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산로드] 귀싸대기 맞아도 행복한 진달래 정글

신준범 2023. 5. 19. 07: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진강산과 혈구산, 나들길 2코스와 4코스를 둘러보았다
분홍 팡파르를 터뜨린 혈구산 진달래의 낭만을 즐기는 최서윤·이민정(오른쪽)씨. 정상 일대와 고비고개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이 진달래 군락지다.

국내에 두 곳밖에 없는 고려 왕비의 무덤, 가릉嘉陵으로 갔다. 그녀의 이름은 김연金軟, 800년 전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고려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우崔瑀의 외손녀였다. 어머니는 최우의 장녀였고, 아버지 김약선은 무신정권의 후계자로 점찍은 사위였다.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몬드 수저 부모를 두었으나 김연은 불행했다. 아비는 시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어미는 남자 노비와 그런 관계를 맺었다. 맞바람으로 인한 부부싸움은 파국을 불러왔다. 어머니 최씨는 남편에게 누명을 씌워 실권자 최우에게 고발했다. 최우는 결국 사위 김약선을 죽였다. 그러나 딸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고선, 큰 실의에 빠졌다. 딸과 바람 핀 노비를 죽이고 딸 최씨를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불행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란 김연은 왕자와 결혼했다. 행복한 결혼은 아니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고, 도망치듯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상황이었다. 결혼 다음해에 아들(충렬왕)을 낳고 그 다음해에 딸을 낳은 것으로 보아 원종과의 금실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딸을 낳는 과정에서 숨졌다. 김연의 나이 15세였다.

그녀의 사후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순경태후順敬太后라 불리게 되었다. 원나라 황제 무종이 조서를 내려 '고인의 아름다운 덕을 현창하고자 높은 작위를 내리니 … 중략 … 김연은 행동거지가 현숙하고 신중하며 법도가 온유하고 아름다웠다'고 극찬한바 있다. 그래서일까. 아름다울 '가嘉'자를 써서 가릉이다.

강화도 남부에는 100대 명산으로 꼽히는 마니산이 있고, 북부에는 진달래로 유명한 고려산이 있다. 중부에는 진강산과 혈구산이 알려지지 않은 명산으로 꼽힌다. 강화도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중부편이다. 첫날은 진강산과 서쪽 해안선의 강화 나들길을 걷고, 둘째 날은 혈구산과 동쪽 해안선의 나들길을 걷는 일정이다.

SNS에서 등산의 즐거움을 신선한 사진에 담아 인기를 얻고 있는 이민정(@rachelly_runs), 최서윤(@choifree_)씨가 주인공이다. 등산 경력 3년차와 5년차답게 궂은 날씨에도 익숙하게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신록과 안개가 어우러진 진강산. 기대 없이 오른 산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신이 난 최서윤·이민정(오른쪽)씨.
진강산 가릉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길. 원래 찾는 이가 적은 산인데, 날씨까지 흐려 산이 무척 고요했다. 산행은 몽환적이었고, 휴식과 진배없었다.

봉쇄 수도원 같은 침묵과 정갈함, 리기다소나무 숲이다. 곧게 뻗은 직선의 소나무숲은 걸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진다. 젖은 숲에서 치밀어 오르는 흙냄새, 상쾌한 솔향기, 묵은 잡념이 떨어져나간다. 요절한 왕비를 알현하러 가는 길은 의외로 아늑하다. 연할 '연軟'자를 이름으로 쓰는 왕비의 무덤은 웅장하지 않지만 정갈하다.

가릉을 지나도 산길은 격이 떨어지지 않는다. 야자매트 깔린 푹신한 길과 이정표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우람하진 않지만 완전히 뿌리 내린 리기다소나무, 소음을 먹이로 삼는지 낮은 산의 숲치곤 고요가 깊다. 경적처럼 울리는 딱따구리 소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무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오를수록 미묘하다. 짙어지는 안개 사이로 드문드문 분홍 진달래가 피었다. 구름 속을 떠다니는 진달래 행렬이다. 기대 없이 오른 야산은 의외로 매혹적이다. 앞서가는 이가 희미해지더니 사라진다. 안개 속으로 몸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착각. 걸을수록 질량의 법칙이 사라진다. 계속 옅어져 이기적인 마음 흩어지고, 겸손한 마음이 투명하게 안을 채운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가벼운 무언가가 되는 느낌이다.

예쁜 색깔과 보들보들한 촉감의 이끼가 나무를 뒤덮었다.

진강산에 깃든 벌대총 전설

훤칠한 바윗길이 있는 주능선, 경치는 곰탕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흐린 날씨를 부르는 산꾼들의 속어가 오늘과 맞아떨어진다. 정상에 올라도 경치는 없다. 마니산 전망대라는 별명이 있는 진강산 정상이지만, 오늘은 영업을 쉰다. 산도 사람도 희미하고, 욕심도 희미해져 오늘 하루는 신선이 된 것 같다.

경치가 없어도 잔잔한 볼거리가 있다. 풍채 좋은 아름드리 보리수나무 아래의 쉼터, 성벽 같은 돌담을 쌓은 봉화대 흔적, 벌대총 전설이 있는 바위. 벌대총은 북벌을 추진했던 조선시대 효종이 가장 아끼던 말이었다. 진강산 기슭의 진강목장에서 키우고 있던 말은, 왕의 행차를 마치고 진강목장으로 돌아오다 양천(지금의 서울 양천구) 고을에서 죽었다.

양천 고을 원님은 임금에게 어떻게 고해야 할지 사흘을 고심하다 "벌대총이 누운 지 사흘, 눈 감은 지 사흘이며, 먹지 않은 지 사흘"이라 아뢰었다. 이후 사람들은 어찌 해야 할지 모르고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양천 원님 죽은 말 지키듯 한다'는 말을 써 속담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효종은 "아 벌대총을 타고 청나라를 치려는 나의 뜻을 하늘이 버리시는구나"라고 탄식하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진강산 정상의 바위에 뚫린 구멍이 벌대총의 말발굽 흔적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불처럼 안개를 덮은 능선을 따른다. 3m의 짧은 고정로프 구간이 있으나 대체로 휴식 같은 산길이다. 산 높이가 441m로 낮다 해도 출발 지점이 해수면에서 가까워 고도 400m를 높여야 하는데, 산책하듯 올라온 기분이다. 몽환적인 걸음을 깨우는 건, 농장의 개 짖는 소리다. 농장을 지나며 임도를 만나고, 마을로 내려선다. 나들길을 따라 가릉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건평항에서 외포항으로 이어진 강화 나들길을 걷는 이민정·최서윤(오른쪽)씨. 석모도가 맞은편에 있어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바다를 곁에 두고 걸을 수 있다.

외포리 해안선을 따른다. 석모도 해명산이 육지처럼 시야를 막고 있어, 바다 느낌이 덜하다. 풍경도 평범한 시골이다. 황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회색 바다와 아무도 관심 없는 수더분한 둑방길. 추억이 되지 못해도 괜찮다며 다가오는, 그리 볼 것 없는 시멘트 길에 정이 간다.

나들길은 외포리마을 골목으로 이끌었다. 사람 사는 집과 빈 집이 반반 섞인 좁은 골목에서 잊혀진 고향 냄새가 났다.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다니고, 한쪽에선 구슬치기를 하고, 밤이면 옆집 부부 싸움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오래된 골목이었다. 등 굽은 할머니 같은 돌배나무가 쓰러지기 직전의 기울기로 뻗은 것이, 골목의 관문 역할을 했다. 속이 반쯤 빈 돌배나무가 쓰러지면 마을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뿌리는 아직 강하게 땅을 부여잡고 있었다.

파노라마로 경치가 트인 혈구산 정상. 미세먼지가 없는 날에는 강화도의 산들을 모두 눈으로 가늠할 수 있다.

숙소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혈구산으로 갔다. 강화도는 어제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사라진 쾌청한 날이다. 혈구산穴口山은 과소평가 된 명산으로 마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고, 역사도 깊다. 혈구산의 이름은 고구려 시대 강화도 지명인 혈구군穴口郡과 신라 시대에 만든 성터인 혈구진에서 유래했다. 1,000년 전부터 강화를 '혈구'라고 부른 것은 한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의 섬이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구멍으로 여겨 그리 불렀을 것이라 추측한다.

대표적인 산행 기점인 고비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진달래 제철답게 평일인데도 10여 대의 차량을 세울 수 있는 길가에 빈자리가 한 곳뿐이다. 시작부터 밀당(밀고 당기기) 없이 진달래는 저돌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잎보다 꽃을 먼저 낸 진달래의 극단적인 고집. 큰 나무도 가지가 앙상한데, 먹고 사는 일보다 사랑을 택한 용기가 놀랍다. 늘 맞는 봄은 어김없이 놀랍다.

혈구산 정상에 오른 등산 5년차 최서윤씨와 3년차 이민정씨.

영변의 약산 아닌 혈구산 진달래꽃

산세도 화끈하다. 코가 땅에 닿을 듯한 비탈이 성깔을 부린다. 묵묵히 발로 감내하는 것이 산꾼의 방식, 심장이 크게 두근거린다. 빠르게 피를 유통하고 산소를 실어 나르느라 바쁘다. 그러고 보면 심장은 한 번도 산을 얕본 적이 없다. 300m대로 올라서자 능선이 조금 누그러진다.

위성봉 우회로에 들어섰다가 진달래에 취해 주능선 길을 놓치고 말았다. 지도를 보니 어차피 우회해 선행리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길과 만난다. 잘못 든 길은 아름다웠다. 가려 했던 길이 아니지만 되돌아가기엔 멀리 왔다. 최단 경로가 아닌 탓에 아무도 없이 조용한 산길. 진달래는 정글을 이뤘다. 귀싸대기 맞아도 웃음 짓는 건, 진달래 정글이라서다. 길을 잘못 들길 잘했다.

정상이 다가오자 진달래 정글도 절정으로 치달았다.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짙은 진달래 터널은 아찔할 정도로 감미로웠다. 꽃잎이 머리며 어깨를 붙잡을 때마다 '나를 두고 가시나'라고 묻는 것 같았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은, 강화 혈구산 진달래꽃으로 바꿔 불러도 좋을 성 싶었다.

진달래 터널을 빠져나오자 감당할 수 없이 화끈한 정상이다. 혈구산은 '이것이 정상의 맛!'이라며 시원한 풍경 한잔을 권한다. 숨을 몰아쉬며 정점의 바위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 눈으로 삼키는 경치 원샷. 물만 마셔도 "캬"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진달래 정글이란 말이 어울리는 진달래 터널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최서윤·이민정(오른쪽)씨.
꽃길이란 이런 것. 진달래 명산의 진수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혈구산에 두 사람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병아리처럼 "삐약삐약"하고 재잘거리는 것 같은 반짝이는 신록, 사면을 온통 채운 분홍 물결까지 완벽하다. 능선을 쓰다듬으며 불어오는 바람이 와락 안긴다. 정녕 사람들은 달콤한 촉감의 바람이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서해로 뻗은 산줄기의 음성을 따라 걸었다. 점점 낮아지는 산줄기의 지난겨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퇴미산 정상에서 강화 농업대학 쪽으로 내려섰다. 서울은 이미 벚꽃이 졌는데, 강화는 절정이었다. 농경문화관 주차장에 이르자 아름드리 벚나무 한 그루가 40년간 이어온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꽉 조여 맨 등산화 끈을 느슨하게 고쳐 묶고, 벚나무 곁에 서 있었다. 행복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강화 전쟁박물관에서 광성보로 이어진 강화 나들길에서 만난 절정의 벚꽃길. 바닷바람 탓인지 쌀쌀하여 서울보다 개화시기가 늦었다.

진강산이 작은 편이라 덕정산과 연계 산행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덕정산은 군 사격장이 있어 코스가 억지스럽고 볼거리가 없다. 진강산만 올랐다 내려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인천 가톨릭대 들머리도 좋지만, 가릉 원점회귀가 소소하지만 적지 않은 즐거움이 있다.

가릉에서 이정표를 따라 나들길을 따르다 남릉을 타고 정상으로 이르는 코스다. 가릉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2km. 하산은 서릉을 타고 가다 짧은 고정로프 구간을 지나면 개가 있는 농장을 만난다. 여기서 왼쪽 임도를 따라 가면 나들길 표지기가 나온다. 나들길을 따라 가릉 주차장으로 돌아가면 된다. 5.6km이며 3시간 정도 걸린다.

혈구산은 고려산 사이의 안부인 고비고개가 대표적인 산행 기점이다. 정상에 올랐다가 안양대학이나 강화 농업대학으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차량이 2대라면 미리 하산 지점에 세워두는 것이 좋다. 고비고개 원점회귀를 원할 경우, 퇴모산을 지나면 '고비임도'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고비임도로 내려서면 잘 정비된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고비고개 부근 도로에 닿는다. 고비고개에서 정상을 거쳐 농업대학까지 6km이며 3시간 정도 걸린다.

강화도는 쌀이 유명한데 그만큼 논이 많았다. 모를 심기 전 물을 채운 논이 오후의 햇살에 빛난다.

교통

강화읍 강화버스터미널에서 39번 버스를 타면 고비고개를 거쳐 내가면 내가시장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농업대학에서는 71번 버스를 타면 진강산 가릉이 있는 능내리를 지나 김포를 거쳐 인천까지 간다. 지하철 김포골드라인 구래역과 인천2호선 검단사거리역, 공항철도 검암역을 거친다. 반대로 71번 버스를 타고 진강산 입구와 혈구산 입구에 닿는 방법도 있다.

맛집

강화도 중부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