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나가자” 그 배에서 못했던 한마디…응급구조사 된 이유

이문영 2023. 4. 1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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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세월호 참사][토요판] 커버스토리
세월호 9주기…그가 살리려는 이유
장애진씨가 지난 8일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단원고 4·16기억교실’ 2학년 1반에 앉아 있다. 참사 당시 구조되지 못한 친구들의 빈 자리가 꽃과 함께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와 생존 친구들은 배에서 구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탈출해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뛰어야 다시 뛰게 할 수 있었다.

119구급대원들이 응급실로 이동침대를 밀며 들어왔다. 심정지 환자였다. 대원들이 환자의 가슴을 압박하고 입에 산소를 흘려 넣으며 뛰었다. 연락을 받고 대기하던 응급실 의료진이 환자를 인계받아 뛰었다. 의사도 뛰었고, 간호사도 뛰었고, 기계들도 따라 뛰었다. 응급구조사 애진(26)도 뛰었다.

“대부도(경기 안산시 단원구)에서 발생한 사고”라고 구급대는 전했다. 환자는 4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수심이 얕은 펜션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심장이 멈춰 있었다.

애진이 루카스(Lucas·자동흉부압박기) 아래 눕혀진 환자의 상의를 가위로 잘랐다. 심장 리듬과 맥박을 확인했다. 심전도에서 리듬은 보였지만 맥박이 없었다. ‘무맥성 전기활동’(PEA·pulseless electrical activity)이었다. 의사가 기관내삽관을 했다. 애진이 옆에서 어시(어시스트)했다. 의사가 기도를 확보하며 간호사에게 구두 오더를 내렸다. 간호사가 환자의 혈관을 잡고 에피네프린(심정지 대응 응급약물)을 투여했다. 애진은 루카스의 심장 압박을 주시하며 손으로 앰부 백(AMBU bag·수동식 인공호흡기)을 짰다. 심폐소생술(CPR)은 긴박하되 오차 없이 움직여야 했다. 생명은 한순간의 방심만으로도 소멸할 수 있었지만 멀어지는 생명의 끄트머리를 붙잡으려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살리는 전쟁이 날마다 응급실에서 벌어졌다.

남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뛰는 심장을 확인하며 애진의 심장도 뛰었다. 애진은 안도하면서도 걱정했다. 되돌아온 박동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박동이 돌아왔다고 삶까지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심정지의 골든타임은 4분이었다. 대부도엔 시피알 장비를 갖춘 병원이 없었다. 애진의 병원으로 옮겨지는 데만 20~30분이 걸렸다. 충돌로 목이 골절됐고 신경도 손상돼 있었다. 생존하더라도 회복되긴 힘들 것이란 생각으로 애진은 안타까웠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인 장애진씨는 2019년 2월 응급구조사 자격증 1급을 취득한 뒤 현재 수도권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일을 마치고 나온 그가 자신이 근무하는 응급의료센터 앞에 섰다. 이날 그는 2명의 심정지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응급실에선 시간도 뛰어다녔다. 날 서 있던 공기가 한풀 가라앉았을 땐 이미 한밤중이 돼 있었다.

“이태원에서 큰일이 났대.”

간호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믿기지 않는 영상들이 돌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자이크도 입지 못한 모습으로 도로 위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었다. 시피알을 끝내자마자 애진은 처음 보는 집단 시피알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 거리 전체가 거대한 응급실이었다. 잠깐은 영화의 한 장면일 거라 짐작했고, 다음엔 외국에서 벌어진 일인 줄 알았다.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낯설지 않았다. 그날 애진이 응급실에 있었던 것도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9년 전 그 현실’ 때문이었다.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날(지난해 10월29일) 위로 생중계 카메라 저편에서 배가 침몰하던 그날(2014년 4월16일)이 겹쳐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으로 진도 바다의 거센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다.

시피알 뒤 목격한 집단 시피알

살아남았지만 구조되진 못했다.

“가만히 있으세요.”

선내 방송에서 그 소리가 들렸을 땐 몸이 배 한쪽으로 쓸려 내려간 뒤였다. 애진은 배의 꼬리 쪽 4층 다인실(SP-1)에서 2학년 1반 친구들 사이에 누워 있었다. 처음 가는 제주였다. 맑고 푸른 바다에 친구들과 있으면 뭘 하든 신날 것 같았다. 음악 수행평가로 노래 연습을 하고 있을 때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느 대목에선가 기억이 끊겼다.

구명조끼를 찾아 입은 친구들이 뒤섞인 휴대폰을 서로 찾아주고 있었다. 각자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진도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는 “갑판으로 나가라”고 했다는데 애진은 기억나지 않았다.

군데군데 기억의 공백이 있었다.

벽이 바닥이 돼 있었다. 칸막이 역할을 하던 캐비닛들도 쓰러져 있었다. 창밖에선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고 못 보던 배들이 눈에 띄었다. 물이 종아리로 차올랐다. 애진이 울었다. 친구들이 달랬다. 친구들도 울었다. 애진이 달랬다.

충격이 기억의 마디마디를 잘라냈을 수도 있었다.

배가 완전히 옆으로 누워 있었다. 객실 출입구는 머리 위로 가 있었다. 밟고 선 캐비닛 상단까지 물이 차 있었다. 먼저 빠져나간 친구가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애진이 친구의 손을 잡고 출입구 밖으로 몸을 끌어올렸다. 친구들과 복도 벽을 밟고 비상구까지 갔다. 해경이 뛰어내리라고 소리쳤다. 거대한 배도 삼키는 무서운 바다였다. 망설이고 있을 때 파도가 들이쳤다. 애진은 버텨냈지만 쓸려나간 친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뛰어내릴 것도 없었다. 발 앞이 바다였다. 애진은 바다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는 배 안에서 꺼내지는 대신 스스로 빠져나왔다. 걸어들어간 바다에서 건져졌을 뿐이었다. 그것을 ‘구조’라 부를 순 없다고 애진과 생존한 친구들은 믿었다. 그들은 구조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탈출’했다.

비어 있는 기억들 사이에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었다.

비상구를 향해 복도를 통과하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친구들을 지나치며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복도에 남아 있던 친구들에게 ‘그 말’을 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애진을 오래 괴롭혔다. 세월호 탈출 뒤 애진은 한동안 배에서 탈출하는 꿈을 자주 꿨다. 배들은 계속 침몰했고, 애진은 계속 탈출했는데, 배는 세월호가 아니었다. 꿈에서도 애진은 구조되지 못해 탈출했고, ‘그 말’을 받아줄 친구들이 그 배엔 없었다.

가위에 눌려 몸이 굳은 날이 있었다.

꿈에서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몇 시간 전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은 환자였다. 응급실에서 그를 봤을 때도 애진은 몸이 굳었었다. 복수가 가득 차 있었다. 선배 의료진의 심폐소생술을 대학교 응급구조학과 2학년 학생 애진은 몸을 떨며 지켜봤다. 시피알로 심장이 살아났던 환자가 그날 밤 애진의 꿈에 나타났다. 꿈에서 깰 때까지 애진은 가위에 쫓겨 다녔다. 이튿날 병원에 출근했을 때 환자 보호자를 급히 찾는 원내 방송이 들렸다. 그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잠시 뒤 전해졌다.

그는 애진이 첫 병원 실습(2017년)에서 만난 첫 심정지 환자였다. 그가 꿈속까지 찾아와 남기고 간 그 감각을 애진은 잊지 않았다. 그 바다를 겪지 않았더라도 죽음 앞에서 몸이 굳고 떨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애진이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공포와 추위로 몸이 굳고 떨렸던 그 바다에서의 참사 때문이었다.

서거차도(전남 진도군 조도면)에서 애진이 굳은 몸으로 떨고 있을 때였다. 바다에서 건져져 섬으로 옮겨진 애진은 한 주민의 집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처음 본 섬 주민들이 생존자들을 집으로 데려가 옷과 담요를 내줬다. 속을 덥힐 국물도 끓여냈다.

“전원 구조.”

생방송 뉴스에 깔린 자막을 애진은 그때 봤다. 그 자막이 뜰 만한 구조 활동이었는지엔 의구심이 있었지만 애진은 마음을 다해 그 자막이 사실이길 바랐다. 당시 애진은 섬에서 생존자들을 치료하는 응급구조사를 눈에 담고 있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발목을 다친 친구에게 응급처치를 해주던 구조사가 있었다. 그의 모습이 애진에게 깊이 남았다. 애진이 생존자들과 진도로 이동하고 있을 때 속보가 정반대의 자막을 띄웠다.

“실종자 증가.”

배가 뒤집히듯 순식간에 뒤집힌 사실이 애진은 납득되지 않았다. 사실이 뒤집혔을 때 진실은 어디에서 건져 올려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친구들이 구조되지 못한 까닭을 찾아가는 동안 애진은 섬에서 본 응급구조사들을 자주 떠올렸다. 초기 대응만 제대로 됐어도 친구들은 살아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의 진로를 바꿨다. 진학하고 싶었던 유아교육학과 대신 응급구조학과를 선택했다. 애진에게 응급구조사는 생명의 위기 상황에서 ‘초기 대응을 하는 사람’이었다. 소중한 친구들을 잃은 그는 다신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2019년 2월 애진이 종이 한 장을 손에 쥐었다.

“제1급 응급구조사 자격증. 성명 장애진. 생년월일 1997년 ○월○일. 근거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36조. 위와 같이 자격을 인정합니다. 보건복지부 장관.”

그 배에서 구조되지 못했던 애진은 그렇게 구조하는 사람이 됐다. 탈출 5년 만이었다. 생사가 나뉘는 맨 앞자리에서 멈춰 선 심장들과 대면했다. 애진이 심폐소생술을 할 때마다 오른쪽 손목에서 ‘노란 리본’(타투)이 함께 움직였다.

지난 4월8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9주기 시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책임자 처벌과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권고 이행 등을 촉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심장에게 묻는 안부

“또 심정지예요.”

애진이 병상으로 뛰어올랐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두 손을 포개 환자의 가슴을 압박했다.

구급차에 실려 온 80대 남성이었다. 도착했을 때 맥박은 있었지만 혈압이 잡히지 않았다. 곧바로 심정지가 왔다. 의료진이 심폐소생술 끝에 박동을 불러냈다. 심혈관내과에서 환자 초음파를 본 뒤 과로 올리자고 했다. 간호사가 약물처치를 준비하는 사이 심장이 다시 멈췄다. 루카스의 힘을 빌릴 틈도 없었다. 환자 위에서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애진의 호흡에도 힘이 들어갔다.

생사는 단번에 결판나지 않았다. 살아났다가 정지했다가를 반복하는 심장들이 있었다. 멈추고, 뛰고, 또 멈췄던 그의 심장은 다행히도 다시 뛰어줬다. 숨이 있는 상태에서 담당 과로 인계된 뒤에야 애진도 숨을 돌렸다.

응급실에선 사투가 일상이었다. 그날(지난 6일)은 평소보다 적은 2명의 심정지 환자가 응급실로 왔다. 환자의 많고 적음이 사투의 격렬함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60대 남성이 몇 시간 앞서 루카스에 누웠다. 그는 스스로 심장을 정지시켰다. 눈으로도 사망 상태를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병원에 왔다. 숨이 끊긴 뒤 시간도 꽤 흐른 것 같았다. 얼굴색은 이미 파랗게 변해 있었고 목에 남은 삭흔도 너무 진했다. 살아날 가망은 없어 보였지만 의료진은 시피알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명을 포기하는 일은 그들의 역할이 아니었다.

졸업 뒤 애진은 병원에서 응급구조사 일을 시작했다. 119구급대에서 일하려면 병원 경력 2년이 필요했다. 자격은 벌써 채웠지만 시피알 뒤 예후까지 볼 수 있는 병원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애진은 응급의료센터에서 데이·이브닝·나이트 3교대로 일한다. 출근하면 시피알룸을 돌면서 부족한 물품들을 채운다. 응급 상황에서 꼭 필요한 물품이 없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구급대로부터 환자를 인계받고 위급한 순서로 등급을 매기는 일도 응급구조사의 역할이다. 심정지 환자일 경우 루카스를 적용하고, 의사의 기관내삽관을 지원한다. 심장 리듬을 확인하고, 앰부 백을 짜 호흡을 돕는다. 환자가 사망했을 땐 몸에 묻은 혈액을 닦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정리한다. 날마다 이 절차를 되풀이하는 동안 어떤 사람은 구했고 어떤 사람은 구하지 못했다. 구한 사람에게도, 구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기억돼야 할 이야기들은 있었다.

2018년 4월 경기도 안산소방서에서 실습 중이던 장애진(당시 대학 응급구조학과 3학년)씨는 인근 식당에서 심정지로 쓰러진 시민을 소방관들과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 당시 함께 출동했던 소방관들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곽근홍 소방사, 장애진씨, 김혜현 소방교. 안산소방서 제공

“애진이가 먼저 해.”

구급반장이 아이겔(I-GEL·일회용 후두마스크)로 기도를 확보하며 지시했다. 사람이 숨을 못 쉰다는 전화가 안산소방서 119안전센터로 걸려 왔다. 구급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50대 여성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훈련한 대로만 하면 돼.”

현장에서 직접 하는 첫 시피알이었다. 소방서 실습 중이던 대학생 애진(2018년)은 수없이 연습했던 시피알을 실행했다. 긴장이 손의 움직임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집중했다. 함께 출동한 동료들과 번갈아 가며 가슴을 눌렀다.

몇 차례의 압박과 몇 사람의 간절함이 멈춘 심장으로 전해졌을까. 여성의 의식이 돌아왔다. 병원으로 이송된 뒤 차츰 회복했다. 배우자가 소방서로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애진이 처음 살린 사람이었다.

그가 쓰러진 식당은 애진의 집 근처에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던 식당 노동자였다. 그의 심장이 멈춘 과정까지 애진이 알 순 없었다. 각자의 바다는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었지만 어느 바다에서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는 일의 중요성을 애진은 실감했다. 정식 응급구조사가 돼 하루하루 그 실감을 쌓아갈 때마다 애진은 그렇지 못했던 그 바다를 원망했다.

그 바다에서 건져진 배(목포 신항만 거치 뒤인 2019년의 세월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애진은 울음을 터뜨렸다.

배를 보러 가기로 했을 때만 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 멀리서 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땐 그 배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진이 알고 있던 배보다 훨씬 컸다. 거대한 고철 덩어리였다. 배는 온통 녹슬어 그 바다를 새기고 있는데 배 뒤쪽으로 펼쳐진 바다는 너무 고요하고 잔잔했다. 배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갈 때마다 물밑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몸이 떨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앞에 로비가 있었다.

로비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탈출했던 객실이나 비상구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로비는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비에게 형태를 남겨준 바다가 로비를 가득 채웠던 웃음소리는 남겨두지 않았다. 애진의 귀엔 친구들의 웃음 대신 부식된 바닥을 걷는 자신의 발소리와 가빠지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참사 전날 밤 친구들은 그 로비에 모여 림보 게임을 했다. 기대와 생기가 생일 폭죽처럼 터졌다. 게임하는 친구들을 지켜보며 애진도 즐거웠다.

로비에서 민지(2반)와 민정(10반)을 만났을까.

만났을 테지만 기억은 없었다. 애진과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둘 다 중학교 때 친해졌다. 민지는 항상 애진을 먼저 챙겼고 아끼는 것 없이 나눠줬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속 깊은 민정은 늘 애진의 곁을 지켜줬다. 같이 찍은 사진이 민지 휴대폰에 있더라고 민지 아빠가 알려줬지만 애진에겐 그 사진을 찍은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친구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애진은 알지 못했다. 서거차도에서 나온 뒤 병원에 있을 때였다. 병원 텔레비전에서 친구들의 소식을 접했다. 뉴스에서 띄운 사망자 명단에 둘의 이름이 있었다.

이 세상에 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애진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보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슬픔은 훅하고 올라왔다. 민지와 민정은 따로따로 애진의 꿈에 왔다.

“어디 있었어?”

민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동안 어디 갔다 왔냐고?”

민지도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제 둘은 꿈으로도 잘 와주지 않았다. 치사하다고 느낄 때마다 애진은 속으로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민지야, 민정아, 안녕하니?

장애진씨가 지난해 4월16일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8주기 기억식에서 구조되지 못한 친구들에게 쓴 편지를 읽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응급실에서 확인하는 ‘목숨값’

“할아버지, 여기 어디예요?”

“여기가 어디요?”

심장을 살려낸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할 때가 있었다. 호흡을 되찾은 환자가 담당 과로 옮겨지면 응급구조사의 역할은 끝이 났다. 심정지 환자들은 날마다 실려 왔다.

“할아버지, 제 말 들리세요?”

“들리는 것 같은데.”

그 환자들의 삶과 죽음이 날마다 애진의 눈앞에서 결정됐다. 박동을 되찾은 환자들의 ‘응급실 밖 생사’까지 따라가기엔 맞이하는 환자들의 심장이 너무 위급했다.

“할아버지, 저 보이세요?”

“보이는 것 같은데.”

신장 투석 중 심정지가 온 할아버지였다. 응급실로 내려져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심장이 다시 뛰자 할아버지가 눈을 떴다. 일어나 애진의 질문에 답했다. 드문 일이어서 애진도 신기했다. 이 세계로 되돌아온 할아버지가 반가워 애진은 할아버지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내용은 뚜렷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안녕을 기원했던 마음은 지금까지도 애진의 가슴에 있었다. 환자들이 응급실에 머문 시간보다 그들의 ‘이야기’가 애진에게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살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는 있었다.

“폴다운(추락)이래.”

119의 연락을 받은 간호사가 전했다. “23층”이라고 했다. 23층짜리 건물에서 추락했다는 것인지, 23층에서 추락했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구급대는 “벽에 매달려 누수 보수를 하던 중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신체가 심하게 손상돼 응급실에 도착했다. 애진도 같이 시피알을 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응급구조사는 사건 이후를 수습하는 사람이었지만 애진은 사건이 발생한 원인에도 신경이 쓰였다. 최소한 2인 1조로 작업한다는 규정은 지켜졌는지 궁금했다. 응급실로 이송돼 오는 몸들을 보면 그들의 노동환경이 읽힐 때가 있었다. 사람마다 목숨값이 다르다는 사실을 애진은 그때마다 확인했다.

음식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다 심정지가 온 사람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끼였다고 했다. 응급센터에 왔을 땐 이미 사망한 뒤였다. 발견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봐서 애진은 혼자 작업하다 사고를 당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둘이서 했다면 곧바로 이송돼 목숨은 건졌을 수도 있었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사람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돼 있는지를 애진은 응급하게 실려 오는 몸들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규정이 무시됐을 때 가장 약한 생명들부터 희생되는 현실은 바다나 고공이나 다르지 않았다.

그 현실은 ‘히스토리 테이킹’(history taking·문진)만으론 파악되지 않았다. 심장을 되살리진 못하더라도 심장을 멈추게 한 상황과 그가 살아온 ‘스토리’를 상상해줄 순 있다고 애진은 생각했다. 서울 구의역 승강장에서 혼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와 도어 사이에 끼여 사망(2016년 5월28일)한 청년 노동자의 삶을 애진은 가끔 상상했다. 일터에서 구급차에 태워져야 했던 수많은 ‘부서진 몸들’의 시간을 상상했다. 심장이 멈췄다고 그들의 이야기까지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할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은 상상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기억에서조차 너무 빨리 지워졌다. 그들에겐 아직 이야기가 부족했다.

애진은 죽음에 무뎌질까 봐 두려웠다.

죽음을 일상으로 대하는 직업이었다. 일을 오래 하려면 슬픔에도 굳은살이 맺혀야겠지만 죽음을 보고도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헤치고 나와 그 죽음의 반복을 막으려고 응급구조사가 됐다는 사실을 애진은 잊지 않았다.

잊히게 둘 순 없었다.

그 마음으로 애진은 생존 학생들을 대표해 지난 시간 많은 활동을 해왔다. 참사 1000일 집회(2017년 1월7일) 때 첫 공개 발언을 한 뒤 해마다 돌아오는 ‘기억식’ 단상에서 추모글과 편지를 낭독했다. 언론 인터뷰도 요청이 오는 대로 거절하지 않고 했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진상규명 활동이 트라우마 치유”라고 말했다. 고통받은 유족과 친구들에 비해 트라우마가 덜한 것도 그래서일지 모른다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그 애진이 대학생 때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려고 연습하던 중이었다. 슈트와 오리발과 물안경을 착용하고 건너편까지 수영해서 갔다 오는 훈련이었다. 한참 헤엄치던 애진이 물밑을 내려다봤다. 깊고 깜깜했다. 애진은 수영을 멈추고 되돌아와 울었다. 영화를 볼 때도 깜깜한 바다가 나오면 울음이 나왔다. 깊고, 깜깜한, 바다. 그 이미지 뒤에 애진의 트라우마가 숨어 있었다.

그때도 기억이 끊겼었다.

머리 위로 올라간 출입구로 탈출하기 직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캐비닛 위에 혼자 서 있었다. 전기가 나간 객실은 깜깜했다. 캐비닛 위쪽까지 물이 기어올랐다. 애진은 깊고 깜깜한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혼자 갇혀 있는 공포를 느꼈다.

9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깜깜함은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진상규명 방해’ 의혹을 받았던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 대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1심 판결)과 참사 당시 해경 지휘부(김석균 전 청장 등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 2심 판결)가 지난 2월 차례로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 몇몇 여당 정치인들은 ‘비극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면서 세월호를 모욕·혐오하는 발언(지난해 12월10일 권성동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소비되다가 시민단체의 횡령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 주장 등)들을 쏟아냈다. ‘참사·희생자’란 용어 대신 ‘사고·사망자’를 사용하란 지시(지난해 10월30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결정)와 ‘놀러 가서 죽었는데 무슨 추모냐’는 댓글 안에서도 세월호의 거친 바다와 이태원의 좁은 골목은 만났다. 기억을 잘라내려는 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기억을 지켜낼 수 없었다.

지난해 10월31일 세월호 유족들이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에 차려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상상으로라도 하고 싶은 ‘그 말’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이태원 참사 직후 합동분향소(서울 용산구 녹사평역)에서 애진은 약속했다. 영정 액자에 뒤늦게 채워진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며 영정 속 세월호 친구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막 차려진 분향소를 지키며 눈물 흘리는 부모님들을 보며 오랜 시간 광화문 분향소를 지키며 오열했던 친구들의 부모님을 생각했다. 응급실에서 세상을 떠난 환자들과 애통해하는 그들의 보호자들을 생각했다.

“네 탓이 아니야.”

3년 전이었다. 심폐소생술 끝에 사망한 한 할머니의 유족들이 응급실 앞에서 울고 있었다. 옆을 지나던 애진은 고등학생 딸에게 엄마가 하는 말을 들었다. 전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는 빈소에 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렀다. 손녀가 집에 남아 할머니를 돌봤다. 공부를 하던 손녀가 할머니를 보러 갔을 때 방이 피로 가득했다. 피부에 달아둔 인공혈관을 할머니가 뽑으면서 대량 출혈이 발생했다. 손녀는 할머니의 죽음에 자책했다. 딸을 달래느라 그 역시 딸인 엄마는 이틀 사이 부모를 모두 잃은 아픔을 내색하지 못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에서 생존한 뒤 한달 보름 만(지난해 12월1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등학생의 마음을 애진은 이해했다. 살아남은 사람에겐 죄책감이 있었다. 애진과 세월호 생존자들도 ‘그 배에서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다. 구하지 못한 책임자들과 국가·사회가 가져야 할 그 감정을 구조되지 못해 스스로 탈출한 사람들이 짊어져 왔다. 그 죄책감으로 애진은 수없이 상상했다. 상상은 애진에게도 필요했다.

‘응급구조사 애진’이 타임 슬립해 2014년 4월16일의 그 배로 돌아간다. 깜깜한 객실에서 캐비닛을 밟고 머리 위의 출입구를 빠져나간다. 비상구를 향해 복도를 통과한다. 친구들을 지나치다 말고 뒤를 돌아본다. ‘그 말’을 한다.

“나가자.”

뒤에 남아 있던 친구들에게 하지 못해 오래 후회했던 그 말을 한다.

“가만히 있지 말고 나가자.”

어른들이 그때 그 한마디만 해줬어도 친구들이 배와 함께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으며 그 말을 한다. 그 말을 하는 데 응급구조 능력은 필요하지 않다.

“구하러 오길 기다리지 말고 같이 탈출하자.”

그 말을 하자마자 2023년 4월로 되돌아온다. 친구들이 부디 배를 빠져나왔기를 소망하며 애진이 뛴다. 코드블루!(심정지 환자 발생) 구해주길 기다리는 사람을 구하러 응급구조사 애진이 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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