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고라니를 위한 변명

경기일보 2023. 5. 2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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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흔히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른다. 푸르름이 산과 들을 덮고, 따사로운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대기를 적신다. 짙어지는 녹음을 바탕으로 새 생명이 약동하고 새소리는 풍성함을 더한다. 이 아름다운 호시절에 유독 시련을 겪는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 소목 사슴과에 속하는 고라니다.

이 계절은 바야흐로 고라니의 출산철이다. 암컷 고라니는 겨울철 짝짓기 후 6개월간 배 속에 품은 새끼를 5월부터 낳기 시작한다. 어미는 단독으로 새끼를 낳고 기른다. 부단히 먹어야 젖이 나오므로 먹이활동 때에는 새끼를 갈대밭이나 관목지대에 숨겨 놓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독박육아 워킹맘의 속사정을 알 길 없는 시민들은 홀로 숨어 있는 새끼를 우연히 발견하면 야생동물구조센터에 데리고 온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들인 시간과 노력이 결과적으론 납치가 된 셈이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의 구조 고라니 조난 원인 중 22%가 오해로 인한 새끼 고라니의 유괴였다. 홀로 숨어 있는 젖먹이 꼬물이 고라니를 발견한다면 그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지나치면 된다.

고라니는 대표적인 로드킬 희생양이기도 하다. 해마다 전국 도로에서 생을 마감하는 고라니는 6만여마리에 달한다. 고라니의 영어 이름 워터디어(Water Deer)에서 알 수 있듯이 고라니가 선호하는 서식지는 습지, 농경지, 하천변 등 저지대 일대다. 이런 평야지역은 사람도 많이 살고, 도로 밀도도 높기에 고라니는 로드킬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1년 중에서도 고라니 로드킬은 유독 5월과 7월 사이에 많이 발생(40%)한다. 작년에 태어난 고라니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찾아 헤매는 때여서 도로 횡단 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운전 시 특히 안전속도 준수와 전방주시 주의가 중요한 시기다.

고라니는 전 세계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일부 지역에서만 자연적으로 서식해 분포 범위가 넓지 않다. 중국 개체군 크기는 1만여마리에 불과해 보호받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개체수가 약 70만마리에 이르는 흔하디 흔한 동물이다. 농사짓는 입장에선 고라니 존재가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얄밉게도 여기저기 맛있는 부위들만 뜯어 놓아 상품성을 떨어뜨려 놓는다. 때문에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해마다 15만~21만마리가 사살된다.

전적으로 고라니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이 씁쓸한 현실을 달리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고라니는 농민의 피와 땀방울, 자본의 속성을 당최 이해하지 못한다. 잘 가꿔진 밭은 고라니에게는 그저 매력적인 채식 뷔페나 다름 아니다. 더욱이 도시 및 농경지 확장으로 밀려나는 고라니에게 농작물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온다.

한편 고라니 개체수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상위 포식자의 부재에 있다. 이 땅에서 호랑이, 표범, 늑대를 비롯한 대형 육식동물을 몰아낸 건 우리 사람이다. 지금 겪는 환경 문제가 대부분 자업자득이듯 고라니 문제도 그러하다. 우리 원죄는 까맣게 잊고 고라니를 탓하고 증오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사실 고라니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앞서 160만년 전 한반도에 도래했다. 고라니 입장에선 인간이 침입생물이자 유해 생물일 수도 있겠다. 좋든 싫든 고라니를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왔고 계속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공동체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개체군 관리 방안, 실효성 있는 농작물 피해 방지 시설 및 피해 보상 확대 지원 등 공존의 방안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K-사슴, 고라니가 앞으로 조금은 덜 잔인한 봄을 맞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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