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아재의 건강일기] (26) 걸으며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을 외우다

김고금평 에디터 2023. 5. 22.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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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육체는 하루하루 배신의 늪을 만든다. 좋아지기는커녕 어디까지 안 좋아지나 벼르는 것 같다. 중년, 그리고 아재. 용어만으로 서글픈데, 몸까지 힘들다. 만성 피로와 무기력, 나쁜 콜레스테롤에 당뇨, 불면증까지 육체의 배신들이 순번대로 찾아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건강은 되찾을 수 있을까. 코로나 시대와 함께한 지난 2년간의 건강 일기를 매주 토요일마다 연재한다.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연설하는 생전의 스티브 잡스. /사진=유튜브 캡처

같은 운동을 1년째 반복하다 보면 그것이 익숙함으로 다가와 습관화하기 쉽지만, 그 효과가 더 커지거나 가슴을 뛰게 만들지는 못한다. 아무 생각 없이 정해진 시간에 뉴스나 드라마를 보는 것마냥(안 보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의무감으로 매달리는 것도 사실이다.

기계적인 운동은 한계가 있다. 몸은 어제처럼 움직이지만, 정신은 그 반대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운동의 방식을 바꿔보기도 하고 양을 줄이거나 늘리기도 하며 급기야 여러 날 멈춰보기도 한다. 운동은 죽는 날까지 '건강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노력인데. 그 노력이 보람과 행복의 가치로 연결되지 못하는 순간 운동도 소멸의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육체는 결국 정신의 통제를 받는다. 어떤 운동을 할 것인가 고민하기 전에, 어떤 마음으로 운동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 마음은 단지 즐겁고 행복하고 웃는 긍정의 소비 방식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단순한 '기분'을 넘어 '보람'의 정신적 행위가 수반될 때 운동도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다.

정신적 보람을 얻으려면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이 목표한 육체적 운동량만큼 정신도 그런 숙제와 목표를 세우는 식이다. 하루 목표량인 1만보를 매일 걸을 때, 오로지 운동에 집중하거나 음악이나 말씀을 듣는 것도 좋지만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를 더 돋보이게 하는 보람과 성취의 효과는 일정의 숙제를 끝내는 할당량에 있다.

이를테면 운동하면서 높은 수준의 구구단을 응용해서 풀어보거나 선현들의 명언을 암송하는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그중 내가 선택한 가장 효과적인 정신적 보람은 영어 문장 외우기다. 구구단이나 명언은 어디까지 얼마나 해야 할지 정하기가 애매하다. 게다가 하나의 풀이와 하나의 문장이 끝나면 또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쉽게 지친다. 그럴 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들었던 음악 청취로 다시 돌아갈 게 뻔하다.

90세 할머니(오른쪽)가 영어 대화를 위해 외국인과 악수하는 모습. /사진=유튜브 캡처


영어 문장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느 방송을 통해 본 할머니 할아버지의 영어 학습에서 시작됐다. 90세 할머니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거리로 나선다. 그때부터 외국인만 보면 말을 건다.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음식점이든 거리든 가리지 않고 일단 가서 '나이스 투 미트 유'(Nice to meet you)부터 외친다. 그 모습만 유심히 살피면 이 노장에게 중요한 건 식사도 건강도 아닌, 오로지 영어 회화인 듯하다.

또 다른 80세 할아버지는 산골 움막 천장에서 바닥까지 새긴 670개 회화 문장을 줄줄이 외는 재미와 보람으로 하루를 보낸다. 촬영에 나선 PD 앞에서 자랑하듯 쉼 없이 외는 할아버지의 가슴 벅찬 시연(試演)은 "대단"이라는 말밖에 떠오르는 단어가 없을 정도다. 88세 '흥' 넘치는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남들이 흉보면 어떠냐. 나만 좋으면 되지. 나만 한 자라도 머릿속에 넣으면 되지." 학습을 위해 어떤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이 할머니의 의지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해 보였다.

영어를 배운 적 없는 노인들의 뒤늦은 학습 열정을 우리는 충격과 감동의 영역에서만 보기 마련이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숙제에 대한 목마름을 이해하면 정신적 보람으로 얻는 건강이 육체적 목표량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교통사고로 죽을 뻔하다 구사일생한 개그맨 고명환이 요식업으로 방향을 튼 뒤 자신의 인생을 끌려다니지 않고 끌고 다니는 주체로 거듭났다며 매일 신바람 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 올해 89세인 의사인 이시형 박사가 "삶의 목표가 뚜렷하면 그걸 이루기 전까지 쉽게 늙거나 아프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아직 하고 싶은 일에 가슴이 뛸 때 건강은 유지되는 법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어 문장 외우기는 그런 면에서 거창하진 않지만 접근하기 쉽고 성취와 보람 측면에서 가성비가 뛰어나다. 수학 풀기와 명언 암송이 단선적이고 독립적이라면, 영어 문장 외우기는 포물선처럼 유동적이고 유기적이다. 게다가 그루브(groove·리듬감)도 넘친다. 일반적인 회화나 숙어에 비해 문장 암기는 ①스토리가 있다는 점에서 끊기지 않고 ②문장을 통해 회화, 문법, 숙어를 동시에 숙지할 수 있으며 ③문장은 '읽기'가 선행되므로 발음 교정에도 손쉽다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문장은 중3 영어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단어가 가장 많고, 문장 난이도도 적당하다. 학창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도 "중3 영어 통째로 외우면 회화에 아무 문제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교 연설문을 접했다. 문장 구성도 중3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데다, 연설문답게 문장이 정갈하고 정제돼 있고 무엇보다 3단계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외우고 싶은 본능을 일으킨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무작정 시작했다. 어떤 '시작'은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기도 한다. 큰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하루 두 단락씩, 문장으로 치면 6~8문장 정도 되는 분량을 '마치 내 인생을 고백하듯' 암송했다.

그리 머리가 좋지 않은 나로서는 외우는 데 나름의 방식이 필요했다. 한 문장 외우고 다음 문장이 바로 나오려면 그 이야기의 전개상 이어져야 하는 필수 구성과 배경을 먼저 숙지해야 했다. 그런 강약 조절의 리듬감으로 하루 두 단락 초과해서 외우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오늘 두 단락 외우고 내일 또 두 단락 그렇게 매일 문장이 쌓이면, 새로 외울 땐 반드시 첫 문장부터 다시 시작하는 습관을 잊지 않았다. 문장이 늘어나서 처음부터 암송해야 할 분량이 갈수록 많아지면 걸음 수도 자연스레 늘게 된다. 처음엔 3000보도 길었는데, 지금은 1만보도 짧다.

무엇이든 시작이 어렵다. 첫 문장 외우고 어느 정도 두세 단락까지 마치면 그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서 외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다 가끔 명문장을 만나면 눈과 입에서 달아날까 여러 번 큰소리 내어 머릿속에 가둬두려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문장을 외우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 "어제 외웠던 그 부분이 뭐더라?" 하고 몇 번 고뇌한 뒤 도저히 모르면 다시 한번 핸드폰을 보며 "맞아!"하고 잊지 않으려고 되풀이한다. 문장 암송에 정신줄을 놓으면 육체적 운동이 하나도 힘들지 않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달리기를 제외하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한 달 동안 외운 분량은 '세 번째 이야기' 시작 전까지 모두 22분 40여초다. 전체 28분 20초의 80%에 해당한다. 문장으로는 거의 100개 정도지만, 한 문장이 대부분 길어 숨을 끊고 시작하는 문장까지 합치면 갑절에 가깝다.

문장을 그럴싸하게 외우고 나면,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다는 은근한 자신감마저 생긴다. "이러다 해외여행에서도 실력 발휘하는 건 아닐까" 같은 환상에 젖기도 한다. 특히 치매 예방과 치료를 위한 예행 연습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여러 의사와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지금까지 나온 치매 치료 중 걷기를 능가하는 운동이 없고 걸을 때 암산하거나 암송을 하면 두 배 이상의 효과를 본다는 결과물들도 적지 않다.

잡스의 문장을 자꾸 외우다 보니, 건강도 건강이지만 그의 삶의 궤적이 주는 의미와 철학이 또 한 번 폐부를 찌른다. 그런 자극들이 결국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닐까.

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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