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유배길] 화석이 된 슬픔을 거슬러 가는 길

신준범 2023. 4. 1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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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단종유배길 솔치재에서 청령포까지 47km 중 하이라이트를 걷다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고운 서강 곁을 걷는다. 왼쪽 바위벽 꼭대기가 선돌이다. 단종유배길은 길찾기나 걷기 난이도 면에서 산행에 가까운 모험적인 길이다.

하루쯤 왕방연이 되고 싶었다. 단종유배길을 걷는 마음이 그랬다. 1457년 6월이었다. 양력 8월이니, 땀이 줄줄 흐르는 날이었을 테다. 만 16세의 소년 왕, 세종대왕의 손자인 단종의 귀양길을 이끄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탄로 났을 때부터 단종의 죽음은 예정된 수순임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임을 모르지 않았다. 한양에서 영월 청령포까지 소년 왕을 호송한 왕방연은 배를 타고 나와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를 지어 읊었다.

청령포에 들어서면 아름드리 소나무의 무게감 있는 우아함에 압도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을 이별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아 있습니다 /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 가는구나'

어린 왕을 절벽과 강으로 둘러싸인 자연 감옥에 홀로 두고,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바라보았는데 강물 소리가 내 마음처럼 우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무슨 기이한 운명인지 4개월 후 겨울이 되었을 때 왕방연은 사약을 들고 영월을 찾았다. 삼촌인 세조가 조카인 단종에게 내리는 죽음의 명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단종이 죽던 순간의 기록은 분분하지만, <숙종실록>과 야사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단종의 발 앞에 엎드려 울기만 했다고 한다. 마침 옆에 있던 노비가 공을 세워 보겠다고 활줄을 풀어 단종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단종이 죽은 직후 노비는 눈, 코, 귀, 입 등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고 즉사했다고 한다.

유배길에 50여 명의 군졸과 일행이 목을 축였다는 어음정.

금부도사 왕방연은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뒤 관직을 그만 두고 지금의 서울 중랑구 봉화산 중랑천 가에 자리 잡고 살았다고 한다. 단종을 호송하면서 죄인에게 물 한모금도 주지 말라는 엄명을 지켜야 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속죄하는 마음에서 시를 쓰며 배나무를 키웠다. 봄이 되면 바람에 흩날리는 흰 배꽃에 단종의 넋이 들어 있다고 여겼던 그는 단종이 죽은 날이면 수확한 배를 바구니에 담아놓고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남은 생을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았던 그는 임종 시 자기를 영월 가는 길에 묻고 주변에는 배나무를 많이 심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후 왕방연이 심었던 배나무가 퍼지면서 중랑구 신내동 일대가 배밭으로 명성을 날려 '먹골배'가 유명하게 되었다는 속설이 있다.

배꽃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솔치재 바람은 차가웠다. 단종이 영월로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와 눈물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1코스 이름도 '통곡의 길'이다. 소나무가 많은 고개에서 단종유배길 1코스가 시작된다. 푸근한 인상의 13년차 문화해설가 김원식 선생을 만나 오늘의 목적지 청령포로 향한다.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야 닿는 청령포. 섬은 아니지만 뒤로 가파른 산이 옹벽을 이루고 있다.

김 해설사는 왕방연에 대해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단종을 향한 후대의 연민과 오해가 결합해 생겨났다는 것. 허나 조선시대 야사에 나올 정도면 비운의 왕을 향한 대중의 안타까움이 쌓여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겠냐는 추측이다.

찻길 구간은 차로 이동하고 명소와 하이라이트 위주로 걷기로 한다. 고개에서 다시 고개로, 고도를 높이던 길이 모처럼 산중턱 너른 터에 닿는다. 50여 명의 군졸과 일행이 물을 마시며 쉬었다는 어음정御飮井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우물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검은 우물의 깊이에 섬뜩함이 느껴진다. 어음정에서 좁은 산길이 손짓한다. 자연미 넘치는 산길은 짙은 침묵에 휩싸여 유배길의 무게를 간접 체험하게 한다.

참나무와 소나무 가지, 흙을 재료로 만든 주천강 섶다리

술이 솟는 샘이 만든 강, 주천강

한갓진 시골길을 따라 단종의 걸음은 영월 중심부로 향한다. 왕족이니 당연히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갔을 거라 추측할 수 있지만, 김 해설가는 "걸어갔을 것"이라 말한다. 사육신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몸이 찢겨 죽는 형벌을 당하고, 여인들은 노비로 팔려가고 자식들까지 목을 매어 죽인 것을 감안하면, 핵심 인물인 단종을 말이나 가마를 태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황이다.

역골 이정표가 있는 주천면의 주막에서 하룻밤 묵었다고 한다. 주막집에는 먼저 온 길손들이 있었는데 단종의 초라한 모습에 눈물 흘렸다고 한다.

단종의 발길은 강가에 이르는데 주천강酒泉江이다. 강가로 내려서니 '酒泉주천'이라 적힌 큰 표지석이 있고 옆에 샘터가 있다. 낙엽 쌓인 고인 물만 있어 마시기에 꺼려지나 오랜 전설이 있는 샘이다. 옛날 여기에 잔을 들이대면 술이 솟았다고 한다. 천민이 잔을 대면 탁주가 나오고 양반이 대면 청주가 흘러나왔는데, 양반 복장을 한 천민이 잔을 대자 탁주가 흘러나와 화가 난 그가 샘을 부숴버리자 그 이후 물만 흘러나와 강이 되었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군 태기산에서 시작해 영월까지 이어진 90km의 강 이름이 이 샘에서 유래했다.

단종이 석양을 향해 절을 했다는 배일치. 절하는 단종의 동상 앞에 성예진씨가 절을 하고 있다. 성예진씨는 2019년 만 23세의 나이로 백두대간 일시종주에 성공한 젊은 여성 등산인이다.

주천교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섶다리가 있다. '섶'이란 장작을 비롯해 잔가지와 잎새, 잡풀 같은 땔감을 통틀어 이르는 말. 주천강 섶다리는 굵직한 참나무로 세운 교각에 낙엽송 장대를 엮어 상판을 깔고 그 위에 솔가지와 흙을 덮어 만들었다. 삐뚤빼뚤 고르지 않은 교각과 다리 상판 양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잔가지며 나뭇잎이 이색적이다.

두 명이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인데 발 디딜 때마다 다리가 흔들리는 것이 재미있다. 농번기가 끝나고 강물이 얕아지는 10월경에 만들고 이듬해 여름 장마철에 강물이 불어나면 저절로 휩쓸려 내려가 사라지는 게 전통 방식. 하지만 주천면 섶다리는 미관상, 안전상의 이유로 장마가 오기 전 미리 철거한다.

옥녀봉을 지나 짧은 지류 강줄기를 건너면 선돌 방면으로 길이 이어진다.

임시다리라고 부실한 건 아니다. 주민들이며 관광객이 수없이 건너도 10개월을 거뜬히 버텨낸다. 다리 위에 올라 껑충 뛰어보면 출렁이는 걸 느낄 수 있지만 중장비를 동원해야 철거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었다. 겨울 주천강은 섶다리 외에도 강을 따라 늘어선 시화를 볼 수 있다. 매년 9월에 김삿갓 문화제가 열리는데, 시인 100명의 시 100편을 시화로 만들어 주천강 따라 전시한다.

주천강을 따라가는 여정부터 '충절의 길'로 바뀐다. 강을 따르던 단종은 잠깐 숨을 돌린다. 그 '쉼터'에 16세 단종의 실물에 가까운 동상과 무덤 2기가 있다. 김 해설가는 "무덤이 아니라 어머니 젖무덤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봉분 2개 위에 시멘트로 만든 볼록한 것이 있다.

서강을 따라 이어지는 단종유배길. 영월은 산이 많으나 위협적이지 않고, 강이 많으나 습하지 않다. 아기자기하고 깨끗한 풍광은 여운이 깊다.

우는 것만 같은 배일치 단종 동상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다 숨을 거둔 탓에 모정을 느껴보지 못한 것을 감안해 만든 형상인 것. 쉼터는 1980년대에 조성되었는데 사육신을 형상화한 6개의 부도, 청령포를 본따 만든 미니어처 등이 있으나,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주천강을 따르던 유배길은 큰 곡선을 그리며 휘돌아 가는데, 두 번을 크게 S자를 그린 후 강을 두고 고개로 올라선다. 이곳이 군등치君登峙다. 임금이 오른 고개라 하여 그 이름이 유래한다. 묵은 길과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면 계단을 통해 군등치 도롯가로 연결된다.

이윽고 길은 한반도면 면사무소 소재지로 이어진다. 한반도면 마을 주민들도 단종을 울면서 맞이했는데 말의 목에 달려 있던 방울이 떨어졌다 하여 이곳 고개를 방울재라고 한다. 길은 다시 가팔라지며 528m의 도덕산을 넘는데, 정점인 배일치재에 단종이 엎드려 절하는 동상이 있다. 이곳 고갯마루에서 석양을 바라보니, 자신을 걱정하던 아버지 문종과 충절을 지킨 사육신들이 떠올라 기우는 태양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큰절을 올렸다고 하여 배일치排日峙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비가 내리면 고개 숙인 단종 얼굴의 코끝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데 "마치 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라고 김 해설가는 말한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3코스 '인륜의 길'이다.

배일치재를 지나자 풍경이 수려해지더니 낮은 산이 앞을 막는다. 작은 산봉우리가 한양에 두고 온 아내 정순왕후같이 어여쁘고 다소곳해 단종이 옥녀봉玉女峰이라 이름 붙였다.

단종보다 한 살 더 많았던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고도 64년을 더 살다가 1521년 세상을 떠났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서울 청계천 다리에서 생이별을 했는데, 단종이 건너가 영원히 이별하였다 하여 이 다리를 '영도교永渡橋'라고 한다. 이후 친정아버지 송현수도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처형되고, 한 나라의 왕비는 노비로 강등되었다.

정순왕후는 불교에 귀의해 지금의 종로구 창신동에서 평생 살았다. 옷감을 자주색으로 물 들여 파는 일로 입에 풀칠을 했는데, 아낙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곤 했으나 세조가 이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러자 아낙들은 새벽에 여인들만의 시장을 몰래 열어 도와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창신동 풍물시장에 가면 '여인시장 터'라는 표석이 있다. 인근에 있는 야산에 정순왕후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렀다. 정순왕후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할 때 마을의 아낙들도 같이 울었다고 한다. 동망봉은 지금의 숭인근린공원이다.

이윽고 서강을 따르던 단종의 발길은 압도적인 절벽에 닿는다. 영월의 자연 비경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바위봉 선돌이다. 강 아래에선 겹쳐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데, 강을 따라 가다 뒤돌아서 가파른 산길로 올라서면 선돌 전망대에 닿는다.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건 괜찮다

선돌立石은 이름 그대로 '서 있는 돌'이란 의미다. 70m 높이의 거대한 돌이 우뚝 서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돌 위에서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도 전해져 '신선암神仙巖'으로도 불린다. 단종의 눈에는 아름다운 풍광도 소용없을 것이다. 군졸들과 주민들의 시선이 많아 속으로 울면서 보았을 터.

서강을 따르는 길은 비로소 강가의 소나무숲 청령포에 닿는다. 삼면이 푸른 강으로 둘러싸였고 뒤쪽은 절벽 같은 산줄기가 솟은, 천연감옥 청령포淸泠浦다. 창덕궁을 출발한 지 7일 만이었다. 단종은 벼랑 위 전망대인 노산대에 매일 올라 한양에 두고 온 아내 정순왕후를 그리며 돌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 돌탑이 망향탑이다.

단종이 매일 걸었을 청령포의 소나무숲. 청령포에 들어서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차분함이 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 영월부사가 새로 부임하는 날에 급사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결국 영월로 부임하려는 관리가 없어 폐읍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대담한 사람이 영월부사를 자청했다. 부임 첫날 밤, 의관을 정제하고 앉았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더니 곤룡포를 입은 소년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신임 부사가 단종임을 직감하고 고개를 숙이자, 단종은 "내가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 있어 목이 갑갑해 풀어달라고 요청하러 왔는데, 지금까지의 영월부사들은 겁이 많아 나를 보자마자 급사했다"는 것이다.

영월부사가 시신이 어디 있는지 묻자 단종은 "엄흥도 호장이 알 것"이라 하고선 사라졌다. 다음날 영월부사가 엄흥도를 찾아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단종이 죽었을 때, 세조의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엄흥도가 수습해 매장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말리자,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괜찮다"는 명언을 남기며 감행했다고 한다. 지방 말직이던 엄흥도는 숙종 때 단종의 명예가 복위되면서 벼슬을 얻었고, 고종 때는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정승급 벼슬까지 올랐다.

3,000원 뱃삯을 내고 청령포에 든다. "이렇게 방문객이 없는 건 처음"이라며 김원식 해설가는 평소에 비해 지나치게 고요하다고 한다. 아름드리 소나무숲 속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 노곤노곤한 솔향기, 지나치게 차분한 기류, 소음이 멈춘 신비한 공간의 틈에 들어선 것만 같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지독한 그리움과 슬픔이 투명한 물고기로 흘러나와 살결을 휘감았다.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린, 화석이 된 슬픔이 아직 청령포에 갇혀 있었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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