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플루이드 시대, 잘나가는 남자들은 스커트를 입는다

안미은 패션칼럼니스트 2023. 4. 19. 03: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올해 남성복과 여성복 간극 더 좁혀져
관능-도발적인 남성 스커트룩 선보여
스트리트 룩에선 용기 필요한 파격
“에이프런 방식 등 가벼운 시도 추천”
런웨이에 오른 남성복 브랜드들의 과감한 스커트룩. 리넨 소재의 스커트 셋업으로 편안한 옷차림을 연출한 발망. 발망 제공
젠더리스(Genderless),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 요즘 패션계의 화두는 성에 중립기어를 박아두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따지지 않고 그저 ‘나다움’을 외치는 유연성과 자유로움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 이미 여성들은 여성해방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부터 어깨선을 강조한 테일러링 슈트와 보이 프렌드 피트의 재킷, 점프 슈트, 트렁크 쇼츠 같은 남성복의 요소를 여성복에 차용해 왔다.

반면 남성복은 꽤나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해 온 편이다. 당장 몇 시즌 전만 해도 꽃무늬 리본 블라우스에 높은 굽의 힐을 신고 런웨이에 오른 구찌의 남성 모델들을 보며 패션 관계자들조차 소수의 패션 괴짜들을 위한 쇼 정도로 여겼으니까. 그러나 젠더 플루이드가 패션뿐만 아니라 뷰티와 라이프 스타일 영역 등 문화 산업 전반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점차 남성복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이 젠더 플루이드라는 화두를 남성복에 던져본 것이었다면, 이번 시즌은 더욱 과감한 시도와 함께 여성복과 남성복의 간극이 좁혀졌다. 눈여겨봐야 할 아이템은 바로 스커트. 톰 브라운, 드리스반노튼, 발망, 마린세르, 질샌더 등을 필두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 어느 때보다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남성들의 스커트 신을 연출하고 나섰다.

런웨이에 오른 남성복 브랜드들의 과감한 스커트룩. 다양한 실루엣의 남성 스커트룩을 등장시킨 톰 브라운. 톰 브라운 제공
매 시즌 업그레이드된 스커트 룩을 선보이는 톰 브라운은 런웨이에 다양한 기장과 실루엣의 스커트를 입은 남성 모델을 등장시켰고, 쇼 말미에는 남성 속옷인 작스트랩(Jockstrap)에 로 라이즈를 접목한 엉덩이 라인이 훤히 드러나는 파격적인 스커트 룩으로 쐐기를 박았다.

런웨이에 오른 남성복 브랜드들의 과감한 스커트룩. 허리를 조인 미디스커트를 선보인 드리스반노튼. 드리스반노튼 제공
그런가 하면 코르셋처럼 허리를 조이는 미디 스커트로 관심을 끈 드리스반노튼은 포멀한 셔츠와 팬츠에 로퍼를 매치하는 식의 단정한 스타일링으로 스커트를 남성의 몸에 거부감 없이 녹여냈다. 그야말로 젠지(Gen-Z)들의 추종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마린세르, 에곤랩, 엠부쉬 등은 스커트 팬츠라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남성용 스커트의 진입 장벽을 낮췄다.

젠더 플루이드라는 거대한 흐름은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마저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다. 지난해 첫 내한 공연을 펼친 가수 겸 배우 해리 스타일스는 지금껏 공개된 여러 화보와 시상식, 공연 의상에서 스커트는 물론이고 시스루 블라우스와 드레스 같은 여성적인 아이템을 활용한 젠더리스 패션을 선보이며 이슈 메이커가 됐다.

패션업계 역시 젠더 플루이드 트렌드에 현명하게 대응하는 중이다. 삼성물산, 신세계인터내셔날, 한성 등 국내 메이저 패션 기업들은 2023 S/S 주요 남성 패션 트렌드 키워드로 젠더 플루이드를 꼽으며 여성성이 반영된 남성용 의류와 액세서리를 앞다투어 선보이고 있다. 특히 삼성물산에서 전개하는 남성복 브랜드 갤럭시는 K패션의 선두주자인 디자이너 브랜드 강혁과의 협업을 통해 여성복의 실루엣을 적극 수용한 우아한 테일러드 슈트를 발표하며 기대를 모았다. 요가복으로 유명한 애슬레저 브랜드 젝시믹스는 2020년 젝시믹스 맨즈 라인을 론칭하며 여성의 전유물이던 레깅스를 남성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며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스커트를 입은 남성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올까. 스타일리스트 박선용은 “패션하우스에서 스커트는 오랜 열망의 대상이자 깨고 싶은 편견의 틀이었다”며 “올여름 선뜻 스커트를 집어 드는 용기 있는 남성들이 분명 있겠으나 대중의 선택을 받기에는 천천히 시간을 갖고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서 “스커트 입문자라면 디스퀘어드의 2023 스프링 컬렉션에서처럼 먼저 에이프런이나 가벼운 아우터를 허리에 묶는 방식으로 스커트 차림을 연출해 볼 것”을 추천했다. 젠더 플루이드 패션은 이제 겨우 대중화 초입 단계에 와 있다. 만약 거리에서 스커트를 입은 남성을 보거든 별나거나 기괴하다는 부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취향과 선택을 존중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길 바란다. 언젠가는 남자친구, 남편, 남동생과 같은 옷장을 공유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테니까 말이다.

안미은 패션칼럼니스트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