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숨은 명산 통영 망산] 꽃길 따라 흘러간 한산도...충무공의 전적지

김재준 '한국유산기' 작가 2023. 5. 16.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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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망산
길에 떨어진 동백꽃.

갈매기는 배를 따라오며 던져주는 과자를 어김없이 받아먹는다. 바다에서도 인간에게 길들어져 가축화되지 않을까 염려되지만, 우려이길 바랄 뿐이다. 오른쪽 미륵산 지나 호수 같은 한려수도 20분 남짓 배를 타고 아침 7시 40분 한산도 제승당 여객선 선착장에 닿는다. 황사에 물안개까지 시야는 좋지 않지만 벚꽃이 환한 섬에는 나직한 파도 소리 사르르 사르르 귀를 간질인다.

망산(293.5m)은 경남 통영시 한산도 남쪽에 있다. 일반적인 산행은 제승당 선착장에서 내려 덮을개, 망산교, 망산, 한산면 소재지 진두마을까지 약 7.2km, 3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산길을 걸으면서 한려수도의 잔잔한 바다와 올망졸망 아름다운 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까지 둘러볼 수 있다.

한산 앞바다.

'덮을개' 봄날의 낙화

화사한 벚꽃 아래 통통거리는 뱃소리, 왼쪽으로 거북등대, 산 위에 한산도 대첩비, 그 너머 미륵산, 싱그러운 아침 비파·유자나무 두고 되돌아선다. '덮을개' 마을 이름 생각하다 자동차 캠프장을 그냥 지나친 것. 한자 '덮을 개蓋', 같은 한자를 쓰는 고구려 장수가 퍼뜩 생각난다. '덮는다. 덮어씌운다' 는 뜻. 연개소문淵蓋蘇文도 태종 이세민을 쳐 당나라를 덮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에 패한 왜군 잔당들이 도망치기 위해 갯마을을 다 덮었다 하여 '덮을개·더풀개·개포'로 불린다.

오전 8시 반 덮을개 등산로 입구(망산 4.7·진두 7.2·야소 7.5km), 산길에 선 나무들은 어젯밤 비에 아직 빗물을 다 털지 못했고 나그네 발걸음 듣는지 지저귀던 파랑새 소리도 조용해졌다. 동백꽃은 떼거리로 떨어졌는데 꽃물이 흘러내려 길 위에 흥건하다. 한 자리에서 모두 한 죽음, 처참한 꽃의 주검이다.

긴 나무계단 오르니 능선길은 평평해서 걷기 좋다. 곰솔·편백·동백·광나무와 사스레피나무. 띄엄띄엄 굴참·신갈·사방오리·노간주나무가 보인다, 편백 숲은 어둡고 흑림黑林 같은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갑자기 검은 숲이 환해졌다. 요정이 불 밝힌 듯 산벚나무꽃 활짝 폈다.

전망대(제승당 1.1·진두 6.1·망산 3.6km) 왼쪽으로 잠시 한려수도를 바라보다 땀 흘리며 오른다. 통영의 새벽 배를 타느라 흐리고 추운 바다 날씨에 외투를 껴입었는데 이제 몸이 좀 데워진 것 같다. 물을 머금은 곰솔 껍질에 이끼가 파랗고 마삭줄도 엉켜 붙어산다. 공생관계인지 일방적 기생인지?

덮을개 등산로 입구

오전 9시 삼거리 대촌 갈림길(소고포 1.2·망산 2.4·제승당 2.3km)에서 오른쪽으로 내리 걷는다. 한적한 산길에 싱그러운 새소리, 뱃고동 소리, 바람인 듯 숨비소리, 도란도란 섬들끼리 소곤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만 힘에 부친 일행의 숨소리만 가쁘다.

산길마다 여린 꽃잎이 무더기로 떨어졌는데 이 섬의 꽃들은 저마다 한 자리에서 떼죽음이다. 빨간 동백꽃이 그러하고 하얀 산벚나무꽃, 우윳빛 사스레피나무꽃, 만발한 연분홍 진달래꽃까지 아주 작심한 듯 낙화 방식이 특이하다. 떨어지는 꽃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 생각이지만 꽃의 입장에서는 소멸의 최후다. 화려한 인연은 꽃처럼 쉽게 헤어진다더니 봄은 결별의 시작,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발을 딛기 조심스럽다.

봄날의 애상을 뒤로한 채 바쁘게 걸음 옮기는데 소나무재선충이 침입한 건지 군데군데 소나무 무덤이 만들어졌다. 주변은 제당 같은 석축 잔해, 후박·뽕나무 고목, 한 아름 반이나 되는 노송, 돌무더기, 폐허 분위기인데 마삭줄은 나무 위에서 원시림의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왼쪽으로 다도해, 까마귀 소리, 발동선 뱃소리가 들려온다.

고즈넉한 숲길.

한려수도, 견내량과 한산대첩

오전 9시 15분, 등산객 두 사람 만나 반갑다. 인사 대신 "아저씨 처지시네요" 한다. 호기심과 사진 찍느라 일행은 저만치 앞서가니 그럴 수밖에. 5분 정도 걸어서 망산교(망산1.2·제승당3.5·진두3.7km)에 닿는다. 다리 아래 두억리와 창좌마을로 자동차가 다니고 앞에 산꼭대기는 망산 정상, 왼편으로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국립공원 팻말이 선명하다. 한려수도閑麗水道는 글자대로 한산도에서 여수에 이르는 300리 뱃길, 196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이 되었다.

한산도는 통영에서 남동쪽 뱃길로 2㎞ 정도 거리, 한산대첩으로 유명하다. 원래 거제현이었는데 한티·한실·한밭·한강 등 '한'은 크다는 우리말의 음차. 큰 섬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긴다. 1970년대를 거쳤던 한국인 가운데 한산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담배 이름까지 한산도가 있었으니, 당시에는 애국심 고취에 모든 수단이 동원됐고 일사불란했다. 거북등대와 한산대첩기념비가 세워진 것도 그 시절이었다.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 앞바다.

나무다리를 건너 그늘에 쉬고 싶지만, 연락선 시간 때문에 바로 숲길을 걸어 오른다. 군데군데 족도리풀 흑자색 꽃이 폈고, 온 산의 연둣빛 새순들은 배냇저고리처럼 여린 표정이다. 이따금 바람에 실려 오는 갯내와 솔향기가 상쾌함을 더한다.

25분가량 가파른 오르막 산길,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전 10시쯤 망산 정상(293.5m, 야소 2.8·제승당 4.7·진두 2.5km)에 올라선다. 탁 트인 바다, 가슴이 시원하다. 한눈에 보이는 경치 끝없이 아득하니 일망무제一望無際 아닌가? 동백섬·소매물도·사량도·욕지도 등 점점이 떠 있는 섬마다 예사롭지 않다. 뒤돌아 둘러보면 미륵산·거류산·계룡산·노자산·가라산이 도열해 있다. 옆에는 곰솔 몇몇이 먼바다 바람에 지친 듯 맥없이 서 있다. 망산은 이곳 말고도 경주·광주·청주 등 각지에 있지만 특히 남해안에 많다. 거제·여수·남해·사천·사량도에도 망산이 있는데, 망望은 바라보며 '망을 본다監視'는 의미가 있으니 왜구를 감시하며 밤낮없이 저 소나무들처럼 시달렸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거제도 백성들을 거창으로 이주시켜 제창군濟昌郡이라 했겠는가?

망산교, 꼭대기 정상.

정상 표석 너머 멀리 보이는 바다는 흐릿하다. 통영과 거제를 잇는 거제대교 아래 물살이 빠른 해협, 견내량見乃梁이다. '다 보인다(건넌 모습이). 대들보 건넌다'는 뜻이 있다. 한산도의 풍광보다 저 바다 위에서 일본 수군을 궤멸시킨 충무공 생각하니 가슴 벅참을 느낀다. 1592년 7월 견내량의 왜선 70여 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으로 무찌른 것이 한산대첩이다. 살라미스·칼레·트라팔가르 전투와 세계 4대 해전으로 불린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넬슨보다 이순신을 더 높이 평가했다. 장군은 공직자로서 멸사봉공을 실천하며 신상필벌을 엄격히 했고 전쟁터에서도 난중일기를 썼다. 백성을 아끼며 휴머니스트의 면모까지 보여 주었다. 멸사봉공 우국충정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섬마을 이름과 제승당

반대편 야소마을 가는 길 두고 진두마을로 내려간다. 오전 10시경 콘크리트 정자를 만나고 바로 아래 신갈·곰솔·보리수·소사나무. 멀리 한려수도에 안개가 많이 덮였다. '진두津頭',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해상경비하던 곳. 이 섬의 지명은 대개 임진왜란과 연관된다. 덮을개 입구의 '고동산'은 소라고동을 불어 신호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 왜적들 머리가 칼에 맞아 억수로, 억 개가 떨어져 '두억개頭億浦'. 잔잔한 바다에 피를 뿌린 전장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한 자리에서 떼거리로 떨어진 산길의 꽃들과 무관치 않으리라. 15분 더 내려가 바위 전망대에 서니 바람 차고 꼭대기보다 더 부옇다. "안개 많이 덮였으니 이 또한 덮을개다." 바로 밑에 정자(망산1.5·진두1km) 근처 군데군데 춘란이 자라고 가막살나무 새순이 여리다. 거제도 가라산, 노자산, 망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발아래 추봉도 바라보며 진두마을 학교 다 내려오니 오전 10시 40분 한산면 소재지, 안개 걷히고 해가 나왔다. 갯내가 코끝을 실룩거리게 한다.

망산 정상.

버스를 기다리다 만난 추봉도 어르신은 땅값이 육지보다 비싸다고 일러준다. "왜구들이 출몰하면 값이 내려갈 것 아닙니까?" 한참 웃는다. 연락선, 주민, 매표소 직원까지 섬사람들은 한결같이 친절하다.

오전 11시 버스를 타고 제승당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15분쯤 걸렸다. 아왜·은목서·동백·진달래·사스레피나무 길 따라 제승당制勝堂에 닿는다. 제승당은 1593년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을 이 자리로 옮겨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를 맡던 곳이다. 수루戍樓에서 바라보니 한산대첩비·거북등대·견내량·고동산이 한눈에 보이고 바다의 적을 살필 수 있는 요새다. 누각에 걸린 편액을 바라보니 풍전등화 같던 나라를 생각하며 수루에 앉아 괴로워하던 장군의 고뇌가 느껴지는 듯하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는 차츰 뱃전에서 멀어지는 듯싶더니 이내 다른 섬들이 갈매기와 같이 따라온다.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배는 하얀 물살을 일으키고 멀리 거제대교 견내량 바다는 흐리다. 430년 전 이 무렵의 봄날 해전을 치렀던 곳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행길잡이

제승당 선착장 ~ 덮을개 ~ 삼거리(대촌 갈림길) ~ 망산교 ~ 망산 정상 ~ 진두 ~ 버스 타고 다시 선착장 ~ 제승당 ~ 선착장

※ 등산 후 제승당까지 전체 10km 정도, 쉬엄쉬엄 4시간.

교통(고속도로)

대전통영고속도로(통영 IC)

※ 내비게이션 → 통영항 여객선터미널(경남 통영시 통영해안로 234)

* 한산도 제승당까지 운행하는 여객선 이용, 제승당 선착장에 섬 일주 버스 대기

(자동차는 배에 싣지 말고 통영항 여객선터미널에 두고 가는 편이 낫다).

숙식

통영 시내에 호텔, 여관, 여러 가지 식당도 많다. 한산도에는 펜션, 민박 가능(예약 필수).

주변 볼거리

충렬사, 해저터널, 통영전통공예관, 세병관, 벅수, 동피랑길, 중앙전통시장, 달아공원, 미륵산 케이블카 등.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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