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재료보다 못해도…통조림이 담아온 ‘현지의 맛’ [ESC]

한겨레 2023. 4. 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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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통조림
햄·참치·오징어·앤초비 등
신선한 재료만 못하지만
깡통 속 등푸른 생선 괜찮아
토마토소스 양념이 된 작은 오징어 통조림에 파만 좀 썰어 얹었더니 ‘간편 안주’가 되었다. 박찬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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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음식으로 발달한 캔 음식은 훌륭한 안주가 된다. 한국의 몇몇 시장 이름에 ‘양키시장’이나 ‘깡통시장’이라고 별칭이 있는 경우가 있다. 부산의 국제시장에 붙어 있는 ‘부평깡통시장’이 그렇고, 인천이나 청량리에도 깡통시장이 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온갖 통조림을 파는 시장을 말한다.

한국 현대사에 깡통은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조선 땅에 수많은 통조림 공장을 세웠다. 통조림을 가공해 ‘내지’(일본 영토)나 침략군이 진출한 모든 지역에 보냈다. 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이뤄진 지역에서 벌어진 남방 전선은 물론이고 미국의 코앞인 알래스카 앞바다인 알류샨 열도까지도 통조림을 운송했다. 전투병이 싸우는 곳에 통조림이 있었다. 쌀과 통조림, 된장, 간장, 말린 생선이 주로 전투식량으로 공수됐다고 한다. 고기 통조림도 꽤 보냈다. 조선의 여러 지역에 소고기 통조림 공장을 만들었다. 일례로 소 집산지인 나주에 공장이 있었는데, 소를 강제 공출한 뒤 도축해서 통조림을 만들었다. 남은 소머리 같은 부산물로 끓인 음식이 나주곰탕의 한 방식이었다는 설도 있다. 놀라운 건 전선으로 보내는 통조림의 대다수는 정작 군인들 수중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미군이 장악하면서 수송선이 침몰해 상당량이 태평양 해저에 수장됐다. 아마도 태평양에서 일본군 수송선을 인양하면 녹슨 통조림이 나올 것이다.

유럽 통조림 디자인은 ‘예술’

통조림은 한국인의 식생활에 큰 충격을 줬다. 노인들 사이에서는 ‘간스메’라고 부르는 온갖 과일 통조림이 유명했다. 따뜻한 남방에서 일본으로 보낸 과일이 공장에서 제조돼 일부가 조선 땅에도 들어왔다. 해방 뒤에는 미군 부대의 과일 통조림이 그 대를 이었다. ‘후르츠 칵테일’은 지금도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판다. 물론 정식 수입품이지만, 무엇보다 미제는 햄으로 만든 통조림이 최고였다. 콘 비프 같은 영국식 소고기 통조림이나 스팸류의 햄, 소시지, 미트볼도 통조림으로 시중에 유통됐다.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미트볼 통조림을 사서 마늘과 파로 양념해서 접시에 담아내는 경양식집도 많았다. 그걸 더 높이 쳐줬다. ‘본토의 맛’이니까? 사실, 한국 요리 중에서 요즘 시대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부대찌개는 이런 통조림 햄이 있어서 나온 요리다. 스팸을 부대찌개에 넣지 않았다고 치자. 정말 별 볼 일 없는 맛이 난다.

세월이 흘러 정작 우리 시대 통조림의 상징은 참치다. 참치가 나오기 전에는 꽁치, 정어리, 고등어 3대장이 있었다. 온갖 요리를 해먹었는데 꽁치김치찌개는 그중 한국인의 식단에 살아남아 제법 역사 있는 전통요리(?)가 됐다. 적어도 50년은 된 듯하다. 정어리는 잡히지 않아서 2000년대 들어 통조림이 거의 사라졌고, 고등어는 그다지 인기를 못 끌었다. 생고등어가 더 맛이 좋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 이후 유럽의 수입 통조림이 부상했다. 가장 최근에 시작된 문화 같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쯤? 맛보다는 디자인이 좋아서 선물용으로 각광을 받았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통조림도 정말 예술적으로 만든다. 디자인의 수준이 다르다. 특히 포르투갈은 국가 관광경제에 통조림 판매가 주력처럼 느껴진다. 관광지마다 정어리를 중심으로 문어, 고등어, 대구 같은 수산물 통조림이 정말 온갖 멋진 디자인으로 진열돼 있다. 그걸 한두 개씩 사오곤 했는데, 내가 일하는 가게의 인테리어 장식으로 명물이 됐다. 이걸 본 후배들이 외국 출장을 다녀오면 내게 통조림을 기념품으로 준다. 진열해서 장식품으로도 쓰고, 어떤 건 따서 요리하기도 한다.

집에 있는 양념 대충 올려서

캔은 안주로 만들기에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구한다고 해도 맛이 다르기 때문에 별미다. 예를 들어 문어나 작은 오징어, 대구살 같은 건 한국 것과 질감이 많이 다른 어종이다. 살이 더 단단한 느낌이 난다. 앤초비 같은 건 유럽에서 온 통조림이 맛이 좋은 편이다. 그냥 캔을 따서 빵에 얹어 내기만 해도 좋은 안주다.

둘째, 통조림 공법상 양념이 재료에 잘 배어 있다. 올리브유나 허브, 고추 같은 게 현지의 양념이라 풍미가 좀 다르다.

셋째, 통조림은 하급품이라는 한국의 인식과 달리, 현지에서는 미식의 일종으로 쳐주는 것도 있다. 한국의 참치 통조림에는 다랑어가 아닌 가다랑어가 들어가는데 유럽산 참치 통조림은 다랑어를 쓰기도 한다. 물론 값이 비싸다.

토마토소스 양념의 작은 오징어 통조림을 땄다. 이런저런 요리를 해볼까 하다가 간단하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술이 고팠다. 빨리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게 통조림의 원칙 아닌가. 그대로 따서 데우지도 않고 파만 좀 썰어 얹었다. 실은 집에 있는 양념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마늘도 좀 다지고, 이탈리아 파슬리가 좀 있었다면 더 맛있었을 텐데. 통조림에 양념으로 쓴 토마토소스는 묘한 맛이 난다. 더 부드럽고 가볍다. 마늘 향이 가볍게 스친다. 확실히 유럽은 마늘이나 양파 같은 양념을 쓰기는 쓰되, 세게 쓰지 않는다. 넣는 둥 마는 둥 한다. 오징어 살은 아주 단단해서 씹는 맛이 좋다.(사진에서는 오징어살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게 통조림이다. 원형이 적당히 해체되어버리는 것)

그래서 맛이 좋았느냐고? 음. 신선한 재료로 요리하는 것만 할까. 통조림은 어디까지나 통조림이다. 하지만 현지의 맛이 그대로 내 술상에 올라온다는 것. 그 현장성 하나를 높이 사자. 경험상 등 푸른 생선이 대체로 맛이 낫다. 정어리나 앤초비 같은 것들. 한국 것과 달리 기름기가 적고 살이 단단한 편이어서 이색적인 맛이 나는데, 그래도 정어리는 정어리답고 멸치는 멸치 같다. 고등어 통조림은 기름기가 너무 없어서 어색하다. 심지어 뱃살 같은 부위도 없다. 실제로 지중해 고등어는 꽁치처럼 날씬하다. 물이 더워서 배에 기름기를 저장하지 않는 것 같다. 동백이 그려진 제주 술을 한 병 땄다.

박찬일 요리사

익명과 혼술의 조합을 실천하며 음주 생활을 한다. 전국 왕대폿집 할매들 얘기를 듣는 중. 사라지는 것들에게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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