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정치가 잉태한 심청전·춘향전, 새로운 역사 신호였다

2023. 5. 13. 00:2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근현대사 특강] 근대의 여명 〈중〉
‘열녀춘향수절가’ 경판본, 한글박물관 소장본. 민간 출판이란 뜻으로 방각본이라고도 한다. [사진 한글박물관]
심청전과 춘향전은 조선 후기 대중문화의 양대 명작이다. 판소리와 소설책 두 종류로 전해왔다. 언제 등장한 작품일까. 국문학계에 따르면 춘향전은 유진한(柳振漢)의 한시 「춘향전」이 최초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의 후손인 작자가 1753년(영조 29년) 전라도 여행에서 돌아와 이듬해에 지은 것으로 춘향전 줄거리가 담겼다. 그곳에서 들은 것을 한시로 남긴 것이다. 춘향전의 본령은 판소리 완판본(전주)이다. 19세기 초반 전주 일원에서 등장하여 신재효(1812~1884)의 남창본(男唱本)에서 집대성되었다. 1867~73년 사이 정리된 대표작이다. 경판 춘향전은 읽기용으로 ‘열녀 춘향 수절가’란 제목이 붙었다. 1864~69년 무렵 소설로 나온 『남원고사(南原古詞)』는 책 빌려주는 점포에서 인기 최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춘향전은 18세기 중반에 등장하여 19세기 초중반에 소리와 소설 두 가지 형식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심청전은 한문으로 된 것이 없고 한글 소설로는 경판본과 안성본, 판소리로는 완판본이 있다. 판소리로는 신재효의 것이 역시 대표작이다. 국문학계는 최초 판본이 19세기 초에 나온 것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18세기 들어 평민 열녀 전기 등장

춘향전과 심청전의 주인공은 열녀와 효녀이다. 열녀의 역사는 오래다. 조선 전기 『삼강행실도』가 언해본으로 보급되면서 생긴 역사다. 각 고을 읍지(邑誌)를 보면 「효행」 「열녀」 항목이 세워지고 시대가 지날수록 뽑힌 인물의 수가 늘었다. 「효행」에는 남자가 대부분이고 효녀는 어쩌다 보인다. 「열녀」에는 적지 않은 평민과 천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18세기에 들어와 평민 열녀의 전기(傳記)가 등장한다. 조귀상의 「향랑전(香郞傳)」을 비롯해 6편 정도가 확인된다. 전기는 정려문 세우기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수절 내용을 후세에,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도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18세기 서민 보호 정치를 내세운 탕평 군주 시대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진한의 한시 춘향전도 굳이 따지면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심청전의 연원으로 간주할 만한 효녀 ‘전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딱지본 심청전 표지. [사진 이태진]
숙종은 재위 7년(1681)에 한강 노량진 언덕에 버려지다시피 한 사육신의 묘들을 찾아 새로 정비하게 하고 그 충절을 기리는 민절사(愍節祠)를 세웠다. 그 전까지 사육신은 세조에 대한 불충과는 동전의 양면 관계여서 왕실의 ‘뜨거운 감자’였다. 숙종이 과감하게 금기를 깨고 진정한 충신의 표본으로 사육신을 내세웠다. 신하들의 끝없는 정쟁에 대한 분노였을까. 임금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곳을 몇 차례 직접 찾았다. 어느 행차 때 한 여성이 어가 앞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미복으로 여염을 도는 군주에 대한 서민의 기대가 없었다면 이런 돌출 행위는 있기 어렵다. 신분제 관료국가에 백성의 억울함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정조 임금이 능행 중 쉬는 곳에서 상언(上言)을 접수한 것은 서민사회의 이런 여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보증인을 요구하는 상언 문서를 갖출 수 없는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꽹과리 치기(격쟁, 擊錚)방식도 허용되었다.

정조는 재위 18년(1794) 정초에 백관을 거느리고 할머니(영조 계비 정순왕후)와 어머니(혜경궁 홍씨)를 찾아 특별한 세배를 올렸다. 할머니가 50세, 어머니가 60세 되는 해였다. 할머니가 계비로 늦게 간택된 탓으로 며느리보다 10세 연하였다. 정조 임금은 두 어른이 같은 해에 순년(旬年, 10년 단위)을 맞이한 것을 “천 년에 한 번 있을 경사”라고 축하하였다. 이어 신하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전·현직 관리 70세 이상, 사(士)·평민 80세 이상, 80세 미만이라도 해로하고 있는 부부들을 모두 조사하여 ‘작위’(품계)를 내리고 해당자의 이름과 나이를 적어 올리게 하였다. 9개월 뒤 총 7만5145인의 이름과 나이를 담은 『인서록(人瑞錄)』이 올려졌다.

딱지본 춘향전. 191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5일 장터 책 장수들에 의해 널리 팔렸다. [사진 이태진]
정조는 요임금 시대에 장수, 부귀, 다남(多男)의 태평성세를 누렸다는 화서국(華胥國)의 실현을 꿈꾸었다. 아버지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도시를 새로 만들어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불렀다. 화성은 조선의 화서국이었다. 『인서록』은 곧 왕실 두 어른의 특별한 신희(新禧)을 기념하여 화서국의 장수 실현을 기약한 책이다. 이해 신도시 화성과 아버지의 원묘(園廟) 현륭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아버지의 신분이 세자였으므로 능이 아니라 원이었다. 임금은 이듬해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의 진갑 잔치를 성대하게 열 계획으로 12월에 정리소(整理所)를 세웠다.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총리대신, 호조판서를 정리사, 그 아래 중신 5명을 배치하여 10만여 냥의 예산을 배정하여 모든 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일반 백성도 유교 실천 덕목 공유

정조대왕 어진. [중앙포토]
이듬해 윤2월 11일 예정대로 임금은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갔다. 먼저 아버지의 묘원을 찾아 인사를 올렸다. 이어 화성 낙남헌에서 어머니 생일을 기념하여 문·무 특별 과거시험을 연 뒤 봉수당에서 어머니 생일잔치를 올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은 1735년(을묘, 영조 11년) 생으로 동갑이었다. 흔히 ‘을묘 원행(園幸)’으로 불리는 이 행사는 김홍도의 「화성행행도」 8폭에 담겼다. 다음날 낙남헌에서 양로 잔치가 열렸다. 서울에서 수행한 노 대신 15명과 화성 거주 노인 969명 총 984명에게 음식과 작위를 내렸다. 네 번째 화폭에 그 광경이 담겼다. 서장대 군사훈련(제5폭), 신하들과의 활쏘기 대회 행사(제6폭)를 차례로 마치고 환궁하기 전 임금은 남은 비용을 ‘정리곡’이란 이름을 붙여 전국 8도에 내렸다. 각 도에 1000~3000냥씩 나누어 화성 잔치의 기쁨을 온 백성과 함께하는 뜻을 실었다.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던져진 후 용왕의 배려로 연꽃으로 세상에 되돌려 보내져 마침 그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이 그 연꽃을 건져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연꽃이 처녀로 변하자 왕비로 삼았다. 왕비 심청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전국의 맹인 잔치를 열어 부녀 상봉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아버지 심 봉사는 딸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뜬다. 이 줄거리에서 주목할 것은 지극한 효성이면 평민도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 그리고 왕실이 마련한 전국 맹인 초대 양로 잔치이다. ‘을묘 원행’의 양로 잔치가 없었다면 있기 어려운 구성이다. 심청전이 ‘을묘 원행’ 직후 19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성 양로 잔치가 없었더라면 그런 높은 구성력을 지닌 작품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2년 뒤(1797년) 새해 첫날 정조는 다시 신하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기쁨을 팔도 신민들과 함께 누리고자 효자를 표창하고 노인을 경모하는 의식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내가 부덕한 탓으로 풍속이 새로워진 것이 없다고 하면서 특별한 조치를 지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오륜을 닦는 것이 주요하므로 모든 공부의 출발인 『소학』을 백성들이 뜻을 쉬이 알 수 있도록 설명[訓義]를 붙이고, 또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친 『오륜행실도』 언해본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농촌에서 노인을 앞세우는 「향음주례」를 행하여 노인을 섬기면서 농민들이 힘써 농사짓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자 하며, 「향약」 또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요결이므로 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그 결과로 언해본 『오륜행실도』가 간행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 책 머리에 앞의 지시를 정리하여 양로와 무농(務農)을 위해 소학·오륜행실·향음주례·향약을 반포하는 「윤음」을 붙였다. 소학, 오륜행실, 향음주례, 향약 등은 지금까지 양반 사대부들의 것이었다. 정조는 일반 백성들도 이를 공유하여 그들이 유교 덕목 실천 주체가 되어 나라의 주인 의식을 가지게 하려고 하였다. 서민 대중의 국가 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조치였다.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는 수청 들라는 변 사또에 대한 춘향의 항변이다. 남자는 두 임금을 모실 수 없고, 여자는 남편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천륜인데 나보고 수청들라는 사또 당신은 임금을 바꿀 사람이라고 질타한다. 효성이 지극하면 평민 출신도 왕비가 될 수 있다는 심청전의 메시지도 같은 지향이다. 어사 출두 후 이 도령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춘향은 나중에 나온 판본에서 지위가 첩에서 처로 바뀌고, 왕이 춘향에게 특별한 상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맺어진다. 두 작품은 곧 탕평 군주, 특히 정조가 모든 신민이 나라 주인이 되게 하려는 새로운 역사 만들기에 대한 합창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