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가는 대로 그렸을 뿐인데…우리더러 디자이너 선생님이래요”

지유리 2023. 5. 10.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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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1시.

충남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 마을회관 앞 벤치에 하나둘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든다.

"머릿속에 막 뭐가 떠오르는데 손으로 그려지지가 않어유. 잘 그리진 못하고 그냥 손 가는 대로 그렸슈." 쑥스러워하는 노 할머니의 말에 옆자리 앉은 할머니가 엄지까지 치켜올리며 칭찬을 건넨다.

올해 처음 참여한다는 양영자 할머니(83)는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인데 여기 와서 디자이너 선생님 소리를 다 듣는다"면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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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마을 기념품 디자인하는 어르신들 <충남 홍성>
지역 문화인단체서 매주 미술수업
벽화도 그리고 의상 디자인도 도전
문화예술 누리면서 삶의 질 높아져
작품 활용해 달력·에코백 도안으로
축제 선보이고 온라인 판매 계획도
충남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 어르신들이 수업시간에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뒤에 있는 건물은 마을 미술작업실이다.

4일 오후 1시. 충남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 마을회관 앞 벤치에 하나둘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든다. 저마다 한 손에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었다. 이들이 챙긴 준비물은 스케치북과 사인펜·크레파스다. 모두 미술 수업을 듣는 어르신들이다. 수업은 2시부터 시작인데,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은 마음에 한참 일찍 길을 나섰다. 누군가 스케치북을 꺼내 들자 너도나도 그림을 내보이며 자랑을 시작한다. 서로 그림을 보며 한두 마디 보태느라 어느새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천태리에선 4년째 매주 목요일 미술 수업이 열린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인들이 모인 비영리단체 ‘신작로문화예술연구소(대표 김연돈)’가 수업을 진행한다. 2020년부터 이곳 어르신들과 함께 벽화 그리기, 마을 가꾸기 등을 했다. 지난해엔 직접 의상을 디자인하고 모델로 나서서 패션쇼도 벌였다. 올해는 홍성군 문화특화사업단 공모사업에 선정돼 ‘천태리 할배·할매 나만의 굿즈(기념상품) 디자인에 도전하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달력·에코백·메모지·고무신 같은 굿즈를 제작한다.

정옥희 할머니(오른쪽 두번째)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마을회관 거실에 어르신 8명이 빙 둘러앉았다. 수업을 맡은 주남수 기획자(56)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들, 숙제 검사하게 스케치북 꺼내셔유” 하며 수업 시작을 알린다. 하나도 못 그렸다며 쑥스러워하던 것과 달리 저마다 스케치북을 꺼내는 손길이 재빠르고 눈빛은 반짝인다. 첫 순서는 노은희 할머니(80)다. “머릿속에 막 뭐가 떠오르는데 손으로 그려지지가 않어유. 잘 그리진 못하고 그냥 손 가는 대로 그렸슈.” 쑥스러워하는 노 할머니의 말에 옆자리 앉은 할머니가 엄지까지 치켜올리며 칭찬을 건넨다.

올해 처음 참여한다는 양영자 할머니(83)는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인데 여기 와서 디자이너 선생님 소리를 다 듣는다”면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숙제 검사가 끝났어도 누구 하나 펜을 쥐는 이가 없다.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웃고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누군가가 비 오기 전에 고추밭 지지대를 세우느라 힘들었다는 푸념을 하자 거들어주겠다며 위로하고 요새 벌·나비를 보기 어렵다는 말에 다들 맞장구를 친다. 그러자 주 기획자가 “농사가 잘되려면 벌이 많아야 하는데 큰일이다”며 “오늘은 귀한 벌을 한번 그려보자”고 한마디를 던진다.

천태리 주민들의 그림 주제는 이렇듯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들이다. 밭에 심은 콩과 양파, 담벼락에 핀 들꽃,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 등이다. 지난 수업 땐 화투패를 그렸다. 다들 심심풀이로 치던 거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며 자신 있어 했다.

최고령 수강생인 정순선 할머니(96)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벌써 스케치북 한권을 꽉 채웠다. 그는 “다 같이 모여서 노는 게 좋아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에 온다”면서 “덕분에 디자이너 선생님 소리도 듣고 출세했다”며 웃었다. 평생 일만 하고 살았는데 이제라도 좋은 취미가 생겨 즐겁다고 말했다.

신작로문화예술연구소는 7월까지 수업을 진행한 뒤 어르신들이 그린 그림을 굿즈로 제작해 지역축제에서 판매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온 수익금은 4월 서부면에서 발생한 산불 피해 복구 기금으로 기부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온라인 판매에 나서 어르신들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할 계획이다.

주 기획자는 “어르신들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누리면서 자존감과 삶의 질이 올라갔다”면서 “나아가 마을기업을 세워 자신의 재능으로 수익을 창출해 어르신들의 삶과 지역경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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