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K컬쳐’ 열풍에도 ‘K애니’만 예외인 까닭은

정용인 기자 2023. 4. 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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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슬램덩크’ 돌풍
유아동용 3D 넘어 2D ‘K애니’의 미래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200만 관객을 돌파한 3월 22일일 서울 용산구의 한 영화관에 홍보 등신대가 세워져 있다. /한수빈 기자

[주간경향] 315만7675명. 3월 30일 현재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사이트에서 확인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 관객 수다. 3월 8일 개봉했으니 개봉 3주차에 300만 관객 수를 돌파했다. 흥행세는 당분간 계속될 조짐이다.

지난 3월 초 시사회 리뷰를 썼을 당시까지 한국에 수입된 일본영화 관객 수 전체 1위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 <너의 이름은.>이었다. “지난 1월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이 지속되고 있으니 조만간 결과가 뒤집힐지 모르겠다”고 리뷰에 썼는데 그 주 주말에 뒤집혔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도 여전히 잘나가는 중이다. 3월 30일 현재 총관객 수는 431만2359명이다. 업계에선 지금 추세로 미뤄 4월 중순 즈음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가 추월해 다시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영화 관객동원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개봉하던 주말, 가족과 함께 <스즈메…>를 동네 극장에서 다시 봤다. 첫 감상에서는 지나쳤던 디테일에 찬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잘나가고 있다는 ‘K컬처’에 왜 ‘K애니메이션’의 자리는 없을까.

신카이 마코토나 <더 퍼스트…>의 원작자이자 이번 애니메이션의 연출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더 거슬러 올라가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끄는 미야자키 하야오나 타카하타 이사오 같은 출중한 인물은 한국적 토양에선 나오기 힘든 걸까. 때마침 들려온 <검정고무신> 이우영 작가의 부음과 겹쳐 떠오른 의문이다.

<스즈메의 문단속> 한·중 흥행 돌풍

“오전 9시 30분~10시 기상, 오전 11시 업무 시작, 오전 2~3시 업무종료, 오전 4시 전 취침”

<스즈메…>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중국 팬들과 대화 중 공개한 하루 일정표다. 3월 24일 중국에서 개봉한 <스즈메…>는 중국에서 개봉 3일 만인 27일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정식 직책은 코믹스웨이브(comixwave)라는 회사의 제작부장이다. 엄밀히 말하면 회사원이다. 일본 무역회사 이토추상사의 사내벤처로 1998년 출발한 이 회사는 2007년 독립법인이 됐다. 신카이 마코토가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은 1999년.

회사 매출의 대부분은 신카이 마코토 제작부장의 작품들에서 나온다. 회사에서는 다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도 만들고 있다. 예컨대 <혹성대괴수 네가돈>(2005),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2017) 실사영화도 이 회사에서 만들었다.

일본의 영화나 애니메이션 제작시스템은 독특하다. 작품 하나당 제작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출판사, 영화사, 방송사, 관련 굿즈를 제작하는 완구사 등이 참여해 투자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더 퍼스트…>나 <스즈메…>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스즈메…>의 경우 제작은 코믹스 웨이브와 주식회사 스토리, ‘스즈메의 문단속’ 제작위원회가 맡고, 일본배급은 토호가 담당했다.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딱히 선진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일본문화 전문가인 자유기고가 엄다인씨는 “위원회 시스템은 투자자를 모아 회사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꼼수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래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고안된 취지는 리스크 분담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면 좋겠지만 두세 번 실패를 거듭할 경우 회사의 존립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어서다. 여기에 여러 투자회사가 참여하면 판권비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영화사·방송사 등을 끼고 하면 홍보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작위원회 시스템의 단점이 나온다. 제작과정에서 참여자 중 입김이 센 쪽-보통 돈을 많이 댄-의 요구가 관철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경우도 전작 <날씨의 아이>(2019)의 성인업체 광고 등장 장면에서 ‘제작위원회의 강요에 의한 PPL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2017년 ‘케모노 프랜즈’ 시리즈를 사실상 만들어낸 오토모 타츠키 감독과 각본가가 제작위원회를 이끌고 있던 카도가와 쇼텐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고된 사건이다. 이재민 만화문화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비슷한 사례로 <은혼>이라는 작품의 경우도 있다.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실사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꽤 잘됐다. 누군가 트위터로 원작 작가에게 물어봤다. 실사영화가 굉장히 잘됐는데 작가님은 얼마나 받으셨냐고.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제작위원회의 ‘횡포’에 원작자가 푸대접받는 건 일본의 저간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3월 19일 <스즈메의 문단속> 중국 개봉을 앞두고 상하이를 방문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3월 24일 중국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3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 신카이 마코토 트위터
일본 제작위원회 시스템의 명암

신카이 마코토나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제작위원회의 ‘갑질’을 넘어 작품을 주도할 수 있는 사례는 일본에서도 예외에 속한다는 게 관련 업계나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물론 앞으로 한국에서도 그런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자질과 역량을 가진 사람이 애니메이션을 할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박인하 서울웹툰아카데미 이사장의 말이다. “한국도 애니메이션 쪽에서 신카이 마코토나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대가(大家)가 앞으로는 나올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사실 되게 쉽지 않아 보인다”라고 말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한국 애니메이션은 오랜 시간 동안 주로 어린이용 3D 애니메이션 쪽으로 발전해왔다. 직접 손으로 그리는 2D 애니메이션의 경우 제작역량이 뛰어난 회사들이 여전히 없진 않지만, 대학 등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더라도 나중에 어디로 갔나를 보면 게임이나 웹툰 쪽으로 간 경우가 많더라.”

한국에서 애니 쪽으로 설사 뛰어난 이야기나 작화 능력을 가졌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있으니 진로를 두고 고민에 빠지리라는 설명이었다.

“한국은 2D를 놔버렸다. 2D도 디지털 솔루션이 많지만 3D에 비해 2D는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간다. 빛이나 바람, 구름과 같은 표현은 아무래도 아직은 2D가 자연스럽다. 다른 분야에 비해 2D 애니는 체력이 필요하다. 과거 하청을 통해 실력을 쌓은 애니메이터가 없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이제 다 50대가 돼버렸다. 말하자면 중간에서 허리 역할을 담당할 애니메이터가 실종된 셈이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언론학 박사)의 말이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 비해 한국은 제작 노하우를 가진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일본의 경우 요요기학원이라는 애니메이션 전문인력 양성기관이 있다. 단과대학 수준의 캠퍼스를 운영하면서 전체적으로 2D 인력을 양성한다. 이 학교는 대학이 아니기 때문에 초·중졸 출신 인사들도 들어가 공부한다. 이를테면 어릴 때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를 숭상하면서 ‘내가 지브리의 오타쿠다’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을 배우기 위해 요요기를 가고 밑단의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가 박한 연봉을 견디면서 10년, 20년을 그린다는 얘기다. 일본애니메이션의 밑바탕이 단단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어떨까.

지난해 1월 코믹스웨이브 스태프 트위터계정에 올라온 사무실 사진. 오른쪽엔 지난 2019년 개봉한 날씨의 아이 입간판이 있고 오른쪽에는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개봉예정인 <스즈메의 문단속> ‘문’ 모형이 놓여 있다. 이 문은 <스즈메의 문단속> 제작발표회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 트위터 コミックス?ウェ?ブ?フィルム 페이지.
“애니야말로 장기투자 필요한 영역”

문화평론가 김봉석 작가는 “한국의 제일 큰 문제는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웹툰이 상대적으로 흥하게 된 것도 그 시기 출판만화가 망해서다. 서울문화사나 대원, 학산 같은 당대의 메이저가 투자해야 하는데 일본만화가 잘되니 수입해 팔고 한국만화에 투자를 안 하니 웹툰이 된 것이다. 애니에서도 예컨대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작품이 잘됐는데 롯데나 CJ, 넥스트엔터테인먼트 같은 ‘메이저’들이 그 이후에 지속적인 투자를 하지 않았다. 돈을 번 회사들이 그 산업에 투자를 해줘야 하는데 근시안적으로 당장 되는 일에만 힘을 쏟는 바람에 안 되는 것이다. 만화는 혼자 하는 작업이다. ‘거장’이 나타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만화는 <미생>과 같은 작품이 나온다. 영화만 하더라도 이전처럼 필름으로 찍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디영화를 찍을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은 쉽지 않다.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애니야말로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영역이다.”

한창완 교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지적에 동의하지만, 그것만 100% 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라며 “나라마다 다른 특성이 있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과거의 경우 만화작가가 될 수 있는 통로였던 만화잡지들이 IMF 시기에 30여개 브랜드가 한꺼번에 망하면서 신인왕 공모전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미니홈피·블로그에 작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게 웹툰으로 넘어갔다. 일종의 ‘풍선효과’로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의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도제시스템을 유지 중인 곳이 일본이라면 한국은 1990년대 도제시스템이 붕괴된 이후 만화가 지망생들이 대부분 독학으로 입문하면서 학교공부와 같이 축적된 양식이 적었다. 그게 양국의 차이라면 차이점이다.”

그럼에도 ‘K애니’의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한 교수는 전망했다.

“여전히 출판만화 대국인 일본에 비해 한국은 기술적으로 ‘얼리 어답터’적인 성향을 보인다. 한국 친구들은 트렌드가 바뀌면 금방 따라잡는다. 2D가 눈에 보이면 바로 한다. 나는 지금 젊은 세대의 역량으로 볼 때 금방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애니도 초창기에는 디즈니 2D 애니를 모방하는 데서 시작했다. 한국의 ‘K컬처’가 웹툰도 일본에서 1등인데, 유일하게 애니메이션만 안 되고 있다. 극복하려면? 일단 베끼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연출과 그림을 모방하고 그걸 마침내 극복하는 것이 흡수역량이라고 나는 본다.”

한 교수에게도 물었다. 한국에서도 스튜디오 지브리나 신카이 마코토가 만들어내는 작품과 같은 걸작이 앞으로 나올 수 있을까.

“30대 애니메이터들을 중심으로 광고애니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단편 제작역량을 보여주는 신생스튜디오들이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독립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전문 프로그램인 ‘애니 갤러리’에 주목할 만한 단편 애니작가를 소개하는 코너에 10년째 참여 중이다. 개인적으로 단편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젊은 친구들의 작화·연출 능력이 많이 올라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잠재능력을 가진 많은 작가가 수면 아래 모여 있다. 글로벌 OTT의 투자라는 산업환경 변화나 수요층 확대 등과 접점이 맞아떨어진다면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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