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빌라 10채중 4채가 위험… ‘깡통 전세 대란’ 경보
20일 오전 경기 동탄신도시의 에코스쿨삼거리 오피스텔·주상복합 밀집 지역. 최근 갭 투자(전세를 낀 매매)로 250채를 사들인 임대인 부부의 파산으로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세입자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이 일대 공인중개업소에는 “내가 사는 전셋집은 안전하냐”는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A 공인중개사는 “작년부터 전셋값이 급락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집주인이 많은데, 이런 일까지 터져 중개사들도 안절부절”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와 인천 미추홀구에서 빌라를 중심으로 발생했던 전세 사기와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오피스텔과 아파트로, 부산·울산 등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부산에서도 최근 오피스텔 110채, 20채를 각각 소유한 임대인들이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아 경찰이 수사 중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월별 보증금 미반환 사고 건수는 작년 8월 511건에서 지난 2월 1121건이 돼 갑절 이상으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보증 건수 대비 미반환 사고 발생 비율은 3.5%에서 6.9%로, 미반환 보증금은 1089억원에서 2542억원으로 늘었다. 정부가 작년 9월 ‘전세 사기’ 관련 범정부 대책을 발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불어나는 이유는 뭘까?
◇집값 급락에 전국에 깡통전세 속출
전세금을 반환받지 못하면 세입자는 집을 경매로 넘겨 보증금을 회수하면 된다. 그런데 피해가 발생한 주택은 전세금이 집값보다 높거나 선순위 저당권이 있어 전세금 회수가 불가능한 ‘깡통 전세주택’이다. 집값 하락으로 깡통전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국토부가 공개한 실거래를 기반으로 한국도시연구소가 계산한 전국 주택의 전세가율은 2020년 65.1%에서 2021년 75.8%, 2022년 90.6%까지 치솟았다. 고가 아파트가 많은 서울은 57.1%에 불과하지만, 빌라 등 저가 주택이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전세가율이 높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개별 단지별로 조사한 결과, 전세가율이 80%를 넘어 깡통전세가 우려되는 단지는 공동주택의 38%나 된다”고 말했다.
전세가율이 폭등한 직접적인 원인은 매매가 급락이다. 국토연구원은 최근 연구보고서를 통해 “전세 보증금 미반환 주택 비율이 가장 높은 시기는 2024년 상반기로 추정되며 매매가가 20% 하락할 경우, 전세를 끼고 매입한 주택의 40%가 보증금 미반환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임대차 3법 이후 빌라-오피스텔 전세화 가속됐다
빌라, 오피스텔은 ‘보증금 미반환 리스크’가 있어 전통적으로 월세 위주 시장이었다. 그런데 전셋값 폭등과 정부 전세 대출 확대 정책으로 빌라와 오피스텔이 월세에서 전세 시장으로 바뀌었다. 문재인 정부가 2020년 서민 주거 안정을 명분으로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 갱신 청구권 등 임대차 3법을 도입하자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2020년 서울 아파트 전세 가격(KB국민은행)이 12.25%, 2021년 11.36% 폭등했다. 아파트 매물 부족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젊은이와 서민층은 저렴한 빌라·오피스텔로 몰렸다. 정부의 전세 보증금 대출 확대로 빌라·오피스텔도 전세 계약이 대거 이뤄진다. 전세 자금 대출 잔액이 2017년 48조6000억원에서 2021년에 170조원까지 급증했다. 허윤경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시 정부의 보증보험 확대, 전세 대출 확대 정책 탓에 빌라에 월세가 아닌 전세로 입주한 사례도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는 전세보증금 반환보험을 요술방망이처럼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허점 투성이였다. 보증보험에 가입하려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아야 하는데, 입주 후에 선순위 채권이 설정돼 있어 보증 대상에서 제외돼 피해를 본 서민도 많다.
◇매매 전세 동반 하락에 ‘전세 폰지게임’ 파탄
전세가 폭등기에 유행했던 갭투자는 누군가가 더 높은 전세금, 더 높은 매매가를 끊임없이 지불하지 않으면 파탄나는 일종의 ‘폰지게임’이다. 고금리로 전세가와 매매가가 동반급락하면서 빌라왕과 같은 사기꾼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무자본 갭투자 파산도 속출하고 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2020~2022년 전세가격이 폭등하면서 아파트에 비해 매매가와 전셋값이 덜 오른 오피스텔을 수십채씩 사들이는 무자본 갭투자가 유행했다”면서 “전세와 매매가가 동반급락하면서 갭투자 파산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보증금 미반환 등으로 경매로 넘어가는 주택이 급증하고 있다. 경매 정보 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3월 아파트 경매 진행건수는 2450건으로 전월(1652건) 대비 48.3%, 전년 동월(1415건)에 비해 73.1% 증가했다. 감정 가격 대비 경매 낙찰 가격의 비율인 낙찰가율은 75.1%로, 전년 4월(97.9%)에 비해 급락했다.
◇방치했던 전세 리스크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매매가 하락에 따라 깡통전세가 전국적으로 급증하고 있어 보증금 미반환 사고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며 “정부가 사기 사건이 아니라 전세시장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근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2021~2022년 전세 폭등기에 맺었던 전세계약의 2년 만기가 도래하면서 전세금 미반환 사고가 급증할 수 있는 만큼,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면서 “일정 규모이상의 임대 사업자에 대해서는 보증금 상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체계 마련 등 전세 관련 제도의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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