천목을 비롯한 장흥마씨 선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며 가구 구조와 재목을 다듬는 수법이 매우 뛰어납니다.

마천목의 시호는 충정이며 1400년(정종 2) 2차 왕자의 난 때에 방간이 박포와 같이 난을 일으키자 박포를 잡아베어 난을 평정한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에 좌명공신 3등에 올랐습니다. 이후 상장군이 되어 나주목사, 전라병사, 집현전 대제학, 병조판서를 거쳐 판돈영부중추원사까지 지냈으며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로 있을 때 전라 병영성을 축조하였습니다.

덕산사(德山祠)는 고려 예종 때 원수 윤관 장군과 부원수 오연총 장군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원래는 1583년(선조 16)에 함경도 경성에 있었으나 1935년경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윤관은 고려 문신으로 고려와 여진족이 자주 충돌하자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만들어 여진족을 격파하고 9성을 쌓았습니다. 오연총은 고려의 문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후 병부 낭중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1107년(예종 2) 원수 윤관과 함께 여진 정벌을 나섰고 9성을 쌓았습니다.

영귀서원(詠歸書院)은 1564년(명종 19)에 옥과 현감으로 재임했던 하서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사원으로서 처음 옥과면 죽림리에 영귀정사로 세워진 뒤 1694년(숙종 20)에 영귀서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김인후, 이흥발, 신이강을 제향한 후 허계, 허소가 추배되었고 1868년(고종 5) 훼철된 이후 1960년에 이르러 현 위치에 복설되었습니다. 현재는 주벽 김인후를 포함 유팽로, 신이강, 허소, 허계, 위백규 등 모두 6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청송심씨 심광형이 제월리에 터를 잡고 군지촌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제월리는 마을의 지형이 섬진강을 달처럼 둘러싸고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곳의 자연마을은 군촌, 곡촌, 평촌 등이 있습니다.

군촌은 1520년대에 심광형이 자손만대가 거주할 새 터를 잡고 ‘군지촌(涒池村)’이라 하였는데 군지라는 지명은 심광정이 자기의 낙향을 고대 순임금의 분주(分州)에 빗대 자손이 번성하기를 염원하는 뜻을 담았습니다. 1914년에 군지촌에서 ‘지’를 빼고 군촌이 되었습니다. 곡촌은 군촌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골말’이라고도 합니다. 평촌은 마을 앞에 평평한 들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호정고택은 섬진강이 반달꼴로 끼고 돌며 멀리 광주 무등산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이는, 풍수지리상 가장 아름다운 집자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곡성군

제호정 심광형이 군지촌에 청송심씨 종가를 열었습니다.
제호정(霽湖亭)고택은 섬진강이 반달꼴로 끼고 돌며 멀리 광주 무등산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이는, 풍수지리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자리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의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지촌정사(涒池村精舍)'는 사랑채의 이름입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다고 하나 안채는 19세기 초 정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랑채는 행랑채의 동쪽에 있으며 그곳에 동네 사랑방이라 일컫는 군지정사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 서당으로 쓰였다고 하며, 앞뒤로 담장이 없어서 접근하기 쉽습니다. 서쪽부터 사랑방이 위, 아래로 있으며, 그 옆에 대청이 놓여 있는데 개방되었고 방 앞, 뒤로는 모두 마루가 깔려있습니다. 행랑채는 안채 마당 앞에 있으며, '一'자형으로 안채보다 훨씬 늦게 지었으며, 대문간을 중심으로 동쪽에 방이 있고 서쪽에는 외양간과 헛간이 있으며 집 앞 언덕 위에는 18세기에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안채는 '一'자형으로 서쪽부터 부엌이 위, 아래에 있으며, 그 옆에 큰방이 있는데 앞, 뒤에 툇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에 대청이 있고, 뒤쪽에는 도장과 작은방이 있습니다. 큰방과 도장 앞은 문 시설 없이 개방되었고, 작은방 앞은 문을 달아 가로막았습니다.

함허정(涵虛亭)은 1534년(중종 38) 심광형이 군지정사를 짓고 난 후 지역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전형적인 정자입니다. 정자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울창한 수목 등 주변 경치가 좋아서 조선 시대에 옥과 현감으로 부임하면 함허정에서 고을의 유생들을 초청하여 향음례(鄕飮禮)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증손자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으며 5대손 심세익이 고쳤고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수리를 한 것입니다. 구성은 마루 1칸을 3면을 터 만들었고 2칸 반은 방으로 꾸몄으며 나머지 오른쪽 반 칸은 바닥을 한 단 높여 쪽마루를 두었습니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섬진강, 울창한 숲, 멀리 무등산이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리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창건한, 구산선문(불교의 아홉 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산지이다.Ⓒ곡성군

신라의 고찰 태안사와 도림사가 있습니다.
태안사(泰安寺)는 봉두산(754m) 서쪽 자락에 있으며 봉두산의 옛 이름은 동리산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리산과 봉두산 모두 봉황을 상징하고 있어 봉황이 자주 등장하는 곡성의 풍수지리적인 특성과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북쪽으로는 대황강, 동쪽으로는 섬진강을 품고 있는 봉두산은 인근에 올망졸망 펼쳐진 산군들 사이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태안사는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28년까지 대안사로 불려오다 조선 이후 태안사로 불렸습니다. 이는 절의 위치가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가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들이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에 따듯하여 심성을 닦고 기르는데 마땅한 곳이다”라는 적인 선사 혜철의 부도 비문처럼 ‘대’와 ‘태’의 뜻은 서로가 통하는 글자이고, 평탄하다는 의미가 덧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태안사는 742년(경덕왕 1) 세 명의 신승(何許三位神僧)이 창건하고, 나말여초에 걸쳐 적인 선사 혜철과 광자 대사 윤다가 이 절에 주석하면서 거찰로 변모했습니다. 개산조인 혜철국사가 이 절에서 법회를 열어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 되었으며 919년(태조 2) 윤다가 중창했습니다. 고려 중기 이후 사세가 점점 축소되었고 조선 시대는 배불정책으로 쇠퇴하였지만,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가의 원당으로 삼기도 하였고. 1683년(숙종 9) 정심이 중창하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때 대웅전 등 15채의 건물이 불탔습니다.

경내에는 혜철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광자대사비(보물),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대바라(보물), 동종(보물), 대웅전, 보제루, 해회당, 선원, 능파각, 일주문, 삼층석탑 등이 있습니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은 전체 높이가 3.1m에 달하는 팔각원당형으로 철감선사 부도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처럼 철저한 비례 속에 구현된 화려함은 덜합니다. 부도 옆에는 혜철의 행적을 비롯하여 사찰에 관계된 여러 가지 내용을 적은 부도비가 서 있는데, 1928년에 파손된 비신을 새로 세울 때 광자 대사 부도비의 이수와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 위로 탑신과 머리 장식을 올렸습니다. 기단은 아래, 가운데, 위 받침돌로 나눠지는데, 아래 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이고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가운데 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위 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탑신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 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고 옆면에 다시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습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 올려진 상태입니다. 상륜부에는 앙화, 복발, 보륜, 보주 등이 차례로 잘 남아 있습니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 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 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탑도 적인 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배알문(拜謁門)은 조륜청정탑에 들어가는 문으로 조선 후기 호남의 명필로 알려졌던 창암 이삼만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있는데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운치 있는 문으로 유물을 향해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적인 선사의 법명은 혜철이고 자는 체공으로 경주에서 원성왕 원년에 태어났습니다. 적인 선사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냈으며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절을 즐겨 찾았다고 합니다. 15세에 출가,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했는데 그것은 그 당시 널리 읽히던 사상이 화엄사상이었고 화엄 종찰인 부석사가 그의 집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22세 되던 해 혜철은 구족계를 받았고, 계를 받은 후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탄식하며 중국에 가서 공부하고자 814년(헌덕왕 6) 30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남종선 계통의 지장 선사에게 배웠습니다.

지장의 제자 네 사람 가운데 셋이 신라인이었는데, 도의 선사와 실상산문의 개창자 홍척, 그리고 혜철입니다. 혜철은 55세에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9년 동안 머물렀고 63세에 동리산문을 열어 선풍을 펴다가 77세에 입적하였는데,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이 그의 제자입니다. 그가 돌아간 7년 후 경문왕은 시호를 ‘적인(寂忍)’이라고 하고, 탑 호를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 내렸는데, 다만 부도와 탑비가 새겨진 연대는 불투명합니다. 혜철의 부도와 부도비는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의 선풍은 광자 대사로 이어졌습니다

광자대사탑은 고려 시대의 탑으로 광자 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습니다. 탑의 형태는 기단에서 지붕돌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 위에 탑신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 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 받침이 올려져 있고 위 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탑신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습니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으며 상륜부는 흔하지 않게 머리 장식이 완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광자대사탑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귀부 위에 이수만 얹혀 있습니다. 거북은 목이 짧아 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수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 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과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신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 있어 광자 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으며 곳곳의 여러 조각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5년 후인 950년(광종 1)에 세웠습니다.

광자 대사(廣慈大師)는 태안사의 2대 조사이며 자는 법신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입니다. 864년(경문왕 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여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 머물며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에서 계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습니다. 945년(혜종 2) 82세로 입적하였는데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태안사의 현관 역할을 하는 능파각(凌波閣)의 운치있는 다리 겸 누각은 계곡의 풍광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곡성군

능파각(凌波閣)은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 건물입니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하였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합니다.

850년(문성왕 12)에 혜철 선사가 처음 지었고, 941년(태조 24) 광자 대사가 수리하였으며 그 뒤 파손된 것을 1767년(영조 43)에 다시 지었습니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습니다.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기둥으로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 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입니다.

삼층석탑은 연못 중앙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절 내의 광자 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원래는 기단의 한쪽 면과 탑신의 1층 지붕돌, 2, 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하여,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었습니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긴 하나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느껴지며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안사 범종은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위에는 대롱 형태로 솟은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두 다리로 천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었고 어깨 위를 돌아가며 입화 장식과 그 아래로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 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넓은 몸체에는 네 군데에 사각형의 연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연뢰를 나즈막하게 돌출 표현하였습니다. 몸체의 하대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왕실 발원의 범종에서 사찰 중심의 범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전통 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우수한 16세기 사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태안사 바라는 지름 92㎝로 국내에서 제일 큰 바라로 외곽의 일부가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손상이 거의 없습니다. 이 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 크기로 보아 직접 들고 치기보다는 어느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도림사(道林寺)는 동악산 줄기인 형제봉 중턱에 있으며 660년(무열왕 7)에 원효대사가 화엄사로부터 이주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며 도선국사,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 도인이 숲같이 많이 모여들었다 하여 도림사라 하였습니다. 현재는 응진당, 지장전,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고 절 입구에는 허백련 화백이 쓴 ‘도림사’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사찰이 보유한 괘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한 석가삼존도 형식으로 중앙의 본존불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본존불 좌우에 연꽃 가지를 들고 서 있는 두 보살은 거의 비슷한 형태인데, 왼쪽의 문수보살은 보관에 조그만 부처가 묘사된 것이 오른쪽 보살과 다릅니다.

1683년(숙종 9)에 계오, 삼안, 신균 등의 세 화원 비구가 그린 이 그림은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화기가 있어서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자료가 귀한 석가 삼존불 형식으로 그 색채 구성과 문양 표현, 인물의 형태 등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는 17세기 후반기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합니다.

▲가곡리오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조각 기법이 매우 세련된 모습인데, 고려 시대에 백제 옛터에서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의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곡성군

이 석탑은 고려 시대에 백제 옛터에서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입니다.

가곡리오층석탑은 가곡리 매봉 북쪽 경사면에 있는 절터의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입니다.

맨 아래 바닥 돌은 시멘트로 만든 기단에 묻혀 있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으며 탑의 아래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없으나 위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습니다.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표현되어 있으며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남쪽 면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감실 효과를 냈습니다.

지붕돌의 경사는 완만하나 양 끝의 귀마루가 매우 두텁게 표현되어 백제계 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붕돌의 처마 선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음 직한 구멍이 있습니다. 특히, 매 층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 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합니다.

이 석탑은 고려 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담양 남산리오층석탑(보물)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히, 탑신과 지붕돌에 나타난 표현양식과 더불어 몸돌 받침이 있는 점은 고려 시대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조각 기법이 매우 세련되며 안정감을 보이는 이 석탑은 고려 시대에 백제 옛터에서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6월) <곡성고을>을 확인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프레시안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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