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명산 안동‧예천 학가산] 퇴계가 즐겨오른 산, 학이 날아가는 산세

김재준 '한국유산기' 작가 2023. 4. 19.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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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 정상에서 바라본 학가산과 송신탑.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천주天柱는 하늘을 받쳐 무너지지 않도록 괴고 있는 상상의 기둥. 이름 때문인지 어떤 종교적 분위기 같은 천주 마을, 아침 9시 몇몇 노송 아래 등산로 입구다. 행정지명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 재품리, 재주와 인품을 갖춘 선비 마을이라 재품才品, 일제강점기에 놈 자者를 넣어 자품리者品里, 2017년 다시 재품리才品里로 바꿨다.

학가산鶴駕山은 학이 날아가는 형상. 안동, 예천에 두 개의 정상 표석이 있다. 안동 서후·북후면, 예천 보문면 일대에 걸쳐 있고 주봉인 국사봉(882m)은 '학의 머리, 학을 탄 신선'이라 알려졌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먼산 주름이 울쑥불쑥 막힘없이 시원하다. 학가산 등산은 천주마을에서 주로 원점회귀 산행, 대략 5.8km, 3시간 넘게 걸린다. 최단 거리는 안동 북후면 신전리 쪽으로 좁은 찻길이 나 있는데 송신탑 밑에까지 갈 수 있다. 예천이나 영주에서는 당재, 학가산자연휴양림 방면에서 오른다.

천주마을에서 국사봉까지 2km 남짓 거리, 산마을에 햇살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데 닭울음, 산비둘기 소리 이내 안개 속에 묻혀버렸다. 소나무 노송에 걸린 형형색색 등산 리본이 당산목의 물색같이 보이고 산꼭대기 우뚝 선 송신 철탑을 바라보며 오른다. 진달래·철쭉·산벚·신갈·소나무 나뭇잎 떨어진 산길에 서리 내려 하얗게 얼었는데 햇살을 머금은 나뭇잎 밟으니 푹신푹신하다. 20분 정도 오르니 열댓이 앉을 수 있는 널찍한 마당바위(천주마을 0.4km·국사봉 1.8km)가 있다. 올라갈수록 어제까지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어 미끄럽다.

천주마을 등산로 입구.

설중송백 봄날의 눈길

산성 터, 약수터, 절벽의 낭떠러지, 석벽에 걸린 노송은 줄기와 가지마다 눈을 털지 못하고 굽어 있지만 가히 소나무가 설중군자雪中君子, 높고 곧은 설중송백雪中松柏의 절개를 생각나게 한다. 입춘 지난 봄날의 마지막 눈 구경이라 여기며 미끄러운 바위와 눈길 바득거리며 오르는데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올라오면서 몇 군데 바위 지대 돌을 쌓은 흔적을 봤는데 마을 뒷산이 성터, 9시 50분, 동학가산성東鶴駕山城에 닿는다. 산성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공민왕이 난리를 피해 안동으로 왔을 것이라는 추측뿐이다. 바위에 걸린 밧줄을 잡고 오르자 소나무와 어우러진 눈길, 뽀드득뽀드득 밟히는 소리가 정겹다. 산꼭대기 올라갈수록 눈이 더 많다.

10분 더 올라 바위길 위험한 구간 얼어붙은 길 밧줄 잡고 바위 전망대 오르니 탁 트였다. 건너편 천등산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그 위에 떠 있다. 눈, 소나무, 바위, 산마을. 뒤로 보니 방송안테나 시설, 국사봉 정상이 선명하다. 10시 10분, 송신건물에는 철조망을 둘러쳤는데 산길은 곧바로 시설 진입도로(신선바위 1.4·난가대·학서대 0.8·국사봉 0.5km), 왼쪽 '당재'와 이어진다. 철탑의 위용에 압도당한 나무들이 눈바람에 더 작아졌다. 지난해 가을 북후면 방면으로 자동차로 올라왔던 포장길, 뒤돌아보니 안테나 꼭대기에 겨울 해가 아슬아슬 달렸다.

학가산 정상 국사봉.

철탑은 하늘까지 점령하고 있다. 철계단을 올라 바로 유선봉, 오른쪽 삼모봉, 왼쪽이 국사봉이다. 정상 부근에 눈이 하얗게 덮였다. 발자국 한 개 없는 눈길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물 자국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첫 발자국 드리운 것이 더욱 조심스럽다. 눈에 묻혀 어느 곳이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몇몇 발자국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국사봉과 독야청청의 상징

하나둘씩 밟아 서른두 개 철계단, 가쁜 숨 몰아쉬니 동서로 길쭉한 너럭바위 꼭대기 넓어서 끝없는 일방무제一望無際 하늘 위에 오른 기분이다. 산 아래 마을이 천주天柱, 여기는 천상天上이 아닌가? 산 이름대로 학이 되어 날아갈 듯. 주변에는 언뜻언뜻 비슷한 너덧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학가산 정상, 해발 882m 국사봉國祠峯은 나라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큰 인물이나 충신이 나온 곳도 국사봉으로 불렸는데 전국에 138개 정도 된다.

굽어보니 저 멀리 유려한 낙동강이 흐르고 북쪽 너머 내성천이 휘돌아간다. 왼쪽 천등산, 복지봉, 흐릿한 검무산 아래 경북도청 이전지, 오른쪽 보문산, 뒤로 영주의 소백산 자락, 봉화 쪽 백두대간, 영양·청송 너머 동남방으로 낙동정맥 병풍처럼 둘러친 수많은 산이 눈에 들어온다. 발치에는 바위와 어우러진 참나무 소나무의 낙락장송. 학가산은 육산肉山 같은 골산骨山으로 독야청청獨也靑靑, 인걸은 지령이라 이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선열이 독립운동에 몸 바친 것으로 알려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만주 항일운동가 김동삼, 저항시인 이육사 등 포상자만 380여 명 넘는다고 한다.

어풍대.

10시 반 지나 정상을 두고 내려서니 왼쪽으로 당재, 오른쪽이 삼모봉, 바로 아래 애련암, 능인굴 방향. 우리는 예천 방면으로 곧장 나아간다. 눈 덮인 산길에 발을 디뎌보지만 발목이 푹푹 빠지고 왼쪽 산 밑에서 불어오는 눈바람은 귀를 때리며 얼게 만든다. 소형안테나 시설을 지나자 눈 위에 고라니, 살쾡이, 멧돼지 발자국까지 선명하다. 엄동설한에 먹이 찾으러 다니다 얼어 죽지 않았는지.

10시 45분 학가산 국사봉國祠峯이 또 있다. 882m 표지석 뒤를 보니 보문면 친목단체에서 세운 듯. 이곳이 예천 학가산인데 두 지역 간 양보하지 못한 자존심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학가산은 안동·예천·영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신령스러운 산이지만 지역마다 서로 다르게 부른다. 예천에서는 부자가 많아 시루봉, 인물을 닮아 인물봉으로, 영주는 선비의 고장 선비봉이라 부르고, 안동은 학자가 많아 문필봉, 울퉁불퉁해서 문둥이봉으로도 불린다. 백두대간에서 흘러온 문수지맥의 주산으로 안동과 예천의 배산背山이자 진산鎭山, 영주의 안산案山으로 고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경계가 없는 삶과 문화 그 자체라고 여긴다.

예천 학가산 국사봉.

바로 앞에 바람을 길들인다는 어풍대御風臺 너럭바위에 돌이끼가 악착스레 붙어 있다. 올라서니 사방이 발아래 있다. 바람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바람에 길들겠다. 흰 것은 눈이요, 검은 건 산이라, 골골이 운무가 피어오르는데 물안개, 눈안개 어룽어룽 희뿌예서 장관이니 어찌 시문이 나오지 않겠는가? 학가산은 농암·퇴계·학봉·청음 등 여러 문인이 산을 돌아다니며 유산遊山을 즐긴 곳으로 알려졌다. 산기슭마다 산수山水 문학의 자취가 스며들었을 것이다.

상사바위 전설과 봄기운

11시경 정상에서 상사바위 내려가는 능선. 서학가산성西鶴駕山城 터에는 안내판이 비스듬하게 섰다. 무덤 몇 개를 지나자 바위들과 노린재·신갈나무, 당단풍나무는 저마다 잎이 안쪽으로 말렸는데 눈바람 거센 북풍한설에 주먹을 꼭 쥔 듯 섰다.

묘지 갈림길에서 정상은 등 뒤에 두고 '느리터(느르치)'로 내려간다. 오른쪽은 휴양림 임도 가는 길인데 하얗게 눈 덮인 곳이 평지처럼 보인다. 아름드리 참나무숲에 서니 마치 성곽처럼, 병풍처럼 일어선 바위가 이국의 풍경으로 우뚝하다. '당재' 내려가는 길은 왼쪽에 두고 상사바위 이정표를 따라 10분 더 걸어간다. 밀림 속 유적지를 방불케 하는 숨어 있는 암자 터 지나자 아득한 낭떠러지 상사바위. 상사병에 걸려 죽어서도 고사목으로 환생한 것인지 홀로 바위에 섰다. 예천 보문 산성마을 연기는 발아래서 피어오르고 개 짖는 소리, 바람 소리뿐, 너덜겅 너머 다랑이 돌서덜밭, 불룩불룩 둔덕은 눈에 파묻혔다.

탐험하듯 한참 두리번 살펴보다 '당재'로 내려가는 길 11시 15분. 뒤섞인 낙엽과 눈에 미끄러워 몇 번씩 넘어지고 등산화는 젖어 발끝이 시리다. 잠시 걷다 바위에 서서 신발에 붙은 눈을 자꾸 털어보지만 시리긴 매한가지. 그나마 눈 녹아 흘러내린 물을 머금은 바위의 돌이끼는 한층 생기가 돈다.

바위 아래 산성마을.

그 옛날 얼마나 많은 가슴앓이 하다 떨어졌기에 상사바위라 했을까? 사랑이 얽힌 전설이 있는 바위다. 이곳의 상사바위는 "시집가지 않고 봉양하며 살다 부모가 돌아가니 불효를 탄식하고 떨어져 죽었다는 것"과 "절집의 사내를 흠모하던 댕기 머리 처녀가 바위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얼마나 많이 희생됐을까? 대의명분과 신분적 한계에 부딪혀 인간 본성이 희생된 것으로 생각한다. 평민과 원님의 딸, 과부와 돌쇠, 홀아비와 소녀 등 경향 각지의 상사바위 전설은 무수히 많다.

내려가며 절터 못미처 옆으로 바위가 환하게 보이지만 음산한 터다. 어느덧 11시 35분 당재·느르치리·상사바위 갈림길, 거리 표시 없는 이정표를 두고 정오 무렵 당재(학가산(예천) 1.2·보문산 4.3·국사봉 2.5·천주마을 1.4·느르치리 0.4km)에 닿는다. 예천 방면에서 학가산 오르는 등산객 여럿 만나는데 벌써 하산길인지 묻는다.

봄기운 느껴지는 구불구불 시골길 걸으며 산 위를 올려다보니 지나온 눈길 산행이 믿기지 않을 만큼 햇살이 가득하다. 애련사 갈림길 근처에 개 짖는 소리 요란하고 대추나무 가지마다 손질한 흔적을 보니 봄이 온 것을 알겠다. 12시10분 천주사 지나 마을 가까이 오니 안개 다 걷히고 해가 나왔지만 온통 부옇다. 3시간 넘게 걸린 시간, 예상보다 이르다. 당재라? 당재堂峴는 천주·산성마을 잇는 작은 고개로 당집이나 서낭당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해 본다. 상사바위와 서낭당을 두고 묘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앞서가던 일행은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산행길잡이

천주마을 ~ 마당바위 ~ 동학가산성 ~ 전망바위 ~ 송신탑 아래 이정표 ~ 삼모봉 ~ 유선봉 ~ 학가산 정상 국사봉 ~ 예천 학가산 정상, 어풍대 ~ 상사바위 절터 ~ 느르치리 갈림길 ~ 당재 ~ 천주마을

※ 원점회귀 눈길 산행 약 5.8㎞, 3시간 20분 정도 걸림(바위길 위험 구간 많음)

교통

고속도로

중앙고속 서안동IC → 34번국도 풍산·예천 방향 3㎞ 정도 → 상리교 오른쪽 창풍, 광흥사 이정표 따라 약 6㎞ 진행 → 창풍리, 광흥사 통과 → 천주마을 등산로 입구

대중교통

천주마을 가는 시내버스 있지만 불편.

※ 내비게이션 → 안동시 서후면 재품천주길 301-5(근처)

숙식

경북도청 신도시, 안동 시내, 예천 읍내 숙식 가능, 다양한 식당과 호텔, 모텔 등이 있음.

주변 볼거리

병산서원, 하회마을, 소산마을, 봉정사, 광흥사, 회룡포, 선몽대, 경상북도청 등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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