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긴 나라, 반미 먹어야”…아재개그·노래의 향연 [ESC]

한겨레 2023. 4. 2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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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노동효의 지구둘레길 베트남 여행①
가수 손병휘와 호찌민 도착
통통배·나룻배로 메콩델타 투어
다낭까지 18시간, 기차로 이동
기타 치고 노래 부르자 달이 떴다
베트남 기차 안에서 가수 손병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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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로 같이 여행 다녀올래?”

벚꽃 피길 기다리던 무렵이었다. 지금 한국 떠나면 봄꽃 만발한 풍경을 놓치는데. 그러나 즉각 수락했다. 같이 여행할 기회가 늘 있는 건 아니니까. 마음에 둔 나라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여러 직책과 행사를 맡으며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잠시 먼 풍경을 보고 싶었나 보다. “형, 호찌민에서 하노이까지 북상하면서 쉬엄쉬엄 기차 여행 하는 건 어때?” 내가 물었다. “그거 좋다!” 배낭을 꾸렸다. 어디라도 좋았다. 이번 여행지는 국가나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니까, 손병휘.

그를 일컬어 촛불 가수, 거리의 가수, 운동권 가수라고 부른다. 1980~90년대 ‘꽃다지’와 더불어 많은 민중가요를 쏟아냈던 ‘조국과 청춘’ 멤버로 시작해 개인 앨범만 8집까지 낸 싱어송라이터. 텔레비전에서 볼 일은 거의 없었지만 많은 시민이 광장에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나란히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 가는 거지요.”

지난 3월30일 아침 인천공항 활주로를 날아오른 비행기가 정오를 지나 호찌민 외곽 떤선녓 공항에 내려앉았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여행지를 잘못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월이면 무더운 날씨가 덮치는 타이·라오스·캄보디아와 달리 동쪽 바다와 접한 베트남은 덜 더울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국의 벚꽃이 예년보다 일찍 피었듯 이른 무더위가 베트남을 덮쳤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헤어드라이어를 입에 물고 있는 듯했다.

호찌민 동상 뒤에서 바라본 호찌민시의 모습.

900만 인구에 800만 오토바이

동남아 승차 공유 서비스인 ‘그랩’으로 택시를 불렀다. 오토바이까지 부를 수 있는 그랩은 동남아 여행자의 필수 앱이었다. 차량번호를 확인하고 올라탔다. 운전사를 향해 인사했다. 씬짜오(안녕하세요)! 그 외 다른 문장은 알아도 삼가기로 했다. 통상 여행지를 정한 뒤 필수문장과 단어를 외운다. 안녕. 얼마인가요? 화장실이 어디죠? 숫자와 가족 호칭. 가족 호칭을 사용하면 현지인과 금방 친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어는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는다, 말의 높낮이와 길이에 따라 다른 말이 되기에.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사이공을 방문해 독재자의 연설이 끝날 무렵 그가 외치던 “베트남 만세!”를 따라서 연창했다. 군중 속에서 웃음이 터졌다. 맥나마라가 외칠수록 웃음소리 높아졌다.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 느닷없이 “작은 오리가 눕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숙소는 부이비엔 워킹 스트리트에 있었다. 타이로 치면 카오산로드, 서울로 치면 이태원과 홍대앞이 뒤섞인 지역이다. 댄스곡을 틀어놓은 클럽 뒤편 숙소는 고즈넉했다. 골목의 폭은 좁지만 운치가 있었다. 예약 확인을 하며 호텔 직원 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의 절반은 숙소의 환대에 달렸다. 웃음은 전염된다. 리를 볼 때마다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호찌민 여행자 거리의 뒷골목 풍경.

일단 환전하러 벤탄 시장 인근 금은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이탈리아 운전자들은 끊임없이 경적을 눌러대고 과격한 제스처를 쓰면서 말을 하고 다른 차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방어하는가 하면, 사랑도 나누고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 엉덩이를 때리거나 야구방망이만 한 샌드위치를 먹는 등 이 모든 일을 운전 중에 한다. 이 모두를 한꺼번에 할 때도 많다“던 미국 작가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가 떠올랐다. 목적어를 ‘오토바이’로 바꾸면 베트남이다. 900만명이 사는 호찌민에 오토바이만 800만대, 인도는 오토바이 주차장과 다를 바 없었다.

“인도가 너무 비인도적이네!” 병휘 형이 아재 개그를 던졌다. 내가 웃었다. 그때부터 그는 아재 개그에 신들린 사람처럼 되든 안 되든 닥치는 대로 던져댔다. “형, 뭐 먹을까?” “미국을 이긴 나란데, 반미(베트남식 샌드위치) 정도는 먹어줘야 하지 않을까?” “냐짱과 달랏엔 가봤다니 다낭까진 바로 갈까?” “그래, 이번엔 냐짱불입이다!”

베트남식 샌드위치 반미.

숙소 근처 ‘문니스 바’라는 가게가 있었다. 유리창 너머 사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닫이를 젖혔다. 테이블 네댓개와 이리저리 놓인 의자가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앉힌 건 어쿠스틱 기타를 반주로 한 라이브 뮤직이었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또 다른 이가 기타를 받아서 노래하고, 다음 주자가 기타를 받고.

“오픈 마이크야! 너희도 불러볼래?” 바텐더가 물었다. “해볼까?” 손병휘가 기타를 멨다. 첫 번째 선곡은 ‘헤이 주드’, 점점 고조되자 손님들이 “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후렴구를 부르며 떼창이 됐다. 이어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노래를 마치고 돌아오자 저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바텐더가 감동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일랜드 출신 주인이 손을 맞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호찌민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호찌민시 여행자 거리에 있는 문니스바 실내 풍경.

“이런, 신발…”

다음날 메콩델타로 투어를 갔다. 인도차이나반도를 여행하며 미얀마·타이·라오스·캄보디아에서 메콩을 만났지만 베트남의 메콩을 보지 못했던 게 늘 아쉬웠다. 미니버스가 서쪽으로 향했다. 누런 강이 흐르는 미토에 닿았다. 버스에서 내려 통통배, 나룻배로 갈아타며 섬들을 옮겨 다녔다. 가이드는 꿀 파는 가게, 코코넛 사탕과 매트를 만드는 공장으로 안내했다. 값싼 투어의 전형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삼각주에 사는 이들의 다채로운 삶을 잠깐이나마 들춰볼 수 있었으니까. 베트남에선 메콩을 ‘끄우롱’이라 부른다. 한자어로 구룡이다. 하구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며 수많은 삼각주를 만들기 때문이다.

메콩델타의 수로를 쪽배로 오가는 주민들.

호찌민에서 마지막 날. 동양의 파리로 불리던 시절에 지은 시립극장, 시청, 마제스틱호텔을 지나 돌아오던 길이었다. 예닐곱명 무리를 지나는데 한 명이 병휘 형에게 달려들더니 신발 밑창에 순간접착제를 발랐다. 다른 녀석이 슬리퍼로 갈아 신겼다. 순식간이었다. 뺏은 신발에 비누칠하고 쓱쓱 문지르더니 비용을 요구했다. 10만동(약 5600원)을 쥐여주고 빠져나왔다. 큰돈은 아니지만 괘씸했다. 병휘 형이 한숨 쉬듯 내뱉었다. “이런, 신발….”

호텔에서 역으로 데려다줄 콜택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전에 봤던 노년의 숙박객이 여전히 로비에 앉아 리를 향해 떠들고 있었다. 붙들린 리를 도울 겸 노인에게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죠?“ “미국, 베트남 전쟁 때 처음 왔지.“ 예상대로였다. 그는 사진을 꺼내 보였다. 청년이 셰퍼드 곁에 선 사진이었다. 이어서 묻지도 않은 베트남전 경험담을 택시가 올 때까지 늘어놓았다. 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호찌민이 동양의 파리로 불리던 시절에 지은 사이공 오페라 하우스. 현재 이름은 ’호찌민 시립극장’.

하노이행 기차는 하루 네 차례 출발한다. 대략 4인용, 6인용 침대칸과 좌석칸으로 나뉜다. 다낭까지 18시간가량. 일몰과 일출을 보기 위해 낮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했다, 주말이란 걸. 리에게 4인용 침대칸 1층 티켓 예약을 부탁했지만 2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1층 승객이 해 질 때까지 같이 앉아 가자면, 술을 사리라!

기대하며 배정된 칸의 문을 열었다. 당황스러웠다. 대낮부터 커튼까지 친 어둔 방, 두 베트남 청년이 이미 이불 펴고 누운 상태였다. 인사를 건네도 만사 귀찮은 표정. 2층으로 올라가 대충 자리를 정리했다. 둘이 아는 사이긴 한데 말 섞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카키색 속옷과 침대 사이의 카키색 금속제 박스. “뭐 하는 이들일까?” “군인이긴 한 것 같은데….”

1726㎞ 호찌민과 하노이를 오가는 베트남 종단 열차.

철길동무의 중요함

복도로 나왔다. 기차가 움직이고 늘어선 가옥 옆에 붙은 철길 위를 달렸다. 바깥 풍경을 보는데 여객전무가 나타났다. 번역 앱을 이용해 물었다. “자릴 바꿔줄 수 있나요?” 어두운 방을 힐끗 들여다보더니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찾아볼게요.” 30분 후 그가 나타났다. “자리를 조정하면 침대칸 하나를 비울 수 있는데, 그것도 밤 11시반 도착역부턴 승객이 있어요. 그때까지라도 사용하려면 표를 끊을래요?” “얼마죠?” “20만동”. 옮기자!

빈 침대칸으로 옮기고 문을 닫는 순간, 만세를 불렀다. 춘광사설, 구름 사이로 봄 햇살이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병휘 형이 기타 줄을 조율하며 물었다. “옆 칸에 방해될까?” “덜컹대는 기차에 꼬맹이들 소리까지, 우린 안중에도 없어요.” “그럼…” 기타 소리와 함께 노래가 철로를 박차고 날아올랐고, 손뼉 치며 흥을 돋우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돌아보았다. 식음료 파는 판매원이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비어!”

식음료 판매원은 열차의 처음과 끝을 오갈 때마다 문을 두드리고 웃으며 물었다. “모어 비어?” 테이블 위로 10개의 캔이 쌓일 무렵 미군과 베트콩과 한국군과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군이 서로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지났을 숲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손병휘가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밤하늘 위로 뜬 달이 따라오고 있었다.

“나의 노래가 그대의 그늘진 삶에 작은 위로 될 수 있을까. 나의 노래가 그대의 지친 어깨를 부축할 수 있을까. 그동안 걸었던 노래의 길은 작고도 외진 길인데. 우리가 꿈꾸던 그런 세상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기타 하나 메고 혼자 가는 길에 누가 벗 되어줄까. 웃음 띤 얼굴로 바라봐준다면 그대 위해 노래하겠네.”

글·사진 노동효 여행작가

화성으로 떠나기 전 인류 삶과 지구 풍경을 톺아보기 위해 여행하는 ‘길 위의 노동자'. ‘지구둘레길’은 작가의 과거 여행을 회고하며 현재적 의미를 톺아보는 여행기다. <남미 히피 로드>, <세계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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