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실종 자식 찾으려 광주리 장사하면서 집집 방문하는 어머니
가계 파탄나고, 이혼하고, 극단적 선택하는 실종자 가족들
"친구들과 놀다 금방 오겠죠"…경찰의 무관심에 실종 29년
[※편집자 주= 서기원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 인터뷰는 두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12일 송고한 기사에서는 개인적 스토리를 주로 다뤘고, 다음 주에 나가는 인터뷰 기사는 실종아동과 관련한 구조적 문제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서기원(60)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는 20대에 남부러운 것이 없는 부자였다.
젊은 나이에 여러 사업체를 운영해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벌었고 국회의원,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의 인생은 31세 때인 1994년 외동딸 희영(당시 만10세)의 실종 사고를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아이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2008년부터는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를 맡아 실종아동 관련 시스템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왔다.
10일 오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목사이기도 한 그는 안양에서 목회 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실종자 문제는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의 문제, 국가의 문제"라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실종자들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어떤 실종자 부모는 장사하는 것처럼 광주리를 이고 다니면서 남의 집을 방문, 자신의 아이가 있는지 살폈고 나는 윤락가에까지 가서 아이를 찾아봤으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실종자 가정에서 가정경제는 파탄 나고, 부부는 이혼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전라북도 남원이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나는 8남매의 막내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49세였다. 아버지는 우체국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셨다.
-- 본인은 20대 초반부터 사업했나.
▲ 나는 여러 사업을 했다. 남원의 토산품인 밥상과 목기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고 골재 사업, 커피숍, 골프연습장, 여행사업, 고미술 매매업 등도 했다. 당시에 평생 돈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 재산이 어느 정도였나.
▲ 아내와 함께 계산해본 일이 있었다. 10억 원 정도는 됐었다. 지금 돈으로는 강남 아파트 여러 채를 살 수 있는 정도였다.
-- 본인은 사업수완이 뛰어난 편인가.
▲ 당시에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였으니 돈을 벌기가 어렵지 않았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그 자체가 돈을 버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전문지식이 없어도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나는 돈 욕심이 많지는 않았다. 사업하면서도 하청업체 등에 이익이 많이 가도록 했다.
-- 20대에 사회활동도 많이 했나.
▲ 남원지역 민주청년연합회 부회장을 했고, 전라북도 환경연합회 이사도 맡았다. 남원지역에는 서울에서 수배 중인 학생들이 많이 내려왔는데, 나는 그들을 숨겨주곤 했다. 기회가 되면 정치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치보다는 큰 사업가로 성장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 사업과 사회활동에 변수가 된 것이 딸 희영의 실종이었나.
▲ 그렇다. 1994년 4월 27일 실종 당시 희영이는 만 10세였고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나는 희영이 실종 이후 모든 것을 접고 딸을 찾아다녔다.
-- 희영이 외에 자식은 없나.
▲ 희영이는 외동딸이었다. 아이를 더 갖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사업하느라 바빴다. 나중에 늦둥이를 둬서 손주처럼 키우자고 아내와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아내는 남원의 산림조합장 딸이었다.
-- 희영이 실종 당시 정황은 어떠했나.
▲ 희영이는 당일 오후 3시쯤 보습학원에서 외갓집으로 돌아온 뒤 우리 집에 들러서 용돈을 갖고 집 앞 놀이터로 나갔다. 외갓집은 우리 집에서 주택 몇 채를 사이에 두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희영이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는 첫 손주여서 예쁨을 많이 받았고, 시집을 가지 않은 이모들이 3명이나 있어서 외갓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놀이터는 외갓집에서 10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희영이는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 희영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나.
▲ 희영이는 3∼4명의 아이와 같이 놀았다. 놀이터 근처 슈퍼마켓 주인이 아내의 친구였는데,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봤다고 했다.
-- 희영이 실종 소식은 언제 들었나.
▲ 나는 내 소유의 골프연습장 수리 공사 현장에 있었는데, 희영이 이모한테 전화가 왔다. 오후 5시쯤이었다. 희영이가 가방을 두고 놀러 나갔다가 안 들어오니 (우리) 집에 들러 희영이가 자고 있는지 확인해보라 했다. 나는 승용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와봤으나 희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희영이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 위해 돈을 조금 갖고 나간 것은 확인됐다. 나는 근처의 다른 놀이터도 모두 찾아봤지만 희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도 달려가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 경찰에 곧바로 신고했나.
▲ 사안의 심각성을 직감한 나는 곧바로 역전 파출소로 달려갔다. 우리 희영이가 안 들어온다고 신고했다. 내가 역 앞에서 관광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파출소 직원들도 희영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뭐 어디 가까운 데 갔겠죠. 어디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겠죠"라고 쉽게 말했다. 나는 "희영이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이건 사고가 난 것"이라고 했으나 그들은 우선 기다려보자고 했다.
-- 경찰에는 어떤 조치를 요구했나.
▲ 나는 검문소를 막아달라고 했다. 남원에는 전주로 올라가는 길, 전남으로 내려가는 길, 경상도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이들 3곳의 검문소를 차단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고로 확인되지 않았기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사고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보라고 했다.
-- 밤이 돼도 희영이는 오지 않았나.
▲ 오후 8시가 되어도 희영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을 차 몇 대에 나눠 태워서 사방으로 찾으러 다녔다. 광한루를 비롯해 아이가 갈만한 데를 돌아다녔지만 희영이는 없었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학교에 가봤으나 희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 경찰은 이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나.
▲ 그들은 여전히 태연했다. 조급해진 나는 사고 이틀째 날 오후 5시에 방송국에 보도를 부탁했고, 희영이 실종 소식이 뉴스로 나왔다. 그제야 경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전화가 오면 감청한다고 전화기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
-- 경찰은 왜 신속히 움직이지 않았나.
▲ 그들은 매뉴얼대로 했다고 한다. 실종 사고의 경우 사흘을 기다리도록 매뉴얼에 돼 있다는 것이다. 만약 경찰이 신속하게 현장에 나와 탐문수사를 하는 등의 조처를 했다면 희영이는 금방 찾았을 것이다. 경찰이 늑장을 부려서 아이가 실종된 지 29년이 됐는데도 못 찾고 있다. 현재는 실종아동법에 따라 실종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이 현장에 가서 범죄와 관련됐는지, 단순 가출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전보다는 나아진 셈이다.
-- 그 이후 아이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윤락가도 뒤졌다. 보육시설, 장애인시설 등 각종 시설 3천 곳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없다는 답장은 2∼3곳에서만 왔다. 거의 모든 시설이 답장조차 안 한다.
-- 보육시설은 협조를 잘 안 해주는 편인가.
▲ 보육시설에 직접 방문해서 입소자 파일을 보자고 하면 안 보여준다. 그래도 다시 한번 요청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 없다고 하면 없는 줄 알면 되지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이러느냐"고 화를 냈다. 파일을 열람해 봐도 아이 사진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부 보육원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우리를 데려가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교에 간 아이, 학원에 간 아이, 밖에서 노는 아이 등이 많다 보니 그렇게 아이들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보육시설에 가서 아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보육시설은 왜 성의가 없나.
▲ 아이들이 생계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육원 아이 한 명에 연간 1억원 정도의 예산이 들어간다. 실종자 부모가 보육원에서 아이를 찾아내면 보육원 입장에서는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를 내줄리 없다.
-- 희영이가 어떻게 됐을 것으로 생각하나.
▲ 면식범에 의해 성폭력과 함께 살해됐거나 해외로 입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현재 희영이의 생존 가능성은 50% 정도로 생각한다.
-- 살해됐다면 사체나 유골 등이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하던데.
▲ 인근 지리산은 험하다. 깊은 산 속 벼랑에서 밀어트리면 사체가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종자 가족들은 재래식 화장실, 맨홀 안 등을 수색하기도 한다.
-- 희영이가 갖고 있을 만한 기억은.
▲ 아내는 그네를 잘 탔다. 남원에서 열리는 그네 타기 대회에서 1등을 해서 냉장고, 세탁기 등을 해마다 가져왔다. 전국대회에도 많이 나갔다. 희영이가 엄마의 그네 관련 모습은 기억할 것 같다. 아내는 달리기도 잘했다. 웬만한 남자들보다 빨리 뛰었다.
-- 희영이의 성격은.
▲ 내성적이고 말이 없었다. 나를 닮아 통뼈였고 힘이 좋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골프를 시키려 했다. 골프연습장을 운영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 비롯됐다.
-- 실종자 가족들은 자녀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 여러 가지 노력한다. 어떤 어머니는 광주리장사를 했다. 광주리에 생선 등을 넣고 다니면서 집집이 찾아갔다. 그냥 무작정 남의 집에 들어가면 나가라고 하니 장사를 하는 것처럼 해서 본인의 자녀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일용직을 하면서 전국 곳곳을 떠돌며 일하는 사람도 있다. 자녀를 만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 실종자 가계가 파탄 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를 찾아다니다 보니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정신적 고통을 이기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하는 사람도 있다. 그 과정에서 부부가 서로를 탓하게 되고, 80%가량이 이혼한다.
-- 실종자 부모 건강도 안 좋아질 것 같은데.
▲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니 건강이 나쁠 수밖에 없다. 나도 희영이 실종 후 위궤양에 걸려 6개월간 눕지를 못하고 소파에 기댄 채 잠을 자야 했다.
-- 극단적 선택을 하는 부모도 있나.
▲ 어떤 실종자 아이의 아버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이를 찾았는데, 아내가 자살했다. 정신적 고통과 가정파탄, 갈등에 따른 것이다. 한번은 실종자 부모들과 캠프를 다녀온 후 서울역에 몇 명 내려드리고는 식사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은 지방에 집이 있었는데, 1∼2시간 후 그의 딸이 전한 것은 어머니가 집에 와서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부음이었다.
-- 본인은 부인과의 사이가 어떤가.
▲ 지난 20년간 아내는 고향인 남원에서, 나는 서울에서 떨어져 살고 있다. 아내는 잠을 못 자고 밤에 자주 울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못했던 아내는 주량이 강해졌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많이 마시곤 했다. 그래도 나는 감사했다. 아내가 잠을 못 자고 밤새 우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 본인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나.
▲ 나는 승용차를 타고 바닷가에 앉아 있다가 오기도 한다. 2∼3시간 정도 자동차로 달려가서는 혼자 울기도 했다. 종교가 도움이 됐다. 나는 신학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나는 아이가 사고로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견딜 수 있게 됐다.
-- 희영이가 특히 보고 싶을 때는 언제인가.
▲ 실종됐던 날인 4월 27일, 생일인 3월 7일이다. 내 친구들이 딸을 결혼시킬 때, 손주를 볼 때 가슴이 아프다. 결혼식 청첩장이 오면 어쩔 수 없이 가는데, 실종자 부모한테는 힘든 일이다.
-- 친구나 형제자매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나.
▲ 식사 자리에서 친구들이 농담하고 웃고 떠들다 내가 가면 뚝 그친다. 대화가 중단돼서 썰렁한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집안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희영이 실종된 지 1년 후 아버지 제사 때 막내인 나는 형, 누나들 앞에서 많이 울었다. 그 이후 형제들은 집안 모임에서 내가 있으면 웃지 않았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집안 모임에 가지 않았다.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한테도 가족들한테도 불편한 존재가 됐다.
-- 실종자 가족이 힘들어할 때는 언제인가.
▲ 실종자 가족들은 날씨가 추운 겨울철이면 혹시 아이가 어디에서 추위에 떠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그래서 집에 아예 연탄을 안 때고 살았던 사람도 있다. 아이한테 미안해서 옷 하나 못 사 입는 부모도 있다. 인생의 절반은 슬픈 일, 나머지 절반은 기쁜 일인데, 실종자 가족에게는 기쁜 일이 없다.
--실종자 가족은 웃을 일이 없나.
▲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웃으면 뭐가 좋다고 웃느냐고 하고, 울면 뭘 잘했다고 우느냐고 한다. 직접 그런 말을 안 들어도 그걸 느낀다. 실제로는 술자리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에 약간 미소를 지었는데, 한 친구가 "지금 너도 웃음이 나오느냐"고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그를 심하게 나무라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실종된 아이가 입양됐다고 하면 그나마 괜찮은 것 아닌가.
▲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다. 친부모를 찾는 50대 여자분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입양됐는데, 양아버지는 고교 교장선생님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가 양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 그 교장의 고등학생 아들들도 성폭행했다. 너무 억울했던 그녀는 암에 걸려 죽기 전에서야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하면서 한을 풀어달라고 했다. 나는 경찰서에 연락해서 수사가 진행되도록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한테 연락이 왔다. 이제 죽는 마당에 복수를 하고 한 가정을 파멸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면서 모든 것을 그냥 안고 가겠다고 했다.
-- 강제로 입양하는 경우도 있나.
▲ 한 소녀는 서울역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쳤다. 대합실에서 울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이는 엄마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파출소가 아닌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는 호적에 올렸다. 그러나 그 입양아는 집안의 식모 역할을 해야 했다.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명절 때 모두 쉬고 있는데, 그는 혼자 주방에서 일해야 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그의 아들은 "왜 이모들은 항상 놀고, 우리 엄마만 일을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외할아버지는 "근본도 없는 자식을 데려다 키웠더니 버르장머리 없이 대든다"고 했다. 그 아들은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어머니한테 꼬치꼬치 물어서 어머니의 입양 사실을 알게 됐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머니가 양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 소년·소녀 가장 돕기도 했나.
▲ 희영이 실종된 직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했다. 남원지역 소년소녀가장들의 집을 방문하면 불을 때지 못해서 이불을 아주 높게 쌓아놓고 잠을 자는 모습을 봤다. 나는 옷가지와 과일바구니를 놓고 나오면서 한없이 눈물이 났다. 승용차 안에서도 나는 계속 울었다.
-- 이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 나는 희영이 실종의 고통을 이기는 방법이기도 했다. 당시 아이들이 폐차 안에서 자기도 하고 술·담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이 밤에 다른 곳에 떠도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 집 1층을 개방해서 비디오 등을 보라고 했다. 우리 집에는 당시 드물게 큰 TV가 있었다. 아이들이 전화해서 "삼촌, 00 전자제품 갖고 싶어요"라고 하면 사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부터 골프를 관뒀다. 골프 치는 비용으로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드에 나갈 수 없었다. 나는 그 아이들 한명 한명이 우리 희영이라고 생각했다.
--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줬나.
▲ 내 개인 돈으로 장학금을 주기도 했으나 기관장 등으로부터 장학금을 유치했다. 어떤 기관장은 자신의 활동비를 떼어서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 실종아동찾기협회 운영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
▲ 내가 매년 평균 2억원의 사비를 투입했다. 우리 단체는 후원받지 않고 있다. 실종된 아이들을 팔아서 단체를 운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다. 이제는 후원받는 것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 실종 사고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 바로 신고해야 한다. 골든타임은 3시간이라고 하는데, 실종 사실을 빨리 인식할수록 빨리 찾을 수 있다. 아이가 학교를 마치면 1시간 간격으로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파악하고 소통해야 한다. 아이의 사전 지문 등록도 반드시 하기 바란다. 아이한테 교육을 평소에 잘 시켜놔야 한다. 길을 잃었을 때는 일단 움직이지 말고 멈춰야 한다. 그리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 앞으로 협회의 계획은.
▲ 실종 부모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고, 그분들 가정이 회복됐으면 좋겠다. 이를 위한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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