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운명을 바꾸고 살인 도구가 됐던 ‘소주’[이기환의 Hi-story](84)

2023. 5. 24.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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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유곽쟁웅(遊廓爭雄)’. 술에 잔뜩 취한 양반 한량들의 유흥가 난투극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는커녕 제 한 몸도 돌보지 못한다는 말인가(縱不能以國家爲念 獨不顧一身之性命乎).”

1433년(세종 15) 10월 28일이었습니다. 세종이 술(酒)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글을 발표합니다.

“술은 몸과 마음을 해친다.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한다.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하게 만들며, 성품을 파괴하고 생명을 잃게 한다….”

세종은 이 교서를 족자로 만들어 서울은 물론 전국의 관청에 걸어두게 했습니다.

“임금이 막는다고 술을 끊겠냐” 세종이 특히 개인과 나라를 망칠 술로 지목한 것은 바로 ‘소주’였습니다. 7개월 전인 3월 23일 이조판서 허조(1369~1439)가 세종에게 소주의 폐해를 열거하면서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예부터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가 많은데, 최근에는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흔합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그러나 세종이 누굽니까. 아무리 나라님이라도 법령으로 술을 금할 수 없다, 섣불리 금주령을 내렸다가는 범죄자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종의 한마디가 재미있습니다.

“임금이 금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

대신 술의 폐해를 알리는 교서를 만들어 족자 형태로 배포한 겁니다.

사실 허조의 말도, 세종의 말도 맞습니다. 술의 폐해가 필설로 다할 수 없지만, 그것을 끊기도 힘들죠.

‘소주 때문에 바뀐 조선의 운명’ 역사적으로 간과되는 가장 극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소주가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은 이야기죠.

“원체 술을 좋아한 진안대군 이방우는 날마다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태조실록> 1393년 12월 13일자)

이방우(진안대군·1354~1393)는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의 맏아들입니다.

고려말에 예의판서(예조판서·정2품)라는 고위직에 오른 전주 이씨 집안의 기둥이었죠.

하지만 아버지(이성계)의 위화도회군(1388) 이후 역성혁명이 노골화하자 운명이 갈리죠.

1719년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열린 기로연에서 70세 이상의 원로대신들이 술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그린 중 ‘기사사연도’. 원로들에게 술을 돌리는데, 그중 한 원로가 술에 취해 비틀거렸는지 다른 신하가 부축하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이 되기를 자처하고 철원으로 은거합니다. 그곳에서 소주를 마시며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술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방우가 죽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태조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96)와 낳은 어린 아들(방석·1382~1398)을 세자로 세웠을까요. 설령 세웠다 해도 다섯째 아들인 방원(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이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까요.

설사 일으켰다 칩시다. 그렇지만 열세살 연상인 적장자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허수아비 둘째 형(정종·1357~1419, 재위 1398~1400)을 세우고,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올랐을까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이방우가 왕위를 계승했다면 어땠을까요.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역사는 없었겠죠. 만고의 성군인 세종은 왕위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한글 창제도 없었던 일이 되었을까요.

‘소주+백화주’ 폭탄주로 살인… 이방우뿐이 아닙니다. 1417년(태종 17) 윤5월 4일 금천 현감 김문이 인근 수령들이 마련해준 전별연에서 마신 소주 때문에 사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1515년(중종 10) 4월 23일 제주목사 성수재(?~1515)가 죽자 <중종실록>의 사관은 “성수재는 일찍 무과에 장원급제했고, 청렴하고 유능해서 임금이 크게 쓰려고 했지만, 소주를 너무 좋아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단순 음주 사망 사건이죠. 소주를 이용한 살인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1491년(성종 22) 2월 19일 <성종실록>은 내연남(강위량)과 짜고 남편에게 소주를 먹여 취하게 한 뒤 몽둥이로 때려죽인 여인(소은금)의 사연을 실었습니다.

아버지의 첩과 짜고 아버지에게 폭탄주(‘소주+백화주’)를 마시게 해서 죽인 비정한 아들의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중종실록> 1536년 4월 23일자를 볼까요. 황간현(충북 영동) 사람인 오여정은 아버지(오찬)의 첩(돌지)과 정을 통합니다.

당대 풍류남아들이 즐겨 읊었다는 ‘장진주’(술 권하는 노래)가 새겨진 ‘청자상감 장진주시명 매죽양류문 매병’(보물). ‘장진주’는 당나라 시인 이하가 쓴 시로, ‘종일토록 마시고 양껏 취하자’는 구절이 들어 있다.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간통 행각이 드러나자 불륜 남녀는 ‘소주와 백화주’를 섞어 아비(남편)에게 마시게 합니다. 백화주는 철쭉을 담가 만든 술입니다. 철쭉에는 그레이아노톡신이라는 독성분이 들어 있답니다. 즉 불륜 남녀는 독성성분이 든 ‘백화주+소주’로 폭탄주를 만들어 아비(남편)를 살해한 겁니다.

조선시대 소주 도수는 45도 소주가 얼마나 독하기에 사람이 죽어 나갈 정도일까요. 원래 전통적인 소주는 안동소주와 같은 증류식 소주였습니다.

증류를 시작하면 알코올 도수가 80~70% 정도인 독주가 나오고요. 시간이 지나면 10%까지 알코올 도수가 내려가게 되고 이것이 섞이면서 45%의 소주가 되는 겁니다. 최근 출시된 업체의 소주 도수가 14도대(14.9도)로 뚝 떨어졌다죠.

무가당에 저알코올 도수를 선호한다는 MZ세대에 맞는 도수라고 하네요.

1924년 소주를 만들 때의 도수는 35도였답니다. 이후 희석식 소주가 나오면서 소주의 도수는 낮아지기 시작했고요.

이후 30도(1965)-25도(1973)-23도(1998)-20도(2006)-15.5도(2019)에 이어 14.9도 소주까지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 최소 45도에 이르렀던 조선시대 소주를 상상하긴 쉽지 않죠.

소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술입니다. 원래 우리의 전통술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 소주를 처음 만들었답니다.

1258년 몽골 정벌군이 아바스 왕조를 공략할 때 이 술의 제조법을 배워갔다고 하죠. 몽골군은 고려의 개경과 안동, 제주도에 양조장을 만들었는데요. 안동소주가 유명한 이유를 알 것도 같죠.

소줏고리에서 소주를 내리는 장면. 전통적인 소주는 증류식으로 내렸다. 증류를 시작하면 알코올 도수가 80~70% 정도인 독주가 나온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10%까지 알코올 도수가 내려가게 되고, 이것이 섞이면서 45%의 소주가 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주도에게 적을 무찌르라 하세요” 고려인들은 ‘물처럼 맑고, 맛은 매우 진하고 강렬한’(<본초강목>) 소주에 매혹됐습니다.

기막힌 일도 있었습니다. 1376년(우왕 2) 경상도원수 겸 도체찰사인 김진은 밤낮으로 소주 파티를 즐겼는데요.

휘하 장병들은 김진 일당을 ‘소주도(燒酒徒·소주의 무리)’라 하며 비아냥댔다죠.

이듬해 왜구가 침입해 합포영(창원)을 불사르고 유린했는데요. 김진의 군사들은 그러나 콧방귀를 뀌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답니다. “저희가 뭐하러 갑니까. 저들 ‘소주도’를 시켜 적을 무찌르라 하세요.”

김진은 결국 혼자 줄행랑을 쳤고, 그 죄로 평민으로 강등됐습니다.

선조가 송강 정철에게 직접 하사한 잔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선조가 정철에게 작은 은잔을 주며 “앞으로 하루에 이 잔으로 석 잔만 마시거라” 했다. 그런데 정철이 이 잔을 두드려 펴서 사발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한번 매혹된 ‘소주 한 잔’의 유혹은 나라님의 추상같은 금주령에도 근절되지 않죠.

1491년(성종 22) 2월 22일 성종은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소주는 앞으로 약(藥)으로 먹으라는 것을 빼고는 마시지 마라”는 ‘조건부 금주령’을 내렸는데요. 그게 어디 통하나요.

1489년(성종 20) 12월 29일 전연사(궁궐 수리 및 청소 담당)의 노비인 비라가 내의원의 홍소주를 훔쳐 마셨다는 혐의로 사형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성종은 “소주 한 잔에 무슨 사형이냐”면서 감형처분을 내렸습니다.

소주 반 잔도 못 한 세종 임금은 어땠을까요. 실록을 보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술을 권한 경우는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약’으로 쓰일 때 그랬습니다.

1422년(세종 4) 5월 26일 의정부와 육조가 세종 임금에게 “이제 소주 한 잔 드셔도 좋을 것 같다”고 권합니다.

5월 10일 부왕(태종)이 서거한 뒤 수라를 제대로 들지 못하자 “음식과 함께 소주 한 잔이라도 드시어 옥체를 보호하시라”고 권한 겁니다. 세종은 이때 “나는 원체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대신들이 그리 청하니 한 잔 들겠다”며 “소주를 올리라”고 허락했습니다. 세종은 들인 소주를 반 잔쯤 마시고는 내려놓았습니다.

과연 소주 반 잔도 허락하지 않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성군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이 소주를 약이 아니라 술로 여기며 홀짝홀짝 마시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주막’. 조선시대 임금들은 술의 폐해를 알고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술을 근절하지는 못했다. /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오미자차 마셨을 뿐’이라고 변명한 영조 1736년(영조 12) 4월 24일 영조가 경희궁 흥정당(편전)에서 야대(밤중에 베푸는 경연)를 끝내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습니다. 그때 검토관 조명겸(1687~?)이 임금에게 쓴소리를 던집니다.

“세간의 여론을 들어보니 성상(임금)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바라건대 조심하소서.”

임금에게 ‘술 좀 작작 마시라’고 지적한 겁니다. 더듬거리며 했다는 영조의 군색한 변명이 기가 찹니다.

“아니다. 그저 목마를 때 간혹 오미자차를 마신다. 아마도 남들이 그걸 소주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

검토관이면 정6품 벼슬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6급 정도의 공무원이 대통령에게 ‘술 좀 작작 마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이 쩔쩔매면서 “아니야, 난 오미자차를 마셨을 뿐이야”라고 변명했고요.

풍류남아의 상징 예나 지금이나 술은 풍류남아의 전유물로 여겨집니다.

<효종실록> 1657년 9월 26일자를 볼까요. 효종이 사대부들의 못된 술버릇을 지적합니다.

“이름난 벼슬아치라는 자들이 음주를 풍류로 여긴다. 심지어 술을 마시지 않고 국사에만 전념하는 사람을 도리어 ‘잗단(하찮은) 무리’라고 지목하며 폄훼한다. 참 한심한 일이다.”

임금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실록은 ‘군주=풍류남아’임을 강조하면서 술 관련 일화를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조(1417~1468·재위 1455~1468)와 신숙주(1417~1475)의 일화가 유명하죠. 두 사람은 군주와 신하가 아니었다면 동갑내기(1417년생) 절친이 됐을 겁니다. 세조는 1461년 6월 4일 소주 5병과 함께 술잔을 신숙주(당시 좌의정)에게 하사했어요.

구한말 충북지역의 주막. 단원 김홍도의 ‘주막’ 풍속화를 연상시킨다. /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술잔에는 덩굴에 박이 매달려 있는 형상을 그리고, 안쪽에는 임금이 지은 시(詩)를 썼습니다. 그 시가 재미있습니다.

“경이 비록 나를 보고 웃을 것이나 내 박이 이미 익었으니 쪼개서 잔을 만들었다.”

무슨 뜻일까요. 세조는 2년 전인 1459년 야인(여진족) 토벌에 나선 신숙주를 교태전에서 독대하고 격려의 술자리를 베풀었는데요. 이때 세조는 교태전 담장 아래 심은 ‘덩굴 박’을 바라보며 “저 박이 열매가 열릴까” 하고 물었습니다.

잔뜩 술에 취한 신숙주는 “아무래도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는데요. 하지만 얼마 후 박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세조는 “박이 열리지 않겠다”고 한 신숙주에게 그와 같은 ‘희롱시’를 보낸 겁니다. 실없는 ‘아재개그’지만 임금이 던졌으니 어쩝니까. 이튿날(5일) 임금이 하사한 명문 술잔과 소주를 받은 신숙주가 “성은이 망극하다”고 아뢰었습니다.

‘술 먹고 행패 부리면’ 제가 술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인용하는 3300년 전 상나라 시대 갑골문이 있는데요.

“필(상나라 대신)이 과음 때문에 술병이 걸렸는데, 대왕의 분부를 받들 수 있을까요(畢酒才病 不從王古).”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왕의 명령까지 이행할 수 없을 정도였을까요. 상나라는 동이족의 일파가 세운 왕조입니다.

하기야 “무리가 모여 밤낮으로 쉼 없이 음주 가무를 즐긴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삼국지> 위서·동이전)는 동이족의 술사랑은 못 말리죠.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 아닙니까. 여기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질타’가 귓전을 때립니다.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소가 물 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붓는다면 어찌 술 마시는 정취를 알겠느냐.”

이도 저도 다 필요 없습니다. 맨 앞에 인용한 세종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리죠.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는커녕 제 한 몸도 돌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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