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바누스의 ‘십자군’인가, 라이문두스의 ‘동서협력’인가

고명섭 2023. 5. 2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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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카이로스][고명섭의 카이로스]

십자군 전쟁은 신앙의 깃발을 들고 벌인 무지와 광신의 난장이었다. 톨레도에서 시작된 번역 운동은 서양이 동양에게서 배움으로써 계몽의 시대로 가는 첫 문을 연 동서 공동의 문명화 운동이었다. 세계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우르바누스가 시작한 폭력과 적대의 십자군 전쟁인가, 라이문두스가 시작한 포용과 화합의 문명 통합 운동인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사흘 동안 3만명이 광란의 제물이 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리스 사상과 함께 서양문명의 두 축을 이루는 기독교 사상은 폭력 인식에 커다란 역사적 변화를 겪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비폭력을 신념화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도 무기를 들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폭력 조직체인 군대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는 <호교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는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밖에 몰랐던 우리가 이제는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과도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부르고 죽노라.” 유스티누스는 폭력 저항을 거부하고 참수당했다.

기독교는 평화의 힘으로 지중해 세계를 천천히 물들였고, 중세에 이르러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종교가 됐다. 그 사이 전쟁과 폭력을 대하는 기독교의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바뀌었다. 1095년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토한 열변이 그 변화를 알려준다. “교회의 사역을 맡은 나 우르바누스는 신의 명령을 전해주려고 주의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왔노라.” 우르바누스는 잃어버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고 형제 나라 비잔티움 제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이슬람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우르바누스의 열변과 함께 200년 동안 지속할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수장이 우두머리로 나선 전쟁이었다. 우르바누스는 이교도와 싸우다 죽는 자는 모든 죄를 사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동방의 형제국을 돕는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이교도에게서 성지를 되찾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예루살렘이 7세기 초 이슬람 지배 아래 들어가기는 했지만, 500년이나 지나 굳이 이때 성지를 되찾겠다고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는 진즉 협정이 맺어져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기독교 순례자들을 산적들의 약탈로부터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우르바누스의 전쟁 선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제압하고 교황권을 황제권 위에 올려놓으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결정이었다. 십자군 깃발 아래 저마다 야심을 품은 영주와 기사, 상인과 농민, 모험가와 싸움꾼이 몰려들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피를 뿌렸다. 1096년 독일에서 출발한 십자군 무리는 라인강 계곡의 유대인 공동체를 초토화하고 수천명을 죽였다. “보라, 여기에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인이 있는데 우리는 이스마엘의 자손에게 복수하러 가고 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수하자.” 이것이 유럽에서 최초로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벌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후 반유대주의 폭력은 유럽의 질환이 됐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유대인은 기독교의 원수라는 망상을 품은 사람들에게 무더기로 학살당했다.

폭력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교황의 면죄부를 받은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여자든 남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가리지 않았다. 사흘 동안 3만명이 광란의 제물이 됐다.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이 피의 범람원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동남부 프로방스에서 온 연대기 작가는 감격에 차서 학살 현장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무릎과 고삐까지 차는 핏물 속에서 말을 달렸다. 이곳이 불신자들의 피로 가득 찬 것은 정의롭고 훌륭한 신의 심판이었다.” 유대인 회당과 이슬람 사원엔 주검이 쌓였고 다섯달 뒤에도 예루살렘은 썩어가는 주검에서 나는 악취로 진동했다.

십자군은 정복지를 다섯곳으로 나누어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서방의 첫 제국주의 진출이었다. 유럽의 교황과 군주들은 13세기 말까지 십자군을 일곱차례나 더 조직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침략자에게서 동방 기독교 형제국을 돕는다’는 애초의 명분이 허울뿐이었음을 한번 더 입증했다. 1204년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한 뒤 폐허 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 나라는 57년 동안이나 존속했다. 십자군 전쟁은 정치적·경제적 탐욕을 종교적 대의로 포장한 기만의 전쟁이었고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인의 맹목적 적개심을 동력으로 삼은 무지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동방을 휩쓰는 동안 지중해 서쪽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독교 왕국이 되찾은 스페인 중부 도시 톨레도에서 12세기 초부터 대규모 번역운동이 일어났다. 이슬람 문명이 간직해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기독교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톨레도의 대주교 라이문두스 1세가 주도한 이 번역운동은 종교와 민족을 아우르는 연합 운동이었다. 이슬람 철학자, 기독교 성직자, 유대교 지식인이 한자리에 모여 유클리드의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갈레노스와 의학이 담긴 서적들을 라틴어로 옮겼다. 더 중요한 것은 1000년 가까이 잊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저작이 유럽의 공통언어로 번역됐다는 사실이다. 번역사업은 암흑의 유럽에 이성의 빛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번역 중심지 톨레도로 유럽 전역의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다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슬람은 어떻게 해서 고대 그리스 사상의 저수지가 될 수 있었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은 4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끝없이 교리 논쟁을 벌였고 논쟁에서 패배한 종파는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6세기 초에는 비잔티움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기독교 교리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그리스 철학을 금지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터전을 잃었다. 이단으로 몰린 신학자들과 그리스 철학 연구자들은 손때 묻은 책을 싸 들고 동쪽으로 향했다. 시리아와 페르시아는 이방의 학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줬다.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약성서> 속 아브라함에게서 뻗어 나온 형제 종교로 받아들였다. 새 안식처에서 서방 학자들은 그리스 문헌들을 처음에는 시리아어·페르시아어로, 그 다음에는 아랍어로 번역했다.

이슬람 세계는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으로 문명의 불을 밝혔다. 그 중심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있었다. 아랍어로 철학을 뜻하는 팔사파(falsafah)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온 말이었고, 철학자를 가리키는 파일라수프(faylasuf)도 그리스어 필로소포스(philosophos)를 음차한 말이었다. 이슬람 철학자란 곧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뜻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철학 운동은 이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으로 번졌고, 스페인의 이슬람 왕국 수도 코르도바는 그 철학이 꽃핀 도시였다. 알 킨디(801~873)-알 파라비(870~950)-이븐 시나(라틴명 아비켄나, 980~1037)-이븐 루시드(라틴명 아베로에스, 1126~1198)로 이어지는 합리주의 철학 사조가 바그다드와 코르도바 사이 지식 벨트에서 일어났다.

톨레도의 번역 집단은 아랍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 문헌만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난해한 곳이 많았기에, 아랍 학자들이 쓴 주석서도 함께 번역했다. 주석서 가운데 특히 빼어난 아베로에스의 책들이 당시 유럽 지식의 본산이던 파리대학을 강타했다. 코르도바 출신 아베로에스는 장엄한 학문의 불꽃을 피운 이슬람 최고의 철학자였다. 파리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아베로에스 철학을 받드는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이 탄생했다. 중세 신학의 혁신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빛 속에서, 파리대학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치열한 논전을 벌이며 새로운 신학을 세웠다. 신학은 신학으로 끝나지 않았다.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과학주의적·현실주의적 사유의 힘으로 유럽을 중세의 잠에서 깨웠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발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신앙의 깃발을 들고 벌인 무지와 광신의 난장이었다. 톨레도에서 시작된 번역 운동은 서양이 동양에게서 배움으로써 계몽의 시대로 가는 첫 문을 연 동서 공동의 문명화 운동이었다. 세계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우르바누스가 시작한 폭력과 적대의 십자군 전쟁인가, 라이문두스가 시작한 포용과 화합의 문명 통합 운동인가? 답은 분명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 대결은 어떤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고립화 전략은 인류의 통합과 진보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 아니면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의를 키움으로써 재앙을 불러들이고 말 일인가?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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