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와 ‘헤어지고’ 소중한 오늘을 사는, 나는 이지선입니다”[박주연의 메타뷰](37)

2023. 4. 1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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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이화여대 임용된 ‘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교수
지난 3월 28일 이지선 교수가 연구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 나 자신을 버리고 싶었던 그 시기에 스스로 다시 안을 수 있도록 한 힘은 결국 주변의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 서성일 선임기자



지난 3월 28일, 벚꽃이 만개한 이화여대 교정은 봄기운으로 화사했다. 오가는 학생들의 얼굴에도 봄꽃이 피었다. 정문에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만난 이지선 사회복지학과 교수(45)의 연구실. 그런데 문고리가 이웃한 다른 연구실들의 동그란 손잡이와 달랐다. 화상으로 양 엄지손가락을 제외하고 첫 마디를 모두 잘라내 손가락이 짧아진 동생을 위해 오빠 정근씨가 돌리지 않고, 아래로 당기면 되는 도어락을 설치해준 것이다.

그가 모교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은 지난 3월 2일 그의 첫 출근에 맞춰 여러 언론이 조명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성취를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는 이화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0년 7월, 오빠와 승용차로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전신에 중화상을 입었다. 죽음의 문턱을 수차례 오가고 화마는 곱던 그의 옛 모습을 앗아갔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글로 풀어낸 긍정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로 많은 이들을 웃고 울게 했다. 누군가는 그로 인해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와 처음 인터뷰한 것은 2002년 11월이었다. 그가 만든 홈페이지 ‘주바라기’에 쓴 글들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할 때였다. 당시 그는 피부 이식 수술 차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경기 안양시 평촌의 자택에서 전화로 인터뷰하고 가족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님 이야기를 넣으라는 것’과 ‘절대 소설을 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미화되는 것도,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말과 글을 옮긴 게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인터뷰 반응은 뜨거웠다. 003년 에세이 <지선아 사랑해>를 펴내고 2004년 KBS 1TV <인간극장>이 조명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화여대 부임 전 그는 2016년 미국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17년부터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로 근무했다.

-모교 교단에 서니, 어떻습니까.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소원이 이뤄져 너무 감사해요. 신입 선생님으로 좌충우돌하던 시기를 잘 견뎌준 한동대 학생들 덕분에 이날이 왔다고 생각해요.”

-모교가 그렇게 그리웠나요.

“저는 가족이 아주 중요한 사람인데, 가족과 떨어져 혼자 경북 포항에서 사는 게 사실은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교수를 그만두고 유튜버가 될까도 생각했어요(웃음). 한편으로는 이미 좋은 것을 가졌는데, 욕심을 내는 건 아닌지, 감사할 줄 모르는 건지 고민도 많았어요. 그런 상태에서 지난 2월 합격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울었어요.”

-유학생활을 12년 가까이 했는데도 혼자 사는 게 외롭던가요.

“오히려 유학생활은 덜 외로워요. 친구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연고가 전혀 없는 지역에서 직장인으로 살면서 혼밥하는 것은 외로워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고요. 그러다 보니 주말마다 상경하느라 점점 더 관계 맺음의 희망이 안 보였어요.”

-지금 서울 부모님 댁(평촌에서 오래전 이사했다고 한다)에서 같이 사는 거지요.

“예. 싸워서 집을 나가는 그날까지 같이 산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지금은 엄마, 아빠와 제가 3인 1조로 되게 괜찮은 팀이에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그래서 좋아요.”

악몽 같은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은 2000년 7월 30일 밤 11시 30분 무렵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한 후 이웃한 연세대 학생이던 오빠 정근씨가 운전하는 소형 승용차를 타고 안양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용산쯤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남매의 차를 만취한 운전자가 몰던 갤로퍼가 들이박았다. 남매의 차는 중앙선을 넘어갔다가 튕겨서 되돌아오기를 반복해 일곱 대의 차와 충돌한 끝에 불이 났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그는 차 유리창을 깨고 튕겨져나간 후 화염에 휩싸인 자동차들 사이에 떨어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오빠가 달려가 불길 속에서 그를 끄집어냈다. 이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버린 상태였다. 그는 얼굴과 목, 등, 가슴 등 몸의 35%에 3도, 25%에 2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거듭되는 수술과 고통스러운 치료 속에 그는 일곱 달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02년 11월 28일 발행된 제 500호 (현 )에 게재된 이지선씨 인터뷰 / 경향신문 DB



-사고 1년여 후인 2001년 4월 ‘주바라기’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했지요. “덤으로 살게 된 제 이야기를 써간다”며 써내려간 글들이 감동과 웃음을 주며 입소문이 났어요. 큰 시련을 겪고도 어떻게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나요.

“사고를 만나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내게 주어졌던 많은 것들이 다 선물이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적어도 손톱은 내 것이겠지, 눈썹 하나는 내 것이겠지 하며 내 맘대로 하고 살았는데 그것을 잃고서야 소중함을 깨달았으니까요. 만약 제가 작은 일부분만 다쳤다면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작은 부족함에 억울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거의 무(無)에서 시작했잖아요. 그저 생명을 건졌다는 사실 하나로 시작했기에 모르고 살았던 모든 것에 감사함을 여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고 이후의 제 삶을 두 번째 삶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힘들던 차에 모교로
매일 슬프진 않다는 걸 알리려 글쓰기 시작
나를 객관적으로 만나며 치유의 시간도 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내면에 사랑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맞아요. 제 첫 번째 책 제목이 <지선아 사랑해>였던 것도 주변 사람들이 보내준 사랑의 힘으로 제가 저에게 할 수 있었던 말이거든요. 정말 저를 버리고 싶었던 그 시기에 스스로 다시 안을 수 있도록 한 힘이 결국은 주변의 사랑이었어요. 특히 그저 살아만 주기를 바란 엄마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면서 살게 된 것 같아요. 사랑받는 경험이라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 있어요.”

-사고 후 글은 왜 쓰기 시작했나요.

“제가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어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제가 매일 슬프지 않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홈페이지도 만든 거예요.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쓰다 보니까 설명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는 저를 전혀 모르던 분들도 들어와서 보시니 누가 읽어도 문장에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더 주의를 기울여 쉽게 읽히도록 썼어요. 불쌍하다, 안 됐다, 저렇게 사는 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렇게 보여지는 오해가 정말 싫었거든요.”

-글쓰기를 통해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합니까.

“혼자만의 시간에 계속 생각하며 글을 쓰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다시 마주하게 됐어요. 괴로웠던 시점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좋은 상담의 시간을 가진 것 같아요. 글쓰기를 통해 되게 많은 치유가 이뤄졌음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타고난 성격이 명랑하지요. 지난해 출간한 두 번째 책 <꽤 괜찮은 해피엔딩> 곳곳에도 유머가 배어 있더군요.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반장을 맡으면서 늘 앞에 나서서 아이들을 웃기곤 했어요.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미팅에 나가서도 혼자 우스갯소리를 하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고요. 덕분에 커플이 많이 성사되는데, 정작 저는 짝꿍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집에 돌아갔어요(웃음).”(2002년 인터뷰에서 그는 “대학 시절 별명이 ‘샬랄라공주’였다”고 말했다. TV 만화영화 <시간탐험대>에서 어떤 난리가 나도 전혀 개의치 않고 즐거워하는 캐릭터다.)

-자신을 ‘짝사랑 마니아’로 표현했더라고요.

“아, 제가 연애 기술이 없어요(웃음).”

-지금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남자는 없습니까.

“결혼을 무척 하고 싶었고 평생 함께할 누군가가 생기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하지만 지금은 비혼 상태가 익숙하고 편해요. 아마도 쭉 이렇게 살지 않을까요?”

그는 2005년 온누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학위(2008)를 받았다. 이후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2010)를,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2016년)를 취득했다.

지하철 시위 아주 기본적 권리 위한 것
시위 격해지게 만든 것은 장애인 아냐
모든 복지는 당사자 목소리 더 들어야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는데, 사고 후에는 어떤 마음으로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을 공부했나요.

“일단 아이들이 제 모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유치원 교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또 제가 사고로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시기를 보냈잖아요. 만약 부모님이 더 연로하셨을 때 제가 사고를 만났다면 도움을 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가족이, 또 친구가 해줄 수 없을 때 같이 고통을 감당해줄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택한 거예요.”

사진/서성일 선임기자



-원래는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었나요.

“아니에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엄마의 압력으로 선택했어요. 그래서 대학 원서 쓰고 집에 가면서 막 울었어요(웃음).”

-전공을 다시 사회복지학으로 바꿔 컬럼비아대와 UCLA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유는 뭔가요.

“미국은 재활상담 분야의 역사가 깊어요. 당연히 장애인들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들이 존재하고 그 일을 하는 훈련된 전문가가 많아요. 반면 우리나라는 이 시스템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았어요. 이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어디서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면서 사회복지 전반을 들여다볼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전공을 바꾼 거예요.”

-그래서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까.

“미국이 장애인들 살기 참 좋은 곳이라고 하잖아요. 그것은 장애인들이 자신들에게 불편부당한 문제들이 시정되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조성됐기 때문이에요. 이유는 간단해요. 이동, 교육, 의료 등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하는 거니까요. 우리나라도 장애인들이 계속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고 조금씩 바꿔나가다 보면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평등한 그리고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주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한두 해 얘기한 게 아니잖아요. 당신의 삶이 소중하듯 나의 삶도 소중한데 왜 이야기를 (정부가) 이렇게까지 안 들어주는지 묻고 싶어요.”

-전장연이 출퇴근하는 시민들을 볼모로 잡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시민들의 불편도 이해되지만 시위 양상이 과격해지도록 만든 것은 장애인이 아니에요. 언제까지 장애인들이 이동침대를 거리로 밀고 나와 시위를 벌이고, 삭발투쟁을 하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엄마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나요? 우는 아이 떡 하나 쥐여주듯이 처절한 몸부림을 쳐야 시혜를 베풀듯 그나마 들어주는 건가요? 큰 나라 살림을 보면 우리가 요구하는 예산이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시끄러운 사람으로 만드는 건가요?”

시종 부드럽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결기가 서렸다. 그는 “장애인이기 전에 사람이다, 그 생각을 모두가 가지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가족·친구 대신 고통 감당 공동체 필요해
유학 가서 재활상담학과 사회복지학 공부
미국에선 장애인의 권리 요구 당연한 문화


-한국의 장애인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법률 등 명목상으로는 거의 다 돼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받는 입장에서 충분하지 않고 강제성이 너무 없어요. 가령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생긴 지 15년이 됐는데 무엇이 진짜 차별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조차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요. 실제로 차별이 발생했을 때 권리구제를 위한 강제성도 너무 부족하고요.”

-무엇이 선행돼야 할까요.

“다른 모든 복지가 그렇지만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해요. 그런데 장애인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은 아무리 시끄럽게 떠든다 해도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요. 또 사회적 위치가 낮다고 여기죠. 그러다 보니 변화가 더딘 것 같아요.”

그는 장애인 재활 자립 지원 비영리단체인 푸르메재단 홍보대사다. 화상환자는 피부로 호흡을 할 수 없어 마라톤을 뛰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는 2009년 11월 1일 뉴욕시민마라톤대회에 출전해 7시간 22분 26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재활병원을 설립하겠다는 푸르메재단의 목표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4개월 뒤 서울에서 열린 마라톤에 또 참가했다. 재활병원 건립비 모금을 위해 100명의 기부자를 모으고 그들의 이름을 티셔츠 뒤에 쓰고 달렸다. 6시간 47초 기록으로 완주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어떻게 완주했습니까.

“홍보대사로서 한 게 없는데, 이거라도 하자 싶어 포기할 수 없었어요. 힘들 때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보다 덜 힘들 것’이라는 김황태 오빠의 말을 떠올렸어요. 김황태 오빠는 저와 중환자실에서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겨 전우나 마찬가지예요. 또 저를 위해 25㎞ 지점에서 목청껏 응원했지만 듣지 못하자 ‘이지선 파이팅! 푸르메재단 파이팅!’이라고 쓴 노란 피켓을 급히 만들어 35㎞ 지점에서 몇시간을 기다려주신 여자분도 잊을 수 없어요. 같이 사진촬영을 한 후 그분께 내가 계속 달리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발걸음을 떼는데, 갑자기 힘이 생기면서 다리가 쭉쭉 뻗어나갔어요(웃음).”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기관이 더 있지요.

“여러 곳이 있어요. 최근에는 부모가 수감생활 중인 아이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요. 같이 영화나 공연을 보고 밥도 먹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요. 코미디언 이성미·송은이 언니와 이영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가수 션 오빠가 함께 도모한 일이에요.”

-그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나요.

“제가 힘 받았던 순간들은 이모, 삼촌, 친구들이 저를 화상환자가 아닌 그냥 이지선으로 봐줄 때였어요. 마찬가지로 저는 이 아이들도 수용자 자녀가 아닌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봐요.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응원해준 사람이 있었어. 그러니 나도 계속 살아갈 거야’ 이런 마음이면 좋겠어요.”

장애인 단체 홍보대사로 마라톤 2번 완주
남들이 화상환자 아닌 나로 대할 때 힘 얻어
수감자 자녀들 만날 때도 그들 자체로 응원


-정치권에서는 부르지 않던가요.

“오래전부터 대선 때마다 있었어요. 지지 발언을 해달라거나 어떤 그룹에 들어오라거나…. 하지만 제가 모르기도 하고, 그분들이 저를 잠깐 사용하시려는 의도가 너무 느껴져서 거절했어요. 그렇게 사용되려고 살아온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사진/서성일 선임기자



-‘사고를 당한 피해자로만 나를 규정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요. 사고를 당한 것과 사고를 만난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당했다는 것은 피해를 입어 뭔가 크게 잃었다는 거잖아요. 저는 그 표현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사고 2년쯤 후부터 만났다고 표현했어요. 만났다는 것은 헤어질 수 있는 것이고, 저는 불행한 일을 만났지만 그 사고와 헤어지고 있으니까요. 그 결과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기대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살게 됐어요.”

-23년 전 추돌사고를 낸 가해자를 용서했다지요.

“제가 성인군자나 대단한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했다고 오해하실까봐 걱정돼요. 사고 후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아빠에게 혹시 가해자가 찾아오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당신의 잘못을 용서하겠다’고 전해달라고 한 건데, 가해자가 오지 않아 전하지는 못하셨어요. 당시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제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괴로워하면서 더 힘들어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다고 믿어요. 왜냐하면 제가 미워하는 사람도 많거든요(웃음). 하지만 저는 사고를 낸 사람에 대해선 잊었어요.”

-이 교수가 믿는 신은 왜 혹독한 시련을 줬다고 생각하나요.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귀한 일을 하게 하려는 신의 계획이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세요. 하지만 그건 너무 엽기적이에요. 누군가에게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제가 받은 고통은 너무너무 큰 것이었거든요. 저는 그런 신이라면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픈 과정을 지나오면서 내린 결론은 굉장히 단순해요. 그분(음주운전을 하고 사고를 낸 가해자)이 잘못한 거예요. 그 자리에 있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영향을 우연히 제가 받았을 뿐이에요.”

-매일 아침 눈 뜨면 무슨 생각 먼저 하나요.

“아침이구나, 5분만 더 잘까? 그러면서 일어나요. 그래도 저는 너무너무 잘 알잖아요. 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어떻게 기적적으로 주어진 아침인지…. 그래서 오늘도 잘살아보자, 이런 마음을 가져요.”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먼저 그 길을 가본 사람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어려움을 겪을 때 내가 살아야 할 가치에 대해 제일 많이 흔들리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애쓰면서 과연 이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게 희망이 있나 하는…. 하지만 그 순간에는 보이지 않던 어떤 것이 분명히 있고,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음을 저는 경험적으로 확신해요. 그러니 살아남기로 결정하고,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면 힘드니 그냥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리라, 하는 마음으로 사셨으면 좋겠어요.”

-꿈이나 계획이 있나요.

“저 역시 먼 미래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잘 살아 있다, 계속 재밌게 살아가면 좋겠다가 제 꿈이에요(웃음).”

박주연 논설위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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