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경주보다 치열했다” 세계 車산업 흔든 정몽구의 3가지 승부수 [송의달 LIVE]

송의달 에디터 2023. 5. 16. 07: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재계 프리즘]
2016년 8월 정몽구 당시 현대차그룹 회장이 슬로바키아 질리나에 있는 기아차 공장에서 신형 스포티지 조립 과정을 점검하고 있다. 2016년 78세였던 그는 석 달 동안 지구 한 바퀴에 해당하는 장거리 해외 출장을 소화했다./현대차그룹

1938년 3월 강원 통천군에서 태어난 정몽구(鄭夢九) 명예회장(이하 정몽구로 약칭)이 현대기아차그룹 대표이사 회장이 돼 실권(實權)을 잡은 것은 1999년 3월로 61세때였습니다. 40~50대 초중반 회장 취임이 통례인 글로벌 완성차 회사들에 견줘보면 ‘늦깎이’였습니다.

그는 그러나 IMF 외환위기 직후 적자에 허덕이던 현대차를 1년 만에 4000억원대 흑자 회사로 바꾸었습니다. 1998년 9만여대이던 현대차의 미국 판매량은 2003년 40만대가 됐습니다. 1998년 말 인수한 기아차는 이듬해 자본잠식에서 벗어나 1357억원 순이익을 냈습니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현대차그룹 본사 모습/현대차

현대차그룹은 2010년엔 미국 포드를 제치고 글로벌 판매량 기준 세계 5위 기업으로 도약했습니다. 11년 전에 아무도 예상 못한 약진(躍進)이었습니다. 경복고와 한양대 공업경영학과 졸업후 미국 코네티컷대에서 유학한 그에게 무슨 마법(魔法)이 있었던 걸까요? ‘지옥의 자동차 경주보다 더 치열하다’는 세계 자동차 업계를 뒤흔든 ‘MK(정몽구의 영어 첫 글자) 기적(奇蹟)’에는 세 가지 승부수(勝負手)가 있습니다.

◇①'기본’에 철저...자나깨나 현장·품질

첫 번째는 ‘현장’과 ‘품질’이란 기본에 철저함입니다. 1970년 첫 직장인 현대자동차 서울사무소 부품과장 시절, 차량부품 국산화율은 10%를 밑돌았습니다. 외제와 가짜, 순정부품으로 비리(非理) 복마전이던 현장에서 문제를 고치고 재발을 막는 게 최고 과제였습니다.

전국을 돌며 고객 불만을 듣고 부품을 실은 트럭을 몰고 직원들과 순회서비스를 한 그는 “일과후 서울 원효로 3가 정비공장 앞 슈퍼에서 직원들과 소주를 마시고 공장 구석에 드럼통을 놓고 삼겹살을 구워먹다가 인근 친구 아파트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때부터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해결한 뒤 확인까지 한다’는 ‘삼현주의(三現主義)’는 불변(不變)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습니다.

정몽구 당시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2004년 1월 5일 경기도 광명에 있는 기아차 소하리 공장을 방문해 생산직 근로자와 소통하고 있다./현대차

기아차를 빠르게 정상화시킨 비밀 병기(兵器)도 ‘현장 경영’이었습니다. 그는 기아차 인수후 첫 석달 동안 매주 2~3차례 화성·소하리·광주 공장을 번갈아 찾아 엔진공장·주물공장·보일러 배관실 등 구석구석을 챙겼습니다. 품질관리 회의 때에는 15여개 부품을 올려놓고 원인·책임소재를 가리며 개선사항을 지시·확인했습니다.

부품 내역과 유통망에 누구보다 밝은 그의 밀착 노력은 1년 만에 원가 절감과 흑자 전환으로 이어졌습니다. 착공 3년 6개월만인 2010년 4월 완공한 충남 당진(唐津) 현대제철소 건설 당시, 그는 2009년 한 해에만 64차례 현장을 찾았습니다. 한 전직 고위 임원의 증언입니다.

“명예회장께서 양재동 본사에서 토요일 임원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제철소 현장을 둘러보고 싶다’며 헬기를 타고 온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비가 쏟아져도 공사장 곳곳을 누비며 점검 또 점검했다. 기획실에서 준비한 방문 코스는 무시하고 스스로 현장을 돌며 문제점을 찾아냈다.”

72세이던 2010년에는 1월 인도 첸나이 공장을 시작으로 기아차 미국 조지아 공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건설 현장, 기아차 중국 공장, 현대차 베이징 3공장 등으로 매월 한 차례 해외 출장을 갔습니다. 미국 출장은 보통 3박5일의 강행군이었습니다. 오너의 ‘정밀 실사(實査)’는 현장에서 일사불란(一絲不亂)과 공기 단축, 사고(事故) 감소라는 ‘3중(重) 효과’를 냈습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2011년 미국 앨라배마주에 있는 현대차 현지 공장을 찾아 현지 직원을 격려하고 있다./조선일보DB

◇취임 11년 만에 세계 자동차 5강 진입

그는 “품질은 우리의 자존심”이라며 ‘품질 경영’에 진력(盡力)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현대차는 싸구려차”라며 미국에서 조롱당한 치욕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집요했습니다. 당시 세계 업계에서 현대차는 수면 위로 올라가면 자신보다 크고 강하고 빠른 물고기들에게 잡혀 먹힐까 봐 바다나 호수 밑바닥에서 일생을 보내는 물고기인 ‘바텀 피더(Bottom Feeder)’로 불렸습니다.

과장급 이상 모든 직원에게 품질 이상(異常)시 무한책임을 진다는 ‘품질 각서’를 받은 정몽구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회사의 품질 분야 인력을 8배 늘렸습니다. 2003년 5월엔 경기도 남양에 세계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웠고 양재동 본사 사옥 1층에는 연중무휴 24시간 ‘품질상황실’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남양 현대차그룹 연구개발센터 안에 있는 디자인센터 모습/조선일보DB

국내외의 모든 하자(瑕疵) 등을 접수·처리하는 품질상황실은 지금도 매일 새벽 품질정보보고서(QIR)를 작성해 해당 임직원들과 실시간 공유하는 품질 경영의 총괄 본부입니다.

2003년 8월, 기아차의 ‘오피러스’ 미국 수출을 앞두고 모기소리 만한 소음(騷音)을 잡아낸 정몽구는 노기(怒氣) 띤 음성으로 “이렇게는 못팔아”라고 외쳤습니다. 차 수출은 40일 넘게 미뤄졌습니다.

이렇게 애쓴 결과 ‘JD파워’의 미국 신차품질지수(IQS) 순위에서 2001년 32위이던 현대차는 2006년 3위로 상승했습니다. 2011년 7월 ‘JD파워’의 ‘2011 상품만족도’ 조사에서 현대차 ‘에쿠스’는 234개 대상 차종 중 벤츠·BMW·렉서스 등을 누르고 1위에 올랐습니다.

“품질에서만큼은 목표에 끝이 없다. 나는 싸구려 차는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다”(2004년 6월 월례조회)는 ‘집념과 뚝심’의 정몽구가 이룩한 위업(偉業)입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2021년 7월 22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린 '2020·2021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헌액(獻額)됐다. '2020·2021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가운데)이 정몽구 명예회장 헌액 기념패를 들고 램지 허미즈 자동차 명예의 전당 의장(왼쪽), K.C.크래인 자동차 명예의 전당 부의장(오토모티브 뉴스 발행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현대차-연합뉴스
미국 시장조사 기업 'JD파워'의 ‘2023년 내구품질조사(VDS)’에서 기아(KIA)는 일반 브랜드 중 최상위(152점)에 올랐고, 제네시스(Genesis)는 고급 브랜드 중 2위(144점)를 차지했다. 현대차그룹(160점)은 글로벌 16개 자동차그룹 가운데 도요타그룹(163점)과 GM(165점)을 제치고 160점으로 1위로 평가됐다. VDS는 차량 구입 후 3년이 지난 소비자를 대상으로 184개 항목의 내구 품질 만족도를 조사한다. 100대당 불만 건수를 수치화해 발표하는데, 점수가 낮을수록 품질 만족도가 높다는 뜻이다./JD파워

◇②아버지 ‘정주영’...배우며 뛰어넘기

두 번째 승부수는 ‘아버지 넘어서기’입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8남1녀 자녀 중 둘째인 정몽구는 1982년 형의 사고사(事故死)로 장남이 됐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시야(視野) 확대와 경영 능력 극대화를 끊임없이 자극한 기준이자 넘어서야 할 산(山)이었습니다.

수수한 외모와 성격, 솥뚜껑만한 손바닥, 불도저 같은 추진력, 두둑한 배포 등을 가장 많이 닮은 MK는 아버지처럼 스스로 맨 땅에서 자기 힘으로 ‘경제 영토’를 확장해야 했습니다. 어머니 변중석 여사가 현대차 서울사무소장을 찾아가 첫 직장을 구해줄 만큼, 아버지는 무관심했습니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가족이 부산시 범일동에서 찍은 사진. (왼쪽 아래 그림 속 번호 참조)20번이 정주영 창업주이고, 19번이 30일 별세한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다. 3. 정주영 창업주의 모친 한성실 여사 4.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5.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 7.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8.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9.정주영 창업주의 부인 변중석 여사 10.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14.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15.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 17.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18.정신영 동아일보 기자 21.정몽필 인천제철 사장/현대차그룹

이는 국내 명문대나 미국 대학 MBA를 마치고 임원으로 계열사에 들어간 형·동생은 물론 36세에 동양방송(TBC) 이사가 돼 경영 수업을 받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도 대비됩니다. <정주영 집념의 승부사·정몽구 결단의 승부사>의 저자인 박상하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몽구는 아버지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더 깊은 생각을 하자고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라면 껌벅 죽는 시늉도 했다. 절대적으로 효도하고, 충성하고, 말조심하고, 순명(順命)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에 동행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구본무 LG 회장(왼쪽부터)이 2004년 9월 20일 모스크바 메트로폴호텔에서 노 대통령과의 다과회에 앞서 담소하고 있다./조선일보DB

‘지도에 없는 길’에 나선 정몽구는 ‘찬밥 대우’에 좌절은커녕 우직(愚直)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현대차 부품과장 시절 판매망 구축차 부품을 실은 트럭을 몰고 전국 순회 판매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을 뻔도 했습니다. 현대차써비스 사장이 된 뒤에는 판매 2부를 개발부로 확대개편하고 별도 프로젝트팀을 만들어 부품 국산화에 힘썼습니다.

◇‘지도없는 길’...自力으로 경제 영토 개척

첫해부터 흑자를 내고 매년 매출을 두 배씩 늘린 그는 1977년 현대정공 초대 사장에 임명됐습니다. MK는 단기간에 이 회사의 컨테이너 사업 부문을 세계 시장점유율 1위(40%)로 올려놓았습니다. 이는 ‘세계 1등’이 전무(全無)했던 한국 재계에 충격이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89년 SUV(스포츠유틸리티차) 사업 진출을 선언했고, 1991년 9월 출시한 ‘갤로퍼’와 연이어 나온 국내 최초 미니밴 ‘싼타모’로 국내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1999년 3월 이전까지 그는 현대차서비스·현대정공·현대산업개발·인천제철·현대우주항공·현대할부금융·기아차 등 2군(群) 기업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견인불발(堅忍不拔·굳세게 참고 견디어 마음을 뺐기지 않음)의 자세로 새 신기록을 썼습니다. 1974년부터 25년간 아버지가 준 과제를 완수한 MK는 산전수전(山戰水戰) 겪은 노련한 최고경영자(CEO)로 거듭 났습니다.

1999년 3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을 찾은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수행한 정몽구 당시 회장/현대차

이 과정에서 정몽구는 아버지에게 변함없는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현대차의 전·현직 임원들은 “정주영 창업주가 그룹 총수 자리에서 퇴임하고 자리를 물려받기 전까지 명예회장은 한 번도 그룹 본사 건물 정문으로 출근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998년 4월(음력생일) 환갑 때는 별도 행사 없이 간단한 가족 식사로 마무리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건재하신데 잔치는 민망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1980년 중반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산삼(山蔘)을 구해 아버지 밥상에 올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점퍼와 작업복을 즐겨 입고, 똑같은 넥타이를 매며 멋낼 줄 모르고, 일 외에는 취미도 없는 그는 둘도 없는 ‘정주영 판박이’였습니다. MK는 그러나 두 방면에선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대북(對北) 사업을 포함한 정치와의 인연을 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09년 부인과 사별(死別)후 비서관·수행원·자택관리 직원은 물론 가사(家事) 도우미까지 모두 남성으로 교체한 이른바 ‘몽구 룰(rule)’의 실행입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왼쪽)와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조선일보DB

◇③'돌관 정신’...안 되면 되게 하라

“좀 더 잘할 수 없나?” “좀 더 잘 만들 수 없나”. 정몽구는 이렇게 부단한 도전과 담금질을 주문했습니다. ‘안 되면 반드시 되게 하라’는 ‘돌관(突貫) 정신’이 그의 세 번째 승부수였습니다. 현안이나 중요사항이 있으면 새벽 3시부터 출근해 궁리하고 새벽 4~5시에 부회장이나 사장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은 한 부분입니다.

기아차의 카니발 차량을 자택으로 가져가 밤낮으로 고민해 문제점을 찾아낸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분필로 슬라이딩 도어 위쪽 창문부터 시트 밑, 바닥, 천장, 문틈 등에 동그라미를 치고 즉각 고칠 것을 임직원들에 지시했습니다.

그는 자동차 수출 대상 지역에 연구소 직원들을 보내 날씨와 도로 사정, 운전 문화까지 공부토록 하는 치밀한 경영자였습니다. 세계 완성차 기업 CEO 중 가장 부지런하게 매일 오전 6시30분 출근하는 ‘새벽 경영’을 지휘하며 독창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1998년 12월 미국에서 내놓은 ‘판매후 10년 또는 주행거리 10만(약 16만km) 마일 범위내 무상(無償) 수리’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미국 업계 평균이 ‘2년·2만4000마일’인 상황에서 이 아이디어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절박한 마음’에서 내린 이 결단으로 1% 미만이던 현대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2002년 2.2%로 올랐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MK는 소비자가 차를 구입한 후 1년 이내 직장을 잃으면 회사가 차를 되사주는 어슈어런스(assurance) 프로그램’을 내놨습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자동차 전문지인 'Motor Trend'의 2007년 7월호의 표지. 현대차의 고급 SUV 모델인 베라크루즈(Veracruz)가 렉서스의 고급 SUV 모델인 RX350를 능가해 종합평가 1위를 차지했다는 비교 시승기를 실었다./인터넷 캡처

“현대차가 유동성(현금흐름) 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경고와 달리, 2011년 3월 종료된 이 프로그램에 신청한 소비자는 350여명에 그쳤습니다. 이미지 개선과 홍보 효과를 누린 현대차는 2010년 미국 시장에서 ‘마(魔)의 50만대 판매 벽’을 처음 깼습니다.

그의 용단(勇斷)은 지금 세계적인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사례 연구 대상입니다. 그룹 안팎의 우려를 이겨내고 인도·중국·미국·터키·러시아·브라질 현지 공장도 지었습니다. 이는 제국(帝國) 경영 경험이 없는 대한민국과 한국 산업계 사상 초유의 ‘글로벌 경영’입니다. 동시에 “기필코 세계 5강이 되겠다”는 ‘돌관 정신’ 없이는 꿈도 못 꿀 역사(役事)였습니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차는 1989년 6월 캐나다 퀘백주 브로몽(Bromont)에 공장을 지었다가 큰 손실을 입고 1994년 철수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미국 앨라배마주 현대차 공장과 조지아주 기아차 공장 건설 계획에 대해 그룹 안에서 ‘무모한 도박’이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정 명예회장의 판단이 옳았다.”

정몽구 당시 현대차그룹회장이 2016년 4월 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일가(一家) 결혼식에 참석해 정의선 부회장과 얘기하며 걷고 있다./뉴스1

◇배포·치밀함·용인술의 3박자 경영

여기서 그의 기발한 용인술(用人術)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룹에 2인자를 두지 않았고, ‘실세(實勢)’라 불린 인사들은 예상보다 일찍 회사를 떠나게 하거나 한직(閑職)으로 보냈습니다. 대신 다른 그룹보다 훨씬 많은 10여명의 부회장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MK는 임명 수 개월만에 계열사 사장을 바꾸거나 업무 보고중 프로젝터 전등이 꺼지거나 공장에서 자동차 보닛을 열지 못한 임원을 현장에서 해임했습니다. 수 년 전 퇴임한 CEO와 고위 임원을 갑자기 재고용하는 깜짝 인사도 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사장의 말입니다.

“명예회장은 100명이 넘는 현대·기아차 고위 임원의 프로필을 거의 외우고 계셨다. 임원 인사 파일을 집무실과 자택에 한 부씩 두고 계속 업데이트했다. 기분 내키는대로가 아니라 항상 복잡한 계산을 거쳐 나온 인사였다. 소위 ‘럭비공 인사’에는 퇴임자 대우를 높여주려는 명예회장의 각별한 배려도 있었다. ‘삼국지’를 애독한 명예회장은 총애하던 장수 마속(馬謖)의 목을 벤 제갈량처럼 신상필벌(信賞必罰) 인사의 달인(達人)이었다.”

현대차는 직원 평균 연봉이 1억원을 웃돌아 매년 신입사원 선호도 최상위권에 속합니다. MK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군주(君主)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군주가 낫다”는 니꼴로 마키아벨리의 경구(警句)를 실천한 셈입니다.

빌 게이츠(왼쪽)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니꼴로 마키아벨리

그는 인수합병(M&A), 대규모 공장 건설, 인사, 신차 개발 같은 중대 결정을 내릴 때는 주말에 경기도 광주의 퇴촌 별장에 들어가 혼자서 몇시간이고 산책하며 구상했습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여름휴가 때 호숫가 별장에 들어가 외부와 단절하고 ‘생각하는 주간(Think Week)’을 갖는 것과 비슷합니다. 위기 때마다 글로벌 위상이 격상되는 현대차그룹은 정몽구의 숙고(熟考)를 통한 ‘창조적 돌관’의 승리입니다.

◇현대家 ‘적통’ 회복...자녀 경영도 성공

1999년 3월 회장에 취임한 MK는 2020년 10월 명예회장으로 물러날 때까지 21년 동안 전력질주(全力 疾走)했습니다. 2000년 9월 계열분리 당시 10개 계열사에 자산 34조원을 갖고 있던 그룹은 20년 만에 53개 계열사, 자산 246조원으로 팽창했습니다. 한보철강 인수(2004년), 현대제철 출범·일관제철소 준공(2010년), 현대건설 인수(2011년)로 자동차-철강-건설의 삼각 편대를 완성하고 현대가(家)의 장자 적통(長子嫡統)까지 되찾았습니다.

작업복 점퍼 차림을 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2010년 4월 8일 충남 당진에서 열린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준공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조선일보DB

이 과정에서 그는 1978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혐의로 옥살이하고 2006년 4월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61일간 수감됐으나, 이는 업적에 비하면 ‘옥(玉)의 티’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전문가들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를 평가합니다. 먼저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자동차 5강 가운데 유일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소속 기업입니다.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의 분석입니다.

“1880년 중반에 태동한 세계 자동차 산업은 미국·유럽 등의 과점(寡占) 체제로 1990년대 후반엔 콘크리트처럼 성숙한 시장이었다. 이들보다 100년 늦게 뛰어든 현대차그룹이 세계 5강(强)에 든 것은 뚝심과 지혜를 겸비한 MK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그는 외동아들 정의선(鄭義宣) 회장에 대한 ‘자녀 경영’에서도 성공했다.”

사진 왼쪽은 2005년 5월 미국 '타임'(TIME)지의 현대차 특집 커버스토리에 소개된 정몽구 회장, 오른쪽은 2010년 1월 18일자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지 특집기사에 등장한 정 회장.

◇“현대차 ‘세계 3위 웅비’하는 기반 다져”

그는 기아차·한보철강 같은 부실(不實) 기업 정상화와 세계 15위권의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로 한국 경제에도 기여했습니다. 현대제철은 17만명 넘는 고용창출과 매년 1000만톤의 철강 수입 대체로 100억달러 이상의 외화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이렇게 진단합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거의 거덜 난 현대기아차를 맡아 2022년에 글로벌 판매량 기준 세계 3위로 웅비하는 초석을 닦았다. 미국 GM도 순식간에 무너지는 마당에 현대차그룹의 기반과 기초 체력을 확고하게 다진 그의 공(功)은 형언(形言)하기 힘들다.”

현대차그룹은 2022년 판매량 기준으로 글로벌 완성차 기업 가운데 3위에 올랐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MK의 카리스마 경영은 ‘나를 따르면 절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한다’는 불굴의 자신감과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의 일부 어눌(語訥)함은 매순간 그가 말 보다 행동과 실행을 앞세운 결과”라고 했습니다.

정몽구는 2007년 그룹 사내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의 한 단면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江)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스스로 꽃과 강이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재계의 대표 기업인으로서 현대차 그룹과 한국 산업계의 새 역사를 써 온 거인(巨人)이다./조선일보DB

‘2026년 현대차그룹의 세계 1위 등극 가능성’이 거론되는 지금에도 유효한 탁견(卓見)일 것입니다. MK는 한국 기업가 정신의 표상(表象)을 넘어 세계 자동차 업계의 거인(巨人)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가장 저평가(低評價)된 최고경영자이기도 합니다.

올해 85세로 자택에 칩거 중인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MK 기적’을 디딤돌삼아 현대차그룹과 한국인이 더 힘차고 굳세게 전진하기를 염원(念願)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송의달의 모닝라이브 뉴스레터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2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경영 주요 연혁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은 2010년 1월 18일자에서 현대차그룹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인터넷 캡처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