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우리집
서울시교육청 어린이 도서관에서 6회차로 진행한 가족 예술 수업이 끝났다. 토요일 오전 수업인데 봄비가 후둑후둑 내린 날도 빠짐없이 여러 가족이 함께 했다. 왜 그리 궂은 날도 그림 몇 점 보자고 기어이 수업에 왔을까. 왜 엄마도 아빠도 열심히 글을 쓰고 발표했을까. 우리에겐 어떤 매개가 필요했던거다. 좋은 계기가 필요했던거고. 그 역할을 예술이 해준 것이고 우린 한 번도 해본적 없는 새로운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이 소감을 말했는데 다들 너무 재밌었다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신기하고 좋았어요.” “그림을 보며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훌쩍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렇게 가족이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한다면, 기쁨도 슬픔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안다면, 우리는 더 푸르고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지 않을까. 가족의 얼굴은 오월보다 빛나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파주 출판 도시 갤러리 지지향으로 향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열리고 있는 신일아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갔다. 캐나다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인데 집을 테마로 한 이국의 풍경이 마치 그림책 속의 그것처럼 사랑스러웠다. 낯선 타국의 설경과 비현실적인 지붕들을 스쳐 걸었다. 집의 포근함을 극대화시킨 따뜻한 상징들이 즐비했는데, 일상과 인지부조화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 그림 앞, 가만히 멈췄다. 집 위에 집, 그 집 위에 또 집, 실제 나무 판넬을 활용한 작품은 구체적인 물성을 보여주나 세상엔 없는 집이다. 어쩌면 외연이 아니라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각기 다른 집을 쌓아놓은 형태이나 하나의 가정같고 또 내면의 마음같다. 가족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집이지만 서로 다른 존재의 집에 살고 있는 우리들. 마음도 다르고 생각도 제각각이나 서로의 존재를 이고 지고 사는 숙명. 집들엔 창이 많다. 누군가의 창은 환하게 들여다보이고, 누군가의 창은 반만 열려있고, 또 누군가의 창은 누가 볼쎄라 커튼으로 꼭꼭 막아뒀다. 그래, 살다보면 저럴 때 있지.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니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그제서야 제목을 보니 심장의 공간. 아!
예쁘게만 그린 것이 아니구나. 비현실적 풍경을 어여쁘게 그린 게 아니라 악착같이 긍정한 게 아닐까 불현듯. 타국에서의 삶이 어찌 동화같겠나. 힘듦, 설움, 외로움, 그럼에도 나의 삶을 사랑하겠다는 의지, 일상을 긍정하겠다는 실천이 이 그림들이 아닐까 불현듯.
지금 나는 어떤 집, 어느 창문 앞일까 골똘히 응시했다. 불을 환하게 켜두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할까, 창을 반쯤 열어 오월의 청바람속 낮잠도 좋겠다, 아님 커튼을 치고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고 제발 날 좀 내버려두라고, 그러다 빼꼼 커튼을 열고 안녕 우리 같이 놀래.
기억은 쉽게 미화되거나 왜곡된다고 생각했는데, 선택이고 의지란 생각이 든다. 좋은 것이든 힘든 것이든 남기고 싶은 것을 남기는 것. 행불행은 기본값이지만 나의 선택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어느 통계에서 50살이 지나면 행복지수가 올라간다고 했다. 살만해지고 여유가 생기고 막 즐거워서가 아니라, 사는 게 내 뜻대로 안되고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깨달아 조금 유연해지는 때가 아닌가 한다. 그림 한 점 앞에서도 심장의 공간을 열어 집에 대한 기억을 있는 그대로 껴안게 하는. 저마다의 이유는 있지만 그래도 애쓰고 사는 우리를 어루만지는. 서로의 존재를 켜켜이 쌓아올려 등대처럼 불을 밝힌 지금 이 집처럼.
신일아 작가는 전시에 맞춰 그림 에세이를 출간했다. 출판사 ‘틈새의 시간’에서 나온 ‘긴 여행이었죠? 이제 여기가 당신의 집이예요.’ 긴 제목을 보자마자 마음에 온기가 훅 스민다. 위로의 손길이 쑥 나온다. 작가가 하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가 이 한줄에 담겼다. 직접 만나본 작가는 삶의 모든 맛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편안했다. 북토크에 참여한 오래된 친구들의 연대가 작가의 성품을 짐작케했다. 책 속에는 그림과 글이 가득했는데, 미소가 가만한 그녀의 삶이 펼쳐져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에 없이 따스한 맘이 번진다. 나도 긴 여행같은 삶이었나. 가자, 대체로 편하고 때때로 즐거운 우리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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