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향수가 ‘슬램덩크’ 흥행 비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한겨레 2023. 4. 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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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CULTURE & BIZ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는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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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인기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이 계속되고 있다. 개봉 2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더니 2023년 3월5일 기준 누적 관객 수 381만 명을 기록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는 2017년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 <너의 이름은.>의 기록을 6년 만에 깼다. 끝까지 뚝심을 발휘하는 작품의 ‘북산고’ 농구팀처럼 포기하지 않는 저력을 보여준 덕이다. 시작은 조금 부진했다. 보통 개봉하는 주에 달성하는 박스 오피스 1위도 2월에 처음 기록했다. 이후 19일 연속 1위를 달리며 애니메이션으로는 이례적으로 장기 상영에 접어들었다.

돌아보면 지금의 40대 이상에게 농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열쇠다. 농구가 문화적 상징이던 시대에 등장한 만화 <슬램덩크>는 그 시절 청춘의 열정이 담긴 이야기로 X세대에게는 단순한 영화나 만화 이상의 집단 기억이다. 이런 원작을 영화로 만들어 당연하겠지만 개봉 전 마케팅의 주요 목표는 40대였다. 그러나 개봉 이후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X세대 문화에 열광?

극장판 개봉 한 달째인 2월1일 기준으로 연령별 예매 분포를 보면 30·40대가 70%에 이르렀다. 개봉 초기 예상대로 원작의 팬덤을 공유하는 30·40대 남성이 관객의 절대다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관람 후기가 인터넷 커뮤니티 등으로 전파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원작을 잘 모르는 10대와 20대의 유입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3월 초순 CGV 관객 통계를 보면 개봉 초반 10%에 불과하던 10·20대 MZ세대의 비중이 30% 이상으로 올라갔다. 특히 비중이 작았던 여성 관객의 유입이 늘어 최근에는 성비가 역전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여성 55.2%, 남성 44.8%로 나타났다. 원작의 추억을 가진 세대에나 영화의 매력이 작용하리라는 전문가의 예상을 깼다.

이렇게 유행이나 작품의 흥행이 세대를 넘어서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인기를 끈 ‘포켓몬 빵’이나 재조명된 1980년대 음악 장르 시티팝처럼 한 세대의 전유물로 간주하던 것들이 시간을 초월해 새로운 세대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현상이 요즘 심심찮게 나타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요즘 현상은 과거 문화와 유행 아이템이 복고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한때 ‘뉴트로’(뉴+레트로)라고 하던 현상과도 차이가 있다. 지금의 레트로는 그 내용물만 차용할 뿐 MZ세대가 새로 만드는 문화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 형식 가운데 로파이(Lo-Fi)라는 것이 있다. 음질을 일부러 떨어뜨려 오래된 레코드판(LP)이나 테이프에서 나오는 아날로그 음원 같은 분위기를 내는 것을 말한다. 최근 젊은층의 로파이 유행은 과거 기술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로파이로 제작한 음원이 ‘고음질과 다른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선호하면서 생겨났다. 이후 일부러 로파이로 만드는 음원도 나타났다. 예전에 널리 유행한 곡을 최신 일렉트로닉댄스뮤직( EDM)풍으로 ‘리믹스’한 음원도 젊은층에서 인기를 끈다.

원본 콘텐츠를 애초 제작 의도와 달리 자기 입맛에 맞게 소비하는 특성은 <슬램덩크>에서도 잘 나타난다. 추억에 열광하는 3040세대와 1020세대의 소비 코드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잘 만든 스포츠 애니메이션 또는 스포츠를 통한 남자들의 끈끈한 우정을 BL(보이즈 러브) 코드로 해석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복고 소비가 과거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대목이다. 단순히 복고를 불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전혀 새로운 포맷으로 바꿔 소비한다.

최근 유행하는 위스키 열풍도 젊은층의 이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위스키나 도수 높은 증류주 자체가 유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나와 있는 술을 재료로 다양한 오리지널 레시피에 따라 만들어 마신다. 이렇게 이전의 X세대 문화를 자기 취향에 맞는 레시피로 변형해 즐기는 것이 새로운 복고의 특징이다.

세대 간 단절

지금 중년에게 한 세대 위의 문화는 ‘낡은’ 것이다.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굳이 옛것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낡은 문화는 배제하고 새로운 것에만 집착했다. 과거를 따르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니었다. 생존과 안정을 추구하던 과거 세대보다 풍족한 생활을 한 그들은 나름의 세대 문화를 만들었다. 또 이들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젊음을 보냈다. 그런 면에서 X세대의 특징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두 영역을 넘나드는 데 있다.

이들의 세대 특성은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며 디지털만 경험한 세대에게 동질감과 함께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의 MZ식 복고 소비는 이런 이질감을 그들 방식으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인다. X세대의 문화양식이나 아날로그 경험을 빌려와 새로운 느낌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다양한 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모두를 아우른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하게 개인 취향에 따라 문화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MZ세대의 본모습인 셈이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7관왕에 오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한 장면. 워터홀컴퍼니 제공

그동안 사회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 등에서 다루는 ‘세대’는 사회 구성원이 속한 코호트(공통적 특성을 가진 집단)로 다른 세대와 분리되는 고유의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세대 분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이론은 1929년 헝가리 태생의 독일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의 저서 <세대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비슷한 시기를 산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가치관은 그들이 청소년기에 겪은 사건이나 사고 등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사회 주류로 성장했을 때 그들의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가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세대 특성’이라 부르는 공통적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76살 이상인 ‘침묵의 세대’와 50대 후반~70대 베이비붐 세대의 집단 기억에는 전쟁이나 냉전 같은 역사적 사건이 많았다. 이 세대는 불확실성이 큰 환경에서 살았기에 안정, 평화, 생존 등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이 이론은 설명한다. 그에 비해 X세대는 특별한 사건이 많지 않아 역사적 사건보다는 문화현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가치관을 형성하는 요소에는 당시 사회 분위기나 교육 방식도 있지만, 그들이 경험한 문화나 콘텐츠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간주한다.

청소년기를 아날로그로 보낸 X세대와 디지털 세계에서 산 MZ세대의 차이는 분명히 크고, 세대 분리 또는 단절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꼰대’나 ‘라떼는’이란 말처럼 기성세대를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표현이 젊은층에서 유행하는 것도 그런 세대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달라진 흥행 코드

그러나 이렇게 단절된 모습도 바뀌고 있다. 시티팝과 로파이 음원이 다시 유행하고 ‘아재들의 술’이던 위스키가 품절 사태를 빚는다. 대부분을 디지털로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오프라인으로 ‘오픈 런’을 하고 포켓몬 스티커를 사 모은다. 2023년 제95회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30년 전 유행했던 홍콩 영화의 액션과 오마주가 넘쳐난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정말 멋지게 만들어낸 액션이 아니라 주변의 도구나 온몸을 활용한 성룡식 ‘낡은 쿵후’에 젊은층이 열광한다.

<슬램덩크>와 <에브리씽…>의 흥행은 이제 문화의 흐름을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대 단절이 아니라 세대 간 문화코드 재생산 또는 취향의 전승이란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슬램덩크>는 시대를 잘 읽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젊은 관객을 위해 원작을 읽지 않아도 몰입할 수 있는 장치를 신경 써서 배치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세대를 아우르는 흥행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이전 세대보다 디지털에 익숙한 X세대와 MZ세대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문화를 만들고 소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세대보다 개인의 취향이 더 중요해지는 문화 흐름은 사업 현장도 바꿔놓을 전망이다. 이 흐름에 따라 실제 소비 계층을 세대, 나이, 성별로 구분하는 것이 점점 무의미해진다. 개인의 취향이나 공감대를 바탕으로 소비집단을 묶는 마케팅과 홍보 방식이 서서히 등장한다. 현재 많은 기업이 이런 흐름에 주목한다. 콘텐츠 제작 현장에서도 여러 세대의 공감을 끌어내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하는 다양성의 포용이 흥행작을 만드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조성된다. 그야말로 진정한 ‘취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 rabike04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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