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병률 “여행해야 피 돌고 숨 트여… 영감 떠오르면 냅킨에도 쓴다”

이영관 기자 2023. 4.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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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라이터] [2] 200만부 작가 이병률
이병률 시인은 “호기심이 많고,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질이다. 언젠가 사진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전원생활

시인 이병률(56)의 옷 주머니에는 수많은 종이가 들어 있다. 비행기에서 와인 한잔 마시며 꺼낸 위생 봉투, 카페 냅킨, 영수증 뒷면…. 모든 종이는 그의 원고지다. 비에 젖거나 수년 지나 발견되기도 한다. 시인은 “메모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고, 무엇을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게 오히려 재미있다”고 했다. 100만부 팔린 여행 에세이 ‘끌림’(2005)은 이 종이들이 모여 탄생했다. 여행 에세이 분야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두 번째 여행 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2012·50만부), 다섯 번째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2017·9만부)를 비롯해 그가 낸 책의 판매 부수를 더하면 200만부가 넘는다.

판매 부수 못지않게 시인의 정처 없는 삶이 눈에 띈다. 140개 넘는 국가를 여행했다. 그에게 떠나는 것은 ‘피의 문제’다. “많은 사람이 생명을 위해 피가 돌고 숨을 쉬어야 하지만, 저는 돌아다닐 때만 피가 돌고 숨이 쉬어지는 기분입니다.” 처음 숨이 쉬어진 건 고등학교 때다. 부모 대신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1주일 동안 여행을 하고 왔다. 축의금을 여행 경비로 썼다. “눈이 내리길래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달렸어요. 집에 연락도 안 한 탓에 두들겨 맞았지만, 살 것 같았습니다.”

책보다 여행이 먼저였다. 돈이 있어서 떠난 건 아니다. 해외 한식집에서 불판을 닦았고, 꾸준히 라디오방송 원고를 써서 보냈다. 그러다 문득 “이 많은 사진과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고민이 들었다. 결과물이 첫 에세이 ‘끌림’이었다. “판매는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면서 많이 즐겼어요. 친구 몇 명을 찾으려고 전단을 뿌린 셈인데, 그에 대한 응답을 들은 거죠.” 목차와 쪽수를 없애고 산문과 직접 찍은 사진을 함께 배치했다. 당대로선 신기한 시도였고, 이후 비슷한 느낌의 ‘감성 에세이’가 쏟아졌다.

최근 시인은 일본 도쿄의 한 출판사에서 주관한 독자와의 행사를 계기로 2주 동안 여행길에 올랐다. 전화와 이메일 등으로 만난 시인은 “일본의 도시엔 쓸쓸함이 짙게 깔려 있다. 그 질감들을 느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여행 원칙은 혼자 다니며 낯선 공간과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먹먹해지고 막막해져서 조금 나은 상상력의 밑천을 짊어지고 돌아오기 위해 먼 길에 머무르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여행한다.

주어진 삶보다는 가슴 뛰는 일을 선택해 왔다. 시작은 단연 ‘시’. 아버지는 그가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며 이름에 ‘법칙 률(律)’을 넣었으나, 시인은 자신의 ‘律’ 자가 시의 ‘운율’에 쓰이는 단어라고 말한다. 1995년 등단해 사람의 마음을 여행하며 내면의 슬픔을 응시하는 시편을 써 왔다. 그의 눈에는 ‘먹먹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이 보인다. ‘이소라의 FM음악도시’를 비롯해 18년 동안 인기 라디오 작가로 일했으나, 관둔 것도 시 때문. “시에 푹 젖어 있어도 시를 쓰기가 어렵잖아요. 누울 자리 생각하지 않고 일단 그만뒀어요.” 마침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고, 그 계열사 ‘달’의 대표를 14년째 맡고 있다. 시인은 여섯 권의 시집을 냈고, 올해 새 시집을 낼 계획이다.

‘시인’이 아닌 ‘에세이 작가’라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 “에세이가 많이 팔리면 시인이란 정체성에 균열이 갈까 봐 부담됐어요. 근데 에세이 작가를 만나러 온 독자에게 시 이야기를 꼭 합니다.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직함을 가로지르는 그의 정체성은 ‘인간적인 의미를 찾아 걸어가는 사람’이다. 사람을 찾아 여행했고, 시를 썼고, 책을 만들었다. “저는 세 가지 일을 다 잘하기보다는 그냥 비빔밥 같아요. 반찬 있는 대로 마구 비벼 먹고, 가끔씩 뺄 것은 빼고 비비는 거죠.”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부담감은 없을까. 그는 “제 글이 인정받지 못했던 순간은 모두 엄살이었다”고 했다. “제가 겪은 결핍까지도 그럭저럭 잘 소화시켰다고 생각해요. 지나온 잔물결은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밀고 나갈 파도만 떠올리자는 주의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글이 사랑받는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독자분들이 제 글은 잃어버리고 사는 지점과 감정을 환기시켜 준다고 말하더군요. 앞으로도 많이 다닐 거고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을 겁니다.” 시인은 일본서 귀국하면 열흘 뒤 중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 아름다워 보일 때까지/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라는 ‘끌림’의 첫 문장은 유효하다.

답답할 때 이곳으로

다른 공기와 다른 온도를 느끼기에 강원도 태백이 좋다. 오지의 느낌이 나는 깊은 도시임과 동시에 시골의 정서가 답답한 마음 상태를 해장시켜 줄 것이다. 재래시장 주변에서는 강원도식 전병 같은 시골 음식으로 위로받는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에서는 머릿속이 청소되면서 신령한 기운도 받을 수 있다.

여행과 함께 이 시집을

이성복 시인의 시집 ‘남해금산’과 ‘그 여름의 끝’을 추천한다. 아름답고 슬프고 깊고 웅장하다. 한국시의 지붕이며 기둥인 시집이다. 시와 오래 담 쌓았던 분들이나 어렵지 않은 시와 친해지고 싶은 분들에게도 좋다.

슬픔이 찾아오는 시간엔 이 라디오

’세상의 모든 음악’을 추천한다. KBS 제1FM의 저녁 6시의 방송이다. 저녁 6시라는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영접하기에 이만한 배경음악이 있다는 것은 이번 생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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