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세무 일 했는데…그만두랄까봐 임금 얘길 못 하겠어요”
세무회계 노동자 수진씨
가족에 미안해서 진학 대신 직장
곁 지켜준 휜 송곳과 낡은 계산기
속으로 말 삭이고 불만 누르면서
“33년 일한 나, 내가 생각해도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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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회계법인입니다. 네, 부가가치세 예정신고 맞아요. 따르릉. 사장님, 고용보험만 떼시면 돼요. 곱하기 0.9%. 따르릉. 그럼 수정세금계산서 발행하시면 돼요. 따르릉. 아, 며칠부터 며칠까지요? 잠깐만요. 고용보험 ○원, 갑근세·주민세 ○원 제하면 돼요. 따르릉…
하루 수십통, 수진(가명)씨는 컴퓨터 앞에서 고객 업체의 물음을 바로 풀어준다. 상업고 3학년 2학기에 세무사 사무소에 들어가 세무회계 업무만 33년째다. 세번째 직장인 여기서 올해 28번째 봄을 맞았다. 사무실도 처음 그 자리인데 집도 그렇다. 내 집에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옹골진 계획대로 첫애 돌 무렵 마련한 집에서 그 애가 성인이 되었다. 첫애 낳고 40일, 둘째 때 6개월을 빼고 한결같은 길을 다닌다. 몸값을 불리고, 집값을 불리려면 몇 차례고 이동해야 했을까. 수진씨는 그런 덴 미련이 없다. 많이 떠난다는 동네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 사이에 삶터와 일터를 꾸린 그이는, 한곳에 붙박인 게 아니라 튼튼하게 뿌리내린 사람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숫자에는 좀 빨라서 이 일이 내 직업으로 맞았어요. 엄마랑 둘이 남도 섬에서 살다 고1 앞두고 언니들이 일하는 서울로 왔어요. 방학마다 언니 보러 왔는데, 막상 살려니까 서울이 엄청 무서웠어요. 그래서 버스 노선도 한번 보면 외우고, 우편번호나 전화번호도 보이는 대로 다 외웠어요. 숫자가 막 눈에 들어왔어요. 길 잃지 않으려고 그랬나 봐요. 서울 어디에 뭐가 있는지, 지도 보면서 구별로 싹 외우기도 했어요.”
셔터 내리고 했던 숱한 밤샘
사무실 책장에는 문서보관상자와 보존상자, 세금계산서를 비롯해 직접 제본한 각종 서류철이 빼곡하다. 책상 위 송곳과 계산기는 “입사 초기부터 계속 쓰기도 했고, 나하고 오래 같이 있어서” 안 버렸다는데, 긴긴날 서류를 철하느라 송곳날이 휘었다. 전자계산기는 손날에 얼마나 쓸렸는지, 세 군데 모서리가 반짝반짝 빛난다. 그이 손은 어땠을까.
수진씨는 달마다 10일에는 원천징수세를, 말일마다는 간이지급명세서를 신고한다. 1·4·7·10월에는 부가가치세 신고(4월은 예정신고), 2월은 연말정산, 3월은 법인세, 5월은 종합소득세, 6월은 성실신고를 준비한다. 이 업계에서는 신고 기간에 야근과 주말 근무가 흔하다. “일에 에러가 나지 않게, 즉 나중에 세금이 더 부과되지 않도록” 해야 하니 신경도 곤두선다.
“일 바쁠 때는 화장실도 못 가요. 신기하게, 금방 마려웠다가도 참으면 없어져요. 하하하. 잊어버리고 하루에 한번 간 날도 있어요. 오래 앉아 허리가 아프죠. 눈도 아프고, 책상마다 파스랑 보호대가 필수죠. 주말, 밤샘도 숱했어요. 그런데도 월급에 다 포함됐대서 따로 수당을 받진 못했어요. 예전에는 셔터 내리고 일했어요. 소파에서 잠깐 눈 붙이고 근처 목욕탕 가서 씻고 다시 출근했죠. 요즘은 그렇게까지 밤새우며 일하지는 않아요.”
지금 직원들은 초창기부터 일한 사람들이다. 이제 나이도 있지만, 일 장악력도 있어 밤샘은 하지 않는다. 그간 혹사당한 자신을 이젠 보살펴야 한다. 수진씨를 비롯해 직원들은 고객 업체에 신뢰를 주고 회사를 불려왔는데 회사는 냉정했다. 한바탕 몰아쳐 일하고 신고 기간이 끝나면 국내외 여행으로 보상할지언정, 임금으로 주진 않았다. 관례인 듯, 다른 사무소도 여행을 떠났다. 일정이 안 맞아 돈으로 주었던 때는, 여행비에 비교가 안 되게 적었다. 더 큰 일은 해고였다.
“그때 잘린 직원들한테 엄청 미안했어요. 나는 여기 있는데…. ‘너도 그만둬’ 할까 봐 그때 내가 아무 말 못 했어요. 그게 마음에 쌓였어요. 지금도 계속. 사람들은 잘리지 않고 일하는 거에 되게 감사해하잖아요. 나이 들면 더 그러죠. 그만두랄까봐 말하지 못한 게 많아요. 계속 일하게 해준 세무사님, 회계사님도 물론 고맙지만, 이젠 내 권리를 얘기해야 해요. 말하고 싶은 거, 불만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얘기를 나는 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별로 없는 게 아니라 진짜 안 해봤어요. ‘세무사님, 회계사님, 이거 바꿔주세요’ 그런 내 의견요. ‘나는 일요일까지 나오는 건 무리다’ 그런 얘기요. 연봉 협상할 때도 안 해봤어요. 그만두랄까봐. 그러면 다른 데 가서 개척해야 하니까 말 못 하고 속으로 삭이는 거죠. 근데 그러지 말고, 자기 의견을 얘기하면 좋겠어요. 여자든 남자든 모든 직장인이요. 그래야 회사에 더 애착을 갖고 더 열심히 하거든요. 내가 나이 먹어선가, 말해보니까 무시하지 않고 허용될 때가 있어요.”
세무회계로 ‘주는 사람’
수진씨는 곧잘 누군가를 돕는다. 그것도 세무회계 업무로. 아이 학교 친구 엄마가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로 취업해 일하면서 모르는 게 있을 때 저녁 퇴근 뒤나 주말에 시간을 내어 일을 가르쳐주었다. 그 도움받은 이가 말하길 “언니는 내 것을 혼자 쥐지 않고 남에게 기쁜 마음으로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엄마들이 다시 직장 잡을 때, 판매직 아니면 작은 회사에 경리로 많이 가요. 내가 이쪽 일 하는 걸 아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연락해요. 전화로 해결 안 되면 직접 만나요. 고객 업체에도 경리가 새로 오면 찾아가 차 한잔 마시면서 얘기해요. 내가 그 회사나 사장님을 더 잘 아니까요. 돕는다기보다 매뉴얼을 공유하면 내 일이 수월해지죠. 아이들 키울 때 남편과 둘이 시간 맞춰 최대한 우리가 돌보려 애썼지만, 어려울 때는 언니들, 친구 어머님, 아랫집 이웃 언니,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 급식 선생님한테 나도 다 도움받았거든요.”
그 옛날 고3 2학기 10월, 교실에는 수진씨를 포함해 학생이 얼마 없었다. 1학기 초부터 선생님은 얼른 취업 나가라고 재촉했다. 수진씨는 진학하고 싶어 교실에서 갈등했다. 연로한 엄마에게도, 일찍 생계에 뛰어든 언니들에게도 미안해, 마음을 접고 직장인이 된 지 33년, 그 시간을 지나온 자신에게 한마디 해주라고 했다.
“나한테요? 참,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죠. 잘 참고 지금까지 다녔으니까요. 너 고생했다. 하하하.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 갑자기 눈물 날라 그런다. 그죠? 나한테 한 번도 고생했다, 뭐 이런 거 해본 적이 없네요. 갑자기 하려니까…. 30년을 되돌아보니까 더 그래요. 뭔 얘기를 할까. 30년 동안 잘했으니까 앞으로도 잘하겠지? 눈이 멀쩡하고 손발 멀쩡할 때 끝까지 한번 같이 가보자. 지나간 거는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저도 하고 싶은 거 참지 않고 막 하고 싶거든요. 지난해 동네 단체에서 무료로 하는 원예수업에 참여했다가 많이 바뀌었어요. 혼자 어디 선뜻 참여하기가 어려웠는데 갔어요. 되게 불안한 마음으로 쫄면서 첫날 참석했거든요.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몇 주 하는 동안 내 마음이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올해는 그 연장선에서 독서모임에도 참여해요.”
박수정 르포 작가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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