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은 동물원 탈출… 4살 ‘세로’는 왜 담장을 뛰쳐나가야 했나

최인준 기자 2023. 4.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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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얼룩말 ‘세로’ 탈출로 본
한국 동물원 사육 현실

동물원을 가장 먼저 뛰쳐나간 건 맹수인 사자도, 덩치 큰 하마도 아니었다. 가장 얌전하던 초식동물 얼룩말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야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실은 사육장 한편에 마련된 러닝머신 위를 쳇바퀴처럼 달리는 신세. 뉴욕 맨해튼 동물원을 벗어나 새 보금자리를 찾는 모험을 그린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2005년 개봉)에서 얼룩말 마티는 가장 길들이기 어려운 야생동물로 묘사된다. 밤마다 히터가 나오는 호텔 같은 동물원 생활에 익숙해진 다른 동물과 달리 마티는 자신의 10번째 생일날 마침내 동물원 담장을 뛰어넘는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얼룩말 세로가 지난 23일 서울의 주택가 골목에서 배달 오토바이와 대치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수컷 얼룩말 ‘세로’의 탈출 경로가 소셜미디어(SNS)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다시피 했던 지난 23일, 가장 흔한 반응은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였다. 대낮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얼룩말이 자동차 대열 사이를 달리거나 짬뽕집 앞을 예고 없이 지나가는 장면을 목도하는 건 반려동물 1000만 시대에도 진귀한 경험. 얼룩말 세로가 주택가 골목길에서 오토바이 탄 배달원과 대치하던 모습은 컴퓨터 합성처럼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세로의 가출은 이후 패러디물을 양산하며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았다. 하지만 결말까지 만화처럼 아름다울 순 없었다. 주택가에서 대변을 보며 서성거리던 세로는 출동한 동물원 직원들이 쏜 마취총 7발을 맞고 3시간 만에 잡혔다.

세로는 사고 후 1주일 동안 원래 지내던 사육장 안쪽에 있는 임시 방사장에서 사육사의 집중 보호 아래 휴식을 취하다가 지난 29일부터 다시 사육장으로 나왔다. 어린이대공원에 따르면 세로가 처음에는 다소 머뭇거리는 모습이었지만 이전처럼 먹이를 먹고 건강 상태도 회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로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사육장 앞 2m 폭의 관람로는 아직 폐쇄된 상태. 동물원 측은 세로와 함께 지낼 암컷 얼룩말을 데려오고, 사육장도 2배로 넓히기로 했다. 담장도 목재에서 철제 소재로 바꾸고 높이도 높일 예정이다. 보다 넓은 집에 살고, 없던 ‘여친’이 생긴다 해도 사춘기 세로의 방황이 멈출지는 아직 미지수. 전문가들은 “야생동물 특성을 배려하지 않는 국내 동물원의 후진적 사육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제2의 세로’ 사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얼룩말 '세로'의 동물원 탈출은 동물원 측의 관리 부실과 동물 습성에 맞지 않는 인위적 사육 환경이 빚은 사고다. 사진은 세로의 아빠인 '가로'가 어린이대공원 사육장에 갇혀 있는 모습. 가로는 지난해 1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이대공원, 그래픽=송윤혜

◇2019년생 얼룩말의 ‘쇼생크 탈출’

세로는 ‘그랜트 얼룩말’이다. 주로 국내 동물원에 많이 있는 종(種)으로 몸에 검정 줄무늬가 선명한 게 특징. 2019년 6월에 태어난 세로는 세로무늬가 유독 진해서, 아빠 ‘가로’는 가로무늬가 도드라져 붙여진 이름이다. 온순하던 세로가 달라진 건 2021년 엄마(루루), 작년 1월 아빠가 연달아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였다. 옆집 캥거루와 담장을 두고 영역 다툼을 하고 먹는 먹이의 양도 줄었다. 얼룩말은 무리를 떠나 홀로 지내는 걸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데 조실부모의 아픔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수의사는 “야생에서 사자, 표범 등 포식자들은 무리에서 떨어진 초식동물을 노리기 때문에 얼룩말은 무리에 숨어 있으려는 습성이 강하다”고 했다.

탈출 사고 후 어린이대공원의 대책도 세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동물원 측은 암컷 얼룩말을 데려오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11월 통과된 동물원법 개정안에 따라 한국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는 해외 야생 동물 유입은 크게 제한될 전망이다. 2020년 청주 동물원은 얼룩말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일이 발생하자 해외 야생동물을 늘리지 않기 위해 동물원에 있던 비슷한 종의 미니말과 합사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수십 마리씩 무리 지어 다니는 야생 얼룩말 특성상 암컷 한 마리가 늘어난다고 해서 세로의 감정 상태가 크게 개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조경욱 어린이대공원 동물복지팀장은 “그랜트 얼룩말이 멸종 위기종이 아니라 국내 동물원에서도 수급이 가능하다”며 “지난해 세로 아빠가 죽은 이후 얼룩말 사육장 확장을 추진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속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 동물행동 전문가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로가 나간 건 동물원 관리 소홀”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2018년 대전 오월드의 ‘퓨마 사살 사건’ 이후에도 국내 동물원 안전 관리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초식동물인 얼룩말이 아니라 육식동물이 탈출했다면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는 것. 몸무게 60kg, 8년생이던 암컷 퓨마는 사육사가 사육장을 청소하고 문을 잠그지 않는 바람에 우리를 탈출했다. 당시 대전 시민들에겐 ‘외출 자제’를 요청하는 재난 문자가 날아갔다. 퓨마는 엽총을 맞고 사살됐다. 2005년 어린이대공원에선 코끼리 6마리가 탈출해 인근 식당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동물단체 어웨어의 이형주 대표는 “얼룩말에게 짝을 찾아주겠다는 건 인간 중심적 대책”이라며 “어설픈 야생동물 관리는 퓨마 사살 같은 참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동물과 관람객의 안전을 모두 보장할 수 있는 근본적 시설 개·보수가 더 시급하다”고 했다.

◇동물원 폐지가 답?

세로 사건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린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을까’라며 안쓰러워했다. 이런 동정론을 타고 국내 동물원을 향한 비판 목소리도 커졌다. 동물원 폐지론이 다시 고개를 든 것.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지난 27일부터 이틀간 20~50대 남녀 4027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74%가 ‘현재 동물원 사육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현재 방식이 괜찮다는 응답은 16% 정도였다. 현재 동물원의 문제점으로는 ‘동물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사육 환경’(57.73%), 작은 사육장 크기(55.22%), 관람객의 몰지각한 태도(29.4%) 등이 꼽혔다.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 주로 사는 그랜트 얼룩말은 땅에서 주기적으로 풀을 뜯어야 하는데 주어진 사료만 먹어선 만족하기 어렵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장을 지낸 어경연 세명대 교수(동물바이오헬스학과)는 “국내 동물원에는 야생 동물마다 다른 온도와 습도 등 기본 조건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시설이 많다”고 말했다.

설문조사에서 남녀별 의견 차이는 크지 않았다. 다만 현재 동물원 방식을 유지하는 데 대한 의견은 세대별로 격차가 있었다. 예를 들어 ‘동물원이 교육 효과가 있다’고 한 세대별 응답 비율은 50대가 34%, 40대는 12%였는데 반해 30대(6.5%), 20대(2.7%)에서는 응답 비율이 극히 낮았다. 한 동물원 출신 수의사는 “어릴 적부터 전시 형태의 동물원에 익숙한 기성세대와 달리 동물 복지에 관심이 많은 MZ세대에겐 현재 동물원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교육, 種 보전 위한 전문시설 돼야

동물원은 태생적으로 동물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 정글, 남극에서 잘 살던 야생동물을 데려와 이질적인 환경에서 살도록 강요하기 때문. 세로 같은 비극적 사건도 이런 동물원의 부조리한 구조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동물원을 없애는 게 답일까. 동물 보호 단체들도 당장 모든 동물원을 없애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동물 복지는 안중에 없고 단순 재미나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동물원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급격히 늘어난 실내 동물원이 대표적이다. 대형 쇼핑몰 건물 안에 파충류, 조류뿐 아니라 작은 포유류를 전시하고 어린이들에게 만지게 하는 체험형 동물원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급증했다. 전국 100여 동물원 중 절반 이상이 실내 동물원으로 파악된다.

어경연 교수는 “지자체에서 다른 정책에 밀려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감시가 소홀한 지방 동물원 구조조정도 시급하다”며 “동물 관리 사각지대가 된 지방 동물원을 통폐합해 국립생태원처럼 동물권 교육과 종 보전 기능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동물 보호 시설 육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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