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이미 젖었으니 더 젖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임인택 2023. 5. 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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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주란 새 소설집
없는 자가 없는 자를 보듬는
사랑법…‘안단테의 미학’ 올돌
“내 삶과 비슷해 찾아온 주인공들”
이주란 소설가가 4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l 한겨레출판 l 1만5000원

작가 이주란(39)의 새 소설집 <별일은 없고요?>.

세 가지 특징부터 추려보려 한다.

그의 소설은 천천하다. 아다지오로 안단테로 느리다. 전개가 천천하여 “지난 삶은 다 끝난 일”이라는데도 주인공에게 그 상실과 슬픔은 계속인데, 다 읽다 보면 인물들은 조금 추슬러져 있고 조금 이동해 있다.

주인공들은 미천하고 미약하다, 이다지도. 이들의 세계에선 굳이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내기만이라도” 해야 하는 이들이라 사건 뒤가 사건이고 고통으로 계속인데, 다 읽다 보면 이들은 조금 웃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들이-자주-맞는 비를 같이 맞고 있는 것 같다. 비도 흔하지만 더 흔한 우산은 이주란의 선택이 아니다. “비를 먼저 맞은 다음에 비를 맞으면 이미 젖었기 때문에 더 젖어도 괜찮다고.” 그런 느낌이 전해지는 몇몇 대목에선 독자도 잠깐 척척해지고 조금 울컥해진다.

위 서술엔 사실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작품 속에 있다. 굳이 하나만 뽑자면, 없는 이가 없는 이를 천연히 감싸는 관계, 그 관계를 찬찬하게 전해내는 이주란의 시적 서사 때문이겠다. 그래서 조금 추스르고 조금 웃고, 그러다 보니 조금 눈물이 난다고.

소설이 다루는 인물의 출처가 대개 그러할진대 그중에서도 근래 이와 같이 낮고 외진 데를 보지 못했다. 이 작가는 3일 <한겨레>에 “나의 삶과 다르지 않고 환경이 비슷해서 자연스레 찾아온 이들”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사직서를 내고 연고도 없는 지역서 사는 엄마의 5평짜리 원룸으로 들어가는 수연(‘별일은 없고요?’), 불법 비닐하우스에 살다 스무살에 철거된 뒤 조부모와 살며 체념을 내면화한 수현(‘위해’), 4년째 4개월마다의 계약을 위해 열정을 갈아 넣은 회사와 믿고 따른 상사로부터 결국 버림받은 경아(‘어른’), 가정폭력과 빚을 남기고 무연고사 처리되는 아버지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온전하게 행복한 적은 없었다”고 일기 써야 했던 여성(‘이 세상 사람’)…. 이들이 작가를 찾아 말한다. 꺾이고 무너지고 가라앉고 일어서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 사랑하여 기대는 그들의, ‘존재’하는 법.

소설집 속 가장 근사하게는 이런 방식이 있었다.

긴 장마의 첫날, 은영이 2년 만에 은영을 찾아온다. 둘은 동명이인으로 한 직장에서 한 은영처럼 가까웠으나 무슨 연유에선가 화자인 은영이 회사를 관둔다. 다른 은영은 잘 지낸다고 전 직장동료가 말한다. 은영은 개의치 않는다. 어떤 기억과 믿음 때문일 터.

화자 은영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친구들과 할 얘기가 없”다. 무슨 사연에선지 그 생각은 오래됐으므로 이젠 누구도 그의 얘길 묻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원하고 있으니 슬프지”라고도 타일렀던, 그럼에도 잠시나마 행복을 함께 나눴던 엄마마저 최근 잃고 침잠하던 때, 유일하게 서로가 서로를 묻고 “다정”히 “타박”하고 객쩍은 말과 웃음을 주고받던 그 은영이 나타난 것. 그 은영 또한 어머니를 잃은 뒤였다.

은영과 은영은 며칠 동거 뒤 또 헤어진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또 그리워하고 기다릴 것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는 중에는 그날의 기억으로 살거나 그날의 마음으로 사는 거라고” 되뇌며.

단편 ‘사람들은’의 이야기다. 은영과 은영은 사랑일까, 독자는 되뇔 법 한데 다른 단편 ‘여름밤’의 ‘나’와 ‘은영’의 만남이 그렇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이는 (동성의) 에로스를 넘어선다. 은영과 은영의 것처럼 서로를 기억하여 기다리는 안단테의 마음이 사랑이고 오늘 살아갈 이유다. 상실은 거듭될지언정.

‘여름밤’에서 둘의 교감은 봄밤처럼 달다. “깜찍하다”, “우주”, “보송보송” 같은 낱말을 생전 처음 은영 때문에 말해보게 된다는데 ‘나’로선 숨기지 않아 ‘과분한’ 감정들. 하지만 그 감정이래 봤자 미싱공 노동자 박경미가 단기계약직으로 쫓겨난 경아를 무심한 듯 보듬는 마음, 경아가 단칸방 옆집 수감자의 아이 유리를 챙기며 조심히 가려 하는 말들이나 그때 환해진 유리의 마음(‘어른’)과 큰 차이가 없다.

급기야 이는 근래 남편을 잃은 현경을 오래전 남자친구가 조심조심 찾아와 위로하는 마음(‘파주에 있는’), 엄마도 모르게 “숨죽여 울”던 시절 재섭과의 잠깐 만남 뒤 받은 문자 “잘 도착했나요” “별일은 없고요?”(‘별일은 없고요?’)로 걷히는 감정과도 맞닿는다.

이주란의 작품에서 말갛게 전개되는 이성애적 관계도 여운을 준다. 특히 미투 이후 ‘사랑’을 온전히 그리려는 문학적 시도에 ‘남자’ 자체가 위협이라 아예 여-여 등의 관계가 설정될 수밖에 없고, 이는 때로 티끌 없는 진공상태로 현실을 대체한다.

작가는 <한겨레>에 “(다른 작품에서) 인물 스스로 아픔을 이겨내고 당당해지는 경우도 많은데 나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타인의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는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를 재구성하기보다 사건이 몇 년 지난 시점으로부터 감정을 살피는” 작법으로 구현되는데 “죽을까 생각했던 그 후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작가는 2012년 등단해 소설집 2권, 중·장편 2권을 썼다. 일관되게 낮고 외진 데로 그가 물어온 안부를 함께 물은 듯 조금 착해진 느낌을 받을 법하다. 가령 작가 황정은의 소설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소설을 읽은 중 스쳐 갔지만, 그 반대도 될 것이다.

이주란 작가가 “그냥, 한때 써보려고 했다”는 동시와 동화를 만나볼 수 있을까.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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