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응접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한 현역…의술ㆍ교육 헌신할 것"

박계교 기자 2023. 5. 2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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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김안과병원'으로 동양 최대 안과병원 성장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자의 길 선택
'정직'을 바탕에 둔 도전정신이 건양인의 자세
학교법인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겸 건양대학교 명예총장인 김희수 박사가 대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평생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부와 명예도 중요하지만 건강을 잃으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9988. 모든 이가 99세까지 88하게 무병장수를 바라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른 게 9988이다. 백수(白壽)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신체 나이를 잊었고, 그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의 건강이 부러울 뿐이다.

학교법인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겸 건양대학교 명예총장인 명곡(明谷) 김희수 박사(96). 건양대학교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명함을 건네고 마주 앉자마자 그에게 다짜고짜 물어본 말은 '건강 비결'이다. 명함을 보던 그는 명함에 적힌 작은 글씨를 안경도 없이 또박또박 읊어 갔다.

김 박사는 "건강 비결이랄 것이 뭐 있나. 그저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한다.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6시에 눈을 뜬다. 술은 천성적으로 맞지 않아 마시지 않고, 담배는 30대까지 피우다 끊었다"며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소식을 하려고 노력한다. 걷기를 즐기다 보니 하루에 1만 보씩은 걷는다. 한평생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일한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요즘도 하루 4-5건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의 한 달 일정표가 빼곡했다. 하모니카, 오카리나 등 틈틈이 배우고 익혀서 다루는 악기만도 5개다. 최근에는 성악과 서예 등 누군가에게 끝없이 배우는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의 삶이다. 서울 갈 일이 있으면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KTX를 탄단다. 서울에서도 지하철 하나면 충분하다. 뚜벅뚜벅 걷기에 아직도 그의 다리는 튼튼하다.

물려받은 아버지의 근면 성실 DNA와 의사였던 큰형의 영향을 받아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자'를 인생의 목표로 설정한 그다. 세브란스의대(현 연세의대·1950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1958년)을 거쳐 서울 영등포에 그의 성을 딴 '김안과병원(1962년)'을 개원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발발한 6·25와 어렵게 결정한 미국 유학길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병원을 개원했지만 처음에는 환자가 없어서 전단지를 만들어 담벼락에 직접 붙이고 다니며 병원을 알렸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10년 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안과로 키우겠다'고 곱씹었다. 의사라는 특권도 내려놓았다. 오직 '환자제일주의'를 머리에 담았다.

그는 "당시만 해도 모든 병원은 6시에 문을 닫고 당시 의사들은 대단한 권위의식을 가지고 병원운영을 했을 때다. 나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역발상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설립 초창기부터 365일 24시간 연중무휴 원칙을 세우고, 설날과 추석, 공휴일은 물론 한밤중이나 새벽에라도 눈이 아픈 사람은 누구든 신속하게 진료받도록 했다"며 "환자들 머릿속에 '김안과에 가면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심었다. 금세 입소문이 나면서 환자는 넘쳐났다. 환자가 하도 많아 병원에 '소매치기 주의'란 안내 문구가 붙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의사로 소위 잘나가던 그가 교육과 연을 맺은 건 우연한 기회였다. 50살이 되던 해 고향인 논산 양촌에서 면장을 비롯, 몇몇 유지가 그를 찾아왔다. '면소재지에 운영이 어려운 작은 중학교가 있는데 인수해줄 수 없냐'는 요청이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지난날 미국 유학 시절이 번뜩 스쳤다.

김 박사는 "오직 의사의 길을 향해 매진한 인생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대한 오래된 선망이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부유한 나라 미국 유학 시절 뼈저리게 실감했던 내 나라의 가난,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며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는 지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대부분을 결정한다. 조건이 불리한 학생들에게 인생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교육이라 믿었다. 폐교되면 그 일대 학생들이 다닐 학교가 아예 없어진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인수를 결심하게 됐다. 그때가 1980년이다. 학교법인 건양학원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그렇게 고등학교와 대학교에다 평생 의료인으로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교육에 접목해 대학병원까지 세웠다. 특히 2000년 2월 621병상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문을 연 건양대학교병원은 김 박사가 안과를 개원할 당시 마음에 새긴 '365일, 언제든지 찾아가도 문이 열려있는 안과'를 '교수가 365일 진료하는 병원'으로 접목했다.

시험기간 때마다 빵을 사들고 도서관에 올라가 격려한 일로 '빵 총장', 캠퍼스 곳곳을 누비며 휴지와 꽁초를 줍고 다니는 '꽁초 총장',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면서 학생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하는 '총장 오빠' 등 2015년 전국 최고령 총장으로 이름에 오르기까지 그의 별명도 이슈였다. 그런 김 박사가 만들고 싶어했던 건양대학교는 학생들에게 '정직'을 바탕에 둔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을 심어주는 것. 정직한 노력으로 승부를 하고, 남의 지식·희생을 부당하게 취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신감 있는 언행과 용모로 남을 배려하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진 학생이 건양인이라고 김 박사는 강조했다. '취업에 강한 실용적 대학', '지역과 더불어 성장하는 대학',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키우는 대학' 등 건양대학교만의 길을 걸었다.

김 박사는 "시골에 대학을 세운다고 하니 다들 말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깡촌에 학교를 세운들 누가 오겠느냐는 것이었다"며 "그러나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역으로 그런 시골학교에 다니고 싶은 괜찮은 학교를 만든다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했다.

정신과 육체가 다 하는 날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의술과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김 박사. 지금도 건양대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자신이 배운 하모니카 등을 연주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다. 공들여 쌓아 올린 병원과 학교가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기댈 언덕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다. 그의 회고록 '특별한 선물'의 마지막 페이지에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들에게 밝힌 "I am still hungry!"는 그가 자신에게 또, 건양인들에게 건네는 도전의 메시지다.

김 박사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직후 히딩크 말처럼 지금이 끝이 아니며 우리는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달려나갈 것을 선언한 것"이라며 "그때처럼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인터뷰를 마쳤다.

대담=디지털뉴스2팀장 박계교·정리=김소현 기자

학교법인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겸 건양대학교 명예총장인 김희수 박사가 대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박사는

1928년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공주고등학교(1946), 연세대학교 의대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수학을 했고, 연세대학교에서 의학박사(1966)를 취득했다. 1962년 영등포에 김안과의원을 개원해 동양 최대의 안과병원으로 성장시켰다. 고향에 건양중·고등학교(1980-1983), 건양대학교(1991)를 세웠고, 2000년 2월 건양대학교병원을 개원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2007),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교육발전 부문, 2011), 캄보디아 훈센 총리 훈장(2015), 2016년을 빛낸 도전 한국인 대상(2017)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현재 학교법인 건양교육재단 설립자 겸 건양대학교 명예총장, 의료법인 건양의료재단 김안과병원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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