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변호사’, 왕조시대 ‘법에 의한 정의’ 좇는 이들의 기발한 활약

한겨레 2023. 4. 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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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새로고침]

문화방송 제공

<조선변호사>(MBC)는 ‘외지부’가 주인공인 사극 법정물이다. 외지부는 돈을 받고 백성들의 소송을 대리하던 직업으로 주로 중인이나 하급관리 출신이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외지부에 관한 부정적인 기록이 여러번 나온다. 드라마 <동이>(MBC, 2010) <옥중화>(MBC, 2016) 등에도 소개되었는데, 전면에 등장하기는 처음이다. 원작은 정작가와 심군이 연재 중인 동명 웹툰이다. 우도환과 김지연의 안정적인 연기와 다면적인 인물 설정이 흥미롭다.

강한수(우도환)는 겉보기에는 돈만 아는 속물 같지만 속이 깊고 법 너머의 지혜를 생각하는 현실주의자다. 1화에서 강한수는 거대 상단의 횡포로 술을 팔지 못하게 된 영세 상인을 부추겨 소송에 나서게 한다. 의뢰인이 망설이자 심지어 집에 불을 지른다. 또한 악착같이 수임료를 챙기는데 이런 행동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해는 금방 풀린다. 방화의 이면에는 의뢰인 어머니의 자살 시도가 있었고 그보다 깊은 곳에는 강한수 어머니의 자살이 자리한다. 그는 누명을 쓰고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외지부가 되었고 한명 한명 죽이며 밟아 올라야 할 미션이 있다. 강한수가 영세 상인을 변론한 것은 상대편 거대 상단을 낚기 위함이었다. 2화에서 그의 권모술수가 본격적으로 발휘되는데 위증교사로 증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재판 장면은 압권이다. 더 놀라운 것은 흉악범을 풀어주는 한이 있어도 납치된 아이들을 살리는 방법을 택했다는 점이다.(법을 우회한 응징은 덤이다.) 법에 매몰되지 않는 실리적인 해법을 찾는다는 점에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이런 강한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이연주(김지연)는 공주이자 객주의 몸종이다. 2년간 왕위에 있던 아버지가 죽자 궁을 나왔다. 유모를 객주로 세워 여각을 차리고 객주의 몸종 행세를 한다. 민심을 수집해 가끔 사촌 오빠인 왕께 전한다. 원작에선 원각사의 구휼관에서 양반 부인들과 함께 봉사활동 하는 양반 규수였다. 원작보다 활기찬 각색이다. 드라마는 원작과 달리 연대를 특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왕은 성종이고, 이연주는 예종의 딸인 현숙 공주로 추측된다. 실제 역사에서 현숙 공주는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와 결혼했다. 본래 부마는 축첩할 수 없으나 임광재는 첩을 들였다. 이는 공주 독살 미수 사건으로 이어진다. 독살이 자작극이든 아니든 공주조차 피할 수 없었던 가부장제의 억압을 잘 보여주는 비극이다. 2016년 <천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채널A)에선 현숙 공주를 질투에 눈이 먼 악녀로, 2021년 <천일야사>(채널A)에서는 시가에 배신감을 느껴 스스로 음독한 것으로 그렸는데 그사이 젠더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조선변호사>에서는 현숙 공주에 대한 역사적 결박을 풀어버린다. 그는 공주 신분을 벗고, 아예 양반 신분도 벗어버린다. ‘법에 의한 통치’와 ‘훈구파에게 맞서는 개혁’이라는 공적인 의지를 가진 이연주는 저잣거리에 살며 자청해서 강한수를 위한 인질이 되기도 하고, 강한수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둘러대느라 ‘반했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던진다. 대의를 위해 움직이며 신분을 이중으로 활용하고 사랑에 능동적인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나 멋지다. <미스터 션샤인>(tvN, 2018)의 고애신(김태리)이 그러하듯.

<조선변호사>의 또 다른 주인공은 경국대전이다. 드라마는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치던 성종 초를 배경으로 한다. 율관들조차 아직 경국대전의 내용을 다 익히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중국의 여러 법률과 지역 관습법 등이 뒤섞인 풍경을 보여준다. 1화의 법정 장면에서 강한수는 중국의 판례를 따라야 한다는 상대편 주장을 역이용해 좌중을 선동한다. 원작에서는 중국의 판례가 대규모 양조업자의 수직계열화를 막으려는 조치였기에 조선의 영세 상인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법리가 뒷받침되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여기는 조선!’이라는 선동만 강조된다. 아쉬운 각색이다.

권문세족들이 지배하던 고려와도 다르고 중국과도 규모와 관습이 다른, 관료제의 나라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개국 공신들의 이상은 높았다. 그러나 조선을 세운 지 80년 만에 개국 공신들과 계유정난의 주역들은 ‘훈구파’라는 이름의 반동세력이 되었다. 드라마는 법에 의한 통치를 앞당기기 위해 경국대전의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훈구파와 맞서려다 요절한 예종을 재조명한다. 그리고 법에 의한 통치를 지향하되 법 바깥을 사유하는 실리적 유연함을 제시한다. 일찍이 <한명회>(KBS, 1994) <왕과 비>(KBS, 1998) <왕과 나>(SBS, 2007) <인수대비>(JTBC, 2011) 등 이 시기를 다룬 무수한 사극들이 있지만, 이런 접근은 보지 못했다. 신선한 틈새 벌리기이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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