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종’ 흔들어 잠든 사랑 깨우는… 유럽 왕가 공주 부케로 사랑받아[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2023. 5. 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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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카페 - 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26) 은방울꽃
그레이스 켈리·다이애나비·미들턴 부케로 사용… 서거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좋아했던 꽃
달콤한 향기는 향수로도 인기… 예술가들 꽃 매력에 빠져 샤갈은 그림으로, 차이콥스키는 시로 찬탄
샤갈은 그림으로, 차이콥스키는 시로 찬탄했던 은방울꽃은 서거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좋아했던 꽃이기도 하다. 사진은 한국에서 자생하는 은방울꽃. ⓒ 박원순

은방울꽃은 이른 봄 숲 바닥에서 돌돌 말린 잎들을 하나둘씩 올리며 봄의 기쁨과 설렘, 싱그러운 생명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다가 점점 더 초록이 무성해지는 4월 말에서 5월 초반 무렵 아주 작은 흰색 종 모양의 꽃들을 피운다. 커다란 잎들 사이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아치를 이루며 자라난 꽃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꽃들 위로 비스듬히 아침 햇살이 비치면 마치 은빛 물방울들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조선식물향명집’(1937)에도 은방울꽃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등재됐다.

유럽에선 숲 속 작은 요정들이 모여 파티를 하는 동안 걸어 둔 컵 모양 같다고 해서 ‘페어리 컵스’(fairy cups)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요정들이 노래를 부를 때 꽃들이 종처럼 울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루이 야생트 부이예가 쓴 시를 작곡가 조르주 비제가 아름다운 곡으로 만든 ‘4월의 노래’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은방울꽃은 작은 종들을 흔들어 숲 속에서 잠든 사랑을 깨우는 꽃이다.

은방울꽃 종류는 콘발라리아(Convallaria)라는 속명을 가지고 있다. 골짜기를 뜻하는 라틴어 콘발리스(convallis)와 백합을 뜻하는 그리스어 레이리온(leirion)이 합쳐진 말로 계곡의 백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꽃을 부르는 영어 이름도 ‘릴리 오브 더 밸리’(lily of the valley)다. 은방울꽃은 아시아와 유럽 등 북반구 온대 지역에 걸쳐 분포하는데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북아메리카 지역에 자생하는 미국은방울꽃(C. majuscula, syn. C. montana),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하는 은방울꽃(C. keiskei), 그리고 드넓은 유라시아 지역에 걸쳐 자라는 유럽은방울꽃(C. majalis)이다. 이 중에서 유럽은방울꽃은 전 세계 여러 곳에 널리 퍼져 가장 보편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종명인 마잘리스(majalis)는 ‘5월에 속해 있다’는 뜻으로 이 꽃의 개화기를 암시하며, 같은 이유로 유럽은방울꽃은 메이 릴리(May lily), 메이 벨스(May bells)라고도 불린다.

유럽은방울꽃이 5월의 꽃이다 보니 서양에서 예로부터 기념해온 오월제와도 깊은 연관을 맺어 왔다. 오월제는 전통적으로 봄의 절정을 맞은 5월 1일쯤 춤과 노래를 즐기며 다가올 여름을 맞이하는 축제다. 죽음과도 같은 겨울이 완전히 끝난 후 다시 찾아온 새로운 생명의 계절을 기념하는 것이다. 5월을 뜻하는 단어 메이(May)는 아틀라스의 일곱 자매 중 맏딸로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헤르메스를 낳은 마이아(Maia)에서 비롯됐는데, 마이아 여신은 만물이 생장하는 봄을 상징한다.

프랑스에서는 유럽은방울꽃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 그 유래는 1561년 프랑스의 왕 샤를 9세가 행운의 부적으로 유럽은방울꽃을 받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꽃향기에 크게 감동한 샤를 9세는 그 이후로 매년 5월 첫날이면 궁정의 여인들에게 유럽은방울꽃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이 전통은 20세기 초에 다시 살아나 매년 5월 1일 노동절(May Day)이 되면 서로의 행복을 빌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유럽은방울꽃을 선물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이날만큼은 누구나 세금 부과 없이 유럽은방울꽃을 판매할 수 있다.

중세 시대 유럽은방울꽃은 여러 상징성을 지녔다. 영국 서식스 지방에서는 유럽은방울꽃이 세인트 레너드(St Leonard)가 용과 싸우다 흘린 피로부터 피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 지역의 숲은 여전히 릴리 베드(Lily Beds)라고 불린다. 가톨릭교에서 유럽은방울꽃은 성모 마리아와 연관된 여러 꽃 중 하나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며 흘린 마리아의 눈물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유럽은방울꽃은 왕가의 공주들이 결혼식 부케에 사용한 꽃으로도 인기였다. 1900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의 첫 번째 왕비가 된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공주, 1956년 모나코의 대공 레니에 3세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미국의 배우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도 결혼식에서 유럽은방울꽃 부케를 사용했다. 영국 왕실에서는 1921년 퀸 마더, 1981년 웨일스의 공주 다이애나, 2011년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에 모두 유럽은방울꽃 부케가 사용됐다. 유럽은방울꽃은 2022년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가장 좋아했던 꽃이기도 하다. 유럽은방울꽃이 이렇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이유는 순수한 사랑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꽃과 잎의 자태, 그리고 달콤한 향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유럽은방울꽃을 무척 사랑해 그의 정원에서 가꿨을 뿐 아니라 그 꽃으로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1956년 향수 제조가 에드몽 루드니스카(Edmond Roudnitska)가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위해 만든 디오리시마(Diorissimo)는 유럽은방울꽃 향수의 고전이 됐다.

1976년 출시된 영국 펜할리곤스(Penhaligon’s)의 유럽은방울꽃 향수도 아주 유명하다. 펜할리곤스는 영국 왕실 이발사이자 조향사였던 윌리엄 헨리 펜할리곤(William Henry Penhaligon)이 1870년대 런던 저민 스트리트에 처음으로 설립한 유서 깊은 향수 회사다. ‘릴리 오브 더 밸리’라는 이름의 이 향수에서 유럽은방울꽃 향은 톱 노트(top note)인 베르가모트와 베이스 노트(base note)인 백단향 사이에서 장미, 일랑일랑, 재스민과 함께 미들 노트(middle note)를 잡아주는 은은한 풀향을 담당한다.

유럽은방울꽃은 프랑스어로 뮤게(muguet)라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은방울꽃 무도회’라는 뜻의 ‘발스 드 뮤게(bals de muguet)’가 열리기도 했다. 이날만큼은 미혼 남녀들이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댄스파티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여자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남자는 단춧구멍에 유럽은방울꽃 줄기를 꽂았다.

영국 콘월주의 헬스턴 마을에서도 매년 5월 8일 이 마을을 상징하는 유럽은방울꽃과 연관된 아주 특별한 댄스 축제가 열린다. 성 미카엘 대천사 발현 축일이자 ‘꽃의 날’(Flower Day)인 이날 수천 명의 마을 사람이 모여 겨울의 끝과 봄의 절정을 축하하며 중심가 거리를 따라 ‘퍼리 댄스’(Furry Dance)를 춘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이 퍼레이드에는 지역 학교 어린이들뿐 아니라 실크해트와 연미복을 입은 신사들,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비롯한 모든 연령층의 헬스턴 주민들이 함께한다. 참가자들은 헬스턴을 상징하는 꽃인 유럽은방울꽃을 착용하는데, 남자들은 왼쪽에 꽃이 위를 향하도록, 그리고 여성들은 오른쪽에 꽃이 아래를 향하도록 꽂는다.

1916년 마르크 샤갈이 그린 유럽은방울꽃.

수많은 예술가도 유럽은방울꽃의 매력에 빠졌다. 차이콥스키는 1878년 피렌체에 있는 동안 유럽은방울꽃에 관한 시를 썼고,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은 1916년 아름다운 꽃병 속 유럽은방울꽃 그림을 그렸다. 오늘날에도 그 인기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데, 2011년 개봉한 라르스 폰 트리어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 포스터에도 유럽은방울꽃이 등장한다. 모두 아름다운 봄의 귀환과 함께 행복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은방울꽃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유럽은방울꽃은 유고슬라비아와 핀란드의 나라꽃이기도 하다.

은방울꽃류는 봄에 충분한 햇빛이 필요한 반면, 여름엔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반그늘을 좋아하지만 너무 짙은 그늘에서는 꽃이 덜 핀다. 겨울엔 낙엽이 지고 봄에 꽃이 피며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지는 라일락 같은 화목류 밑에 은방울꽃을 심어 두면 좋다. 특히 다른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곳에서도 뿌리가 잘 자라 큰 나무뿌리 주변으로 휑한 곳이나 숲 경사지 같은 곳을 피복해 주는 지피식물로도 그만이다. 땅속 뿌리줄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새로운 싹과 뿌리를 내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모든 은방울꽃에는 치명적인 독성이 있다. 콘발라톡신(convallatoxin)을 비롯한 강심배당체가 함유돼 있어 섭취 시 복통, 메스꺼움, 구토와 함께, 불규칙한 심장 박동과 시야가 흐려지는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대개의 독성 식물이 그렇듯 전통적으로 다양한 질환에 대한 약으로도 쓰여 왔으며, 특히 우울증, 뇌전증, 뇌졸중 등 머리와 뇌 관련 질환을 비롯한 두근거림 등에 효능이 있다.

은방울꽃은 화려함을 좇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고즈넉한 사찰 담장 주변이나 숲 가장자리 햇빛과 그늘이 교차하며 반짝이는 나무 아래, 옥잠화나 산마늘처럼 생긴 커다란 잎들 사이에 숨어 피어나기 때문이다. 날로 신록이 짙어가는 5월의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이 꽃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마도 마음속에 다시 찾아든 작은 행복감에 절로 미소를 띠게 될 것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1808년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가 그린 유럽은방울꽃.

■ 유럽은방울꽃(Convallaria majalis)

백합과에 속하며 유라시아를 비롯한 북반구 온대 지역에 걸쳐 널리 분포한다. 4월 말에서 5월 초에 걸쳐 5∼15송이가 차례대로 아치 모양 총상 꽃차례를 이루며 피어난다. 유기질이 풍부하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을 좋아하며, 오전엔 햇빛이 비치고 오후엔 그늘이 지는 곳에서 잘 자란다. 땅속 뿌리줄기를 뻗어 나가며 빽빽한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데, 봄가을에 뿌리를 나누어 번식할 수 있다. 가을에 익는 주홍색 열매를 비롯해 식물체 전체에 독성이 있으므로 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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