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8시간, 내일은 20시간…속옷 다섯장 들고 화물차에 오른다[69시간이 무의미한 노동자들(하)]

조해람 기자 2023. 4. 1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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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보호 못 받는 ‘특수고용 노동자’들
화물기사 3월 운행기록 보니…‘주 106시간’
주 80시간 일상인 ‘가짜 3.3’ 마루노동자들
“52시간 지켜보니 비로소 벚꽃 핀 줄 알았다”
화물기사 김상범씨(51)가 지난 7일 오전 충남 아산의 한 주유소에서 화물차에 기름을 넣은 뒤 운전석에 오르고 있다. 조해람 기자

‘언제 출근해서 언제 퇴근하는지’를 묻는 말에, 30년차 화물기사 김상범씨(51)는 “월요일에 나가서…”로 말을 시작했다. 그에게 출퇴근은 ‘일 단위’로 반복되는 일이 아니다. 월요일 오전 5시30분쯤부터 일을 시작해 토요일 낮에 귀가한다. 주말 특근이 있으면 토요일 저녁에야 일이 끝난다.

“월요일에 속옷 다섯 장, 양말 다섯 켤레, 티셔츠 두어 장 챙겨서 나와요.” 지난 7일 오전 충남 아산의 한 주유소에서 만난 김씨는 블랙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입에 대며 말했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허허.”

김씨가 평일에도 귀가하지 못하는 건 하루 18시간을 넘어가는 운행 시간 때문이다. 김씨는 충남 아산의 자동차 부품공장과 서산의 완성차 공장을 수차례 왕복한다. 운임은 낮은데 낡은 트레일러의 유지비는 매년 치솟고, 유류비와 지입료 등 비용도 만만찮다. 18시간은 넘게 일해야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집이 공장과 가까운 아산인데도 김씨가 퇴근하지 못하고 트레일러 뒤 침대칸에 몸을 뉘는 이유다. 그의 운전석에는 커피 컵이 10여개씩 쌓여 있다.

지난 7일 오전 화물기사 김상범씨(51)의 화물차 운전석에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신 커피 컵들이 쌓여 있다. 조해람 기자

김씨는 정확히 얼마나 일하고 있을까. 경향신문은 김씨와 함께 그의 3월 한 달 치 디지털운행기록장치(DTG) 기록을 살폈다. DTG에는 차량의 이동거리와 속도, 차량 시동을 켜고 끈 시간까지 모두 기록된다.

4주차 월요일인 3월20일 김씨는 오전 6시14분에 시동을 켰다. 김씨의 시동은 다음 날인 21일 오전 1시5분에 꺼졌다. 18시간51분 일한 것이다. 김씨는 시동 종료 후 4시간38분이 지난 21일 오전 5시43분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21일 출근한 김씨는 20시간46분 일한 뒤 22일 오전 2시29분에 시동을 껐다. 3시간6분이 지난 22일 오전 5시35분에 다시 차에 전원이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김씨는 20일부터 25일까지 주 6일 106시간4분을 일했다.

휴식 시간은 거의 없었다. 김씨가 20시간58분 운행한 3월2일(2일 오전 7시1분~3일 오전 3시59분)을 예로 들면, 김씨의 화물차 시동이 1시간 이상 꺼진 건 2차례에 그쳤다. 오전 8시30분부터 오전 9시45분까지 1시간 15분, 날을 넘긴 3일 오전 0시28분부터 오전 2시36분까지 2시간8분뿐이었다. 나머지는 10~20분 정도의 정차였다. 그렇게 3일 오전 3시59분에 일을 마친 김씨는 3시간 뒤인 오전 6시59분에 다시 시동을 켰다.

화물기사 김상범씨(51)가 지난 7일 오전 충남 아산의 한 주유소에서 3월 한 달치 디지털운행기록장치(DTG)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 조해람 기자

DTG 기록이 하나씩 쌓일수록 김씨는 여가를, 건강을, 가족과의 시간을 잃었다. 토요일에 귀가하면 쓰러지듯 잠만 잤다. 몸을 움직일 시간이 없어 당뇨가 생겼다. 두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부모님 초청 행사’ 한 번을 못 갔다. 대학생이 된 자녀는 아버지의 과로를 걱정하지만, 김씨는 “30년 동안 이 일만 해서 이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가장 무서운 건 ‘피로’다. 김씨는 “심하면 새벽에는 회사까지 운전해서 왔는데도 어떻게 온 건지 기억이 없다”며 “정말 피곤해서 5분 눈을 붙였다 떼면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여기가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주 100시간 넘게 일하고 있는 김씨는 현행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는 물론, 정부가 추진 중인 ‘주 69시간(주6일 기준)’ 노동시간 개편안조차 적용받지 못한다. 연장노동시간 규제는 근로계약을 맺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김씨는 법적으로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노동자(특고)’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주 69시간’ 개편안이 자신의 과로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거래처인 자동차 공장의 노동시간이 길어지면 김씨의 노동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김씨는 “52시간 때는 18시간 일했는데, (특정 주)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20시간 이상 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남들의 2배 일하고 1시간에 ‘만원’ 번다

김씨 같은 특고노동자들은 220만명(2019년, 한국노동연구원·고용노동부 집계)에 달한다. 하지만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노동시간 규제가 없는 탓에 특고노동자들은 과로에 시달리기에 십상이다.

화물기사들이 대표적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가 지난해 조합원 190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안전운임 확대를 위한 조합원 실태조사’를 보면, 화물차 기사들은 하루 평균 14시간 운행했다. 1달 평균 24일 출근해 339시간을 일했다. 한국 노동자의 월평균 노동시간(173.8시간)의 2배에 달한다.

화물기사들이 이렇게 운행할 수밖에 없는 건 낮은 운임과 높은 비용 때문이다. 화물연대 조사에서 화물기사들의 시간당 순수입은 1만928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지난해까지만 해도 컨테이너와 시멘트 2개 품목을 대상으로 일정한 운임을 보장해주는 ‘안전운임제’가 있었다. 3년 시한으로 도입된 안전운임제가 연장 없이 끝난 지금 화물기사들은 더 심한 과로와 저임금에 내몰리게 됐다.

한 배달 노동자가 잠시 멈춰 서서 종이에 무언가 쓰고 있다. 한수빈 기자

또 다른 특고 운전노동자인 배달라이더들의 노동시간도 다른 노동자들보다 훨씬 길다. 2020년 한국비정규노동단체네트워크가 라이더 162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배달노동 실태조사’를 보면, 라이더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12.9시간으로 나타났다. 라이더들은 주 평균 5.7일동안 73.53시간을 일했다. 월로 환산하면 319.5시간으로, 역시 전체 노동자 평균(173.8시간)의 2배에 가깝다.

52시간 지켜보니…비로소 벚꽃 핀 줄 알았다

복잡한 고용구조 때문에 ‘장시간 노동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일도 있다. 아파트 마루시공 노동자들이 그렇다. 마루시공 노동자들은 바닥 높낮이부터 실리콘 두께까지 상세한 작업지시를 받고 장소와 시간도 정해져 있지만, 근로계약을 맺는 ‘노동자’가 아니다. 건설사-마루제조·시공업체-불법하도급업체 등 복잡하게 얽힌 불법하도급 구조 안에서 이들의 ‘노동자성’은 실종된다. 대신 3.3%의 사업소득세를 내는 개인사업자로 계약한다. 이른바 ‘가짜 3.3 노동자’다.

그 결과 마루시공 노동자들은 ‘주 52시간’ 규제 바깥에서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주 69시간 이야기가 나올 때 우린 다 웃었습니다. 우린 이미 하루 13~14시간, 주 80시간 넘게 일하고 있는데, 남의 나라 얘기죠.” 마루시공 노동자인 최우영 권리찾기유니온 마루지부장의 말이다.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마루시공 노동자가 야간에 작업을 하고 있다. 최우영 권리찾기유니온 마루지부장 제공

마루시공은 아파트 공사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공사기간의 압박에 가장 취약하다. 낮은 임금도 장시간 노동을 부추긴다. 최 지부장은 “10년 전에도 평당 1만원이던 임금이 지금도 1만원”이라며 “주 52시간에 맞춰 일하면 최저임금보다 못 받아서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장시간 노동으로 마루시공 노동자들의 건강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최 지부장의 동료 A씨는 지난달 21일 대구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동료들은 A씨가 숨지기 넉 달 전부터 주당 80시간 이상 일해 왔다고 말했다. 노동시간이 ‘조작’되기도 한다. 최 지부장은 건강검진 문진표에 하루 노동시간을 ‘13시간’ 이라고 사실대로 적었더니, 업체 측이 수정테이프를 덧대 ‘8시간’으로 수정했다고 했다.

지난 2월6일 마루시공 노동자인 최우영 권리찾기유니온 마루지부장이 작성한 건강검진 문진표. 최 지부장은 최초 작성 당시 1일 근무시간을 13시간(위 사진)으로 적었으나, 이후 업체 측이 수정테이프를 덧대 8시간(아래 사진)으로 근무시간을 수정했다고 했다. 최 지부장 제공

최 지부장과 동료들은 A씨의 사망 이후 ‘52시간 준법투쟁’을 하고 있다. “밖에 나가니 벚꽃이 폈더라고요. 꽃이 핀 지도 몰랐습니다. 늘 새벽 5시에 나와서 밤에 퇴근하니까요. 벚꽃 핀 줄 알게 돼 너무 행복하다며 손 붙잡고 얘기하는 시공자도 있었습니다.”

최 지부장은 아직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죽음들이 많다고 보고 있다. 그는 “평당 싼 단가로 일을 시키는 ‘평떼기’ 관행을 없애고, 건설사들이 장시간 노동을 스스로 규제해야 한다”며 “마루시공 노동자들도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특고노동자들 “노동시간 규율 사각지대 해소를”

화물기사와 마루시공 노동자 외에도 많은 특고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린다. 지난해 11월 양대노총(민주노총·한국노총)이 특고노동자 조합원 67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고노동자 노동시간 실태 및 인식조사’를 보면, 응답자 55.4%가 주 52시간을 넘게 일했다.

특고노동자들은 적정한 인건비와 노동시간이 법·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김씨는 “이 정도의 장시간 노동은 2명이 해야 하는 일인데, 운송료 자체가 현실적이지 못해서 불가능하다”며 “차가 필요해서 우리를 고용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닌가”라고 했다. 화물기사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라고 보는 판례가 연이어 나오지만 여전히 법과 정부는 이들을 ‘노동자’로 품지 않고 있다.

화물기사 김상범씨(51)가 지난 7일 오전 충남 아산의 한 주유소에서 화물차에 기름을 넣은 뒤 운전석에 오르고 있다. 조해람 기자

다른 특고노동자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양대노총 조사에서 특고노동자 46.1%는 장시간 노동 개선을 위해 최우선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으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규정 적용’을 꼽았다. ‘장시간노동을 방지하고 적정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30.6%, ‘노조 할 권리 인정’이 21.3%로 뒤를 이었다.

정부가 최우선으로 추진해야 할 노동시간 정책으로는 49.1%가 ‘5인 미만 사업장, 특고노동자 등 노동시간 규율 사각지대 해소’를 꼽았다.

조사보고서를 집필한 이창근 민주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노동시간 규율 사각지대 해소와 장시간노동 체제 해소를 위한 전방위적 규제 강화여야 한다”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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