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기타신공] 故 임창수(1969~2023)를 추억하며

조성진 기자 2023. 3. 3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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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넥스트 2집 제작 일등공신
탁월한 개발자 CEO 겸 기타리스트
이어폰 사업차 베트남 현지 공장 건으로 방문했다 참변
베트남 공안 부검 후 다음 주 국내 빈소 예정
모든 기기 처음 접할 땐 분해부터 해보는 습관
한시도 손에서 기계 놓을 때 없어
기타‧앰프‧이펙터‧녹음장비‧이어폰까지
여러 분야 박학다식…실제 제작 시판까지
쌍문동 옥탑방 시절 이미 모든 테크닉 완성
신해철, “속주 애들립서 멜로딕한 부분까지 능한 기타리스트”
사업하며 술 마시기 시작
사업서 번 돈으로 많은 음악가들 후원하기도
사랑의 상처 다시 앓기 싫어 평생 독신
김창환 대표와 기념촬영하고 있는 임창수(맨위) [사진='소니캐스트 사랑방' 네이버카페]

[스포츠한국 조성진 기자] 신해철 '넥스트' 출신의 기타리스트 임창수는 사업가로서도 두각을 보였다. IT 관련 기업(이고시스템)을 이끌며 미디 장비에서 스튜디오용 모니터 스피커, 앰프, 이어폰, 심지언 기타 제작까지 여러 영역에서 돋보이는 기술력의 제품을 출시해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 이어 유럽(독일지사)으로 진출해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이어 동아시아로 확장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퀄리티높은 기타를 제작해 여러 뮤지션이 엔도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온갖 기계에 타고난 소질이 있던 그는 몇 년 전엔 자신이 직접 개발한 신개념 이어폰을 시장에 내놓았는데 이 역시 업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3만 원 대의 저가형 이어폰이었지만 하이엔드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 고퀄리티로 극찬을 받은 것이다. 이에 고무된 임창수는 이어폰 사업을 제대로 하고 싶어 베트남 현지에 이어폰 공장을 세우려 했다. 그래서 공장 건을 매듭짓기 위해 지난 21주일 일정으로 베트남을 방문했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베트남 공안에서 부검이 끝난 후 다음 주 중 서울에 빈소가 차려질 예정이다. 관계자에 의하면 이대목동병원, 강동 경희대의료원 등 몇 곳을 알아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의 유명 뮤지션 타계를 추모하는 기사를 쓸 때도 '팬심'이 앞을 가로막아 글쓰기 진도가 쉽게 나가질 않곤 했는데, 하물며 개인적으로 추억을 함께 한 뮤지션이야 말해 뭣하겠나. 기자인데 웬 '팬심'이냐고 하겠지만 기자도 감정과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기자의 '팬심'은 곧 '관심'이고 거기에서 (직접 발로 뛰는) 또 다른 깊이의 기사가 양산될 수 있다. 물론 스포츠한국 '조성진의 기타신공'에 안 쓰면 그만이겠지만, 임창수라는 음악가의 인간미/매력이 너무 많았기에 혼자만 묻어두기엔 아쉬웠고 안타까웠다.

부산 출신의 임창수는 이미 고등학교(부산 동천고)에 다닐 때부터 기타 잘 치는 걸로 유명했다. 동천고 스쿨밴드 '한가람'에서 리드기타를 맡았는데, 당시 부산에서 기타 좀 친다는 현역들조차 '고딩' 임창수의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부산이 배출한 기타 히어로 중 하나인 임덕규(스트레인저)도 임창수가 고교생일 때 처음 알게 됐다. 임덕규는 "고딩인데도 기타를 너무 잘 쳐 놀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후 서울예전(서울예대)에 입학한 임창수는 기타 실력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음악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두 모인 곳이 서울예대인 만큼 임창수에 대한 선배들의 질투도 거셌다. 여기에 지친 그는 나이를 한 살 더 올려 나름대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다. 69년생이지만 한때 자신을 68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창수는 처음 상경해 잠깐 신림동 고시원 생활을 했다. 서울에 대해 전혀 몰라서 고시원 생활하며 천천히 집을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무척 쾌활한 성격이던 임창수는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곤 즉석에서 잼을 하며 음악적 교류를 즐겼다.

임창수는 서울예대 재학 중이던 1990년대 초 쌍문동으로 이사했다. 바로 그 유명한 '쌍문동 옥탑'이다. 이게 왜 유명하냐면 당시 국내에서 기타 좀 친다는 유명 플레이어들은 물론 나를 비롯한 음악관계자들도 자주 드나들 만큼 일종의 사교 공간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쌍문동 옥탑에 놀러 온 기타리스트들은 임창수와 함께 즉석 잼도 하며 담소를 나누었고, 그때마다 임창수는 꼼꼼하게 이런 잼을 기록(녹음)해 놓는 '취미'도 있었다. 만일 지금도 이 녹음본이 보관돼 있다면 실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을 것이다.

91년 당시 나는 대학로에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임창수의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쌍문동 옥탑을 방문했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각종 기기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고, 라면 먹고 설거지하지 않은 냄비와 기타 물건들도 널려 있었다. 매우 고전적인 의미의 전형적인 '총각 딴따라' 방이었다. 오늘도 라면으로 때운 거냐고 하자 그렇다고 답했다.

취재 또는 그 외의 목적(일렉기타 컬렉션 등)을 위해 낙원상가에 자주 갔었는데, 그때마다 임창수와 만날 정도로 그는 거의 매일 낙원상가와 학교를 오가는 것으로 보였다. 낙원에서 봤는데도 저녁에 다시 통화하며 폴 길버트, 그렉 하우, 그 외 마이크 바니 사단 기타리스트들에 대해 장시간 대화 나누고, 창수는 자신이 새로운 프레이즈를 연습하고 있다며 전화상으로 직접 연주해 들려주기도 했다. 그럼 나는 이런저런 견해를 말해주고. 통화 후반부엔, 내일은 라면 대신 짜장면이라도 먹으라고 농담처럼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쌍문동 옥탑을 처음 찾았을 때 "오늘도 라면"이란 말을 꺼낸 것도 이런 이유였다.

어쨌든 창수의 쌍문동 옥탑을 방문하고 여기에 영감을 얻어 모 매체에 '라면피킹'이란 칼럼을 게재했다. 어제도 라면, 오늘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기타/음악에 매진하는 청춘이 아름답다는 쌍팔년식 격려를 다룬 내용이다. 언더 뮤지션들 사이에선 드문드문 입버릇처럼 라면을 먹고 또 연습한다는 이유로 "오늘도 라면피킹"이란 말이 회자했지만, 언론에 '라면피킹'이란 용어는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것이라 그 어느 때보다도 칼럼 반응이 좋았고 이후 '라면피킹'은 하나의 신조어가 돼 널리 퍼질 정도였다.

쌍문동 옥탑방 시절부터 임창수는 각종 기기 관련에 해박했다. 옥탑 좁은 방엔 기타와 앰프, 각종 이펙터들이 쌓여 있었다. 핑크 컬러의 피비(피베이) 기타에, 소위 '베이비마샬'이라 불리던 휴대용 미니 마샬앰프에 연결해 연주하곤 했다. 트렌드에 민감했던 그는 당시 핫한 휴대용 멀티이펙터 줌(ZOOM)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이걸로 피비-마샬 조합에 사용하곤 했다. 당시 낙원상가 '수아미악기'에서 줌 이펙터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나 역시 수아미악기에서 이걸 구입할 때 수아미악기 사장이 "이거 얼마전에 창수도 가져갔다"고 귀뜸해줄 정도로 당시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선 유행이었다.

나는 지난 93년 이태원 비바아트홀에서 김도균, 신윤철, 이현석, 김광석, 이중산, 주상균 등 30명이 넘는 유명 기타리스트가 함께 하는 잼 세션 공연을 기획한 적이 있다. 임창수도 참여해 열띤 기타 연주를 선사했는데, 이때에도 그는 허리에 줌 이펙터를 차고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보스(BOSS) 오버드라이브 OD-1, '레드박스'로 잘 알려진 기타 이펙터도 애용했다. 또한 누노 베텐커트를 좋아해 내추럴 색상의 워시번?(너무 오래전이라 확실치 않다)도 자주 연주한 걸로 기억된다.

쌍문동 옥탑방 시절의 임창수는 '마이크 바니 사단'의 속주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카피할 만큼 온갖 테크니컬 기타에 심취해 있었다. 속주에만 몰입한 여타 기타리스트들과 다른 점이라면 임창수는 이것과 함께 정통 블루스록 기타도 대단히 열심히 파고 있었다. 속주 중에도 간혹 블루지한 필이 버릇처럼 잠깐 나올 정도로. 오른손(피킹)에만 미쳐 있던 여타 젊은 속주 플레이어들은 정작 블루스잼에선 기우뚱댔던 반면 창수는 블루스면 블루스, 속주면 속주, 심지언 재즈까지 막힘이 없었다. 로벤 포드에서 존 스코필드 같은 재즈블루스 스타일도 유연하게 연주했다.

리치 코젠에서 그렉 하우, 폴 길버트 등 여러 레슨비디오를 틀어놓고 '립싱크'하듯 똑같이 속주를 따라 치기도 했다. 그 외에 많은 유명 기타리스트의 레슨비디오는 그의 다음 미션일 만큼 빠짐없이 마스터해갔다. 쌍문동 옥탑 시절은 기타리스트 임창수가 '기술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무장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콜트(Cort)는 펜더Fender)를 비롯해 세계적인 명기 OEM으로 정평 높았지만, 국내 기타리스트를 위한 시그니처 기타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때의 콜트가 제작한 기타들은 하나같이 높은 퀄리티의 탁월한 마감이라 현재까지도 회자하고 있을 정도다. 기타리스트 안회태 시그니처 모델 '앤디'도 이때 제작됐다. 콜트의 안회태 시그니처 '앤디'는 당시 낙원상가에서 판매되던 펜더 스트라토케스터나 깁슨 등 여러 유명 오리지널 명기보다 가격이 월등히 높을 만큼 최고의 성능과 꼼꼼한 디테일이 돋보였다. 모든 부위도 최고급 자재로 만들었다.

임창수도 안회태 시그니처 기타를 보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곤 안회태에게 잠깐만 빌려 달라고 했고, 임창수는 이 기타를 삼익악기 관계자에게 보여줬다. 당시 삼익악기는 임창수 시그니처 모델을 제작 중이었다. 임창수는 삼익 관계자에게 '앤디' 모델처럼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했던 것이다.

임창수 [사진=유튜브]

임창수는 어떠한 기기라도 처음 접하게 되면 무조건 분해부터 하고 보는 타입이었다. 다 뜯어보며 샅샅이 특정 기기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견해를 반영해 재설계하는 걸 좋아했다. 쌍문동 옥탑 시절에도 그는 방에 있을 땐 손에서 기계를 놓는 날이 없었다.

온갖 기계에 능한 엔지니어/발명가 기질은 아버지의 영향도 크다. 창수 아버지는 부산에서 오토바이전문점을 운영했는데, 창수는 어릴 때부터 기계를 분해 조립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며 메카닉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아버지는 앰프(진공관) 제작에서부터 다양한 기기를 뜯고 전혀 다른 형태로 만들 정도로 부산에선 나름대로 알아주는 기계 전문가였다.

넥스트에 가입한 임창수는 드러머 이수용을 밴드에 영입해 한남동에서 같이 살았다. 이때에도 창수는 집에 있을 땐 기타에서부터 앰프, 이펙터는 물론 세상의 온갖 기계들과 씨름했다. 2개가 있는 빌라에서 함께 사는 동안 임창수 방에 있던 다양한 기기들이 하나둘 거실로 쌓여 가며 이수용의 공간까지 넘어서기에 이른다. 임창수의 물건들이 쌓여가면서 빌라 공간이 좁아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매일같이 청소하고 깔끔을 떨던 이수용에겐 스트레스였다. 이사를 온 초기엔 청소를 열심히 했지만, 날이 갈수록 분해조립 물건이 쌓여가며 그 역시 청소를 포기하고 말 정도로.

임창수는, 가리는 음식 없이 모두 잘 먹을 만큼 먹성이 좋았다. 그가 절친 이수용 집에 놀러 와 며칠 있게 되면 냉장고가 텅 빌 정도로 다 먹어 치울 정도였다.

"냉장고에 남아 있던 것들을 밥과 함께 다 비우곤 했어요. 거의 먹질 않고 쌓여 있던 것조차 모두 해결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죠." 이수용

임창수는 초대 기타리스트 정기송에 이어 넥스트 2대 기타리스트로 넥스트 앨범을 녹음했다. 넥스트 2[The Return Of N.EX.T Part I: The Being]은 당시로선 해외의 유명 아티스트 음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물론 여기엔 밴드 리더 및 디렉터로서의 신해철의 집요함이 있기에 가능했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신해철은 넥스트의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누가 좋은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깊은 '팬심'으로 가득찬 추종자 중 일부는 발 빠르게 당시 최고의 실력이지만 팀에 소속돼 있지 않은 솔로 중에 누가 적합한지를 알아보다가 임창수가 최고의 적임자란 걸 알게 됐다. 여기저기에서 임창수를 추천받은 신해철은 직접 창수의 연주를 보고 "이 사람이다"란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러나 정작 임창수는 당시 여성 트리오 '에코' 데뷔앨범을 주도하고 있었고, 여타 사업적 포부(계획)도 가능성이 높을 만큼 '공사다망'한 상황이었다.

결국 넥스트에 가입해 2집 레코딩을 함께 했지만 2개월이 넘는 작업 기간은 임창수에겐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기념비적인 명작을 내고 싶어 하던 신해철은 모든 멤버가 가진 역량을 100% 끌어올리기 위해 혹독하게 디렉팅 했다. 창수는 때론 자신이 가진 그 이상을 요구한다고 토로했고, 다른 멤버들도 힘들어했다. 그만큼 신해철의 완벽주의는 넥스트란 밴드의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악인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길이 남을 넥스트 2집은 이처럼 많은 고투의 산물이었다.

생전 신해철은 "테크니컬한 속주 애들립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매우 감성적인 멜로딕한 부분까지 능한 기타리스트"라고 임창수를 극찬했다. 칭찬에 인색하던 마왕으로선 무척 이례적인 코멘트였다.

한편, 임창수는 평소 하고 싶어 하던 사업을 위해 신해철 넥스트를 나와 98IT 관련업체 '이고시스템'을 설립했다. 대외적으론 손 부상으로 더 이상 기타리스트로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이고'는 이전부터 각종 기계에 능한 엔지니어이자 메카닉 전문가/개발자인 창수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었다.

뮤지션 시절 임창수는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사업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접대' 차원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 따라서 처음엔 음주로 무척 힘들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주량이 늘었고, 이후 밤을 세워 마실 정도로 주량은 천하무적처럼 막강해졌다. 술에 취하면 노래하길 즐겼다.

손 부상으로 기타리스트의 길은 포기했지만 이후 사업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아주 가끔 기타를 연주했다. 물론 부상 이전의 수준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지만. 지인들에 의하면 임창수는 이러한 한을 노래로 대신하려 했다. 노래 실력도 보통 수준 이상이었다. 휘트니 휴스턴, 마이클 잭슨 등 따라 부르기 어려운 곡들을 위주로 감성적으로 멋지게 소화했다. 저니 'Open Arms'도 감동적으로 잘 불렀다고 한다.

임창수는 자신보다 주변에 잘 퍼주는 타입이었다. 술값이 많이 나와 후배들이 난처해하며 도와달라고 연락하면 바로 가서 계산해주는가 하면,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 많은 음악가를 후원하기도 했다. 현금 흐름이 가장 왕성하게 돌며 회사가 창사 이래 최고의 성과를 낼 때도 그는 자신을 위해 옷 한 벌 사지 않고 마치 노숙자에 가까울 만큼 대충대충 입고 다녔다. 그런 패션(?)으로 CEO 명함을 건네며 비즈니스를 했다. 이 때문에 회사 직원들이 난처함을 표하기도 했다. 일부 직원은 임창수의 절친 이수용에게 "남대문에 가서라도 제발 대표님 옷 좀 사입혀 주세요"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직원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임창수는, 겉모습보다 속마음이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눈에 보여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혀 꾸밈없는 그의 삶은 위에서 언급한 쌍문동 옥탑방 시절부터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결코 변함이 없었다.

임창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넥스트 시절 만난 여자친구와 몇 년 사랑했지만 헤어졌다. 이후 '사랑의 상처'가 너무 고통스러워 더 이상 연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창수에 대해 절친 이수용은 "한 분야에 대한 집착 또는 집요함, 끈기는 가히 최고"라며 "이미 90년대 초부터 창수는 이펙터면 이펙터 기타 리프면 리프 등 어떤 분야에서건 항상 남들보다 앞서갔습니다"라고 기자에게 전했다.

임창수와 친척이자 처음 서울로 온 임창수를 가이드 하는 등 생전 고인과의 관계가 남달랐던 임덕규는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정말로 흔치 않은, 다재다능한 아티스트"였다고 추억했다.

넥스트 기타리스트였던 안회태는 임창수에 대해 "기타리스트로서 락킹한 스타일, 특히 당시로선 세련된 플레이를 보여줬다""재주가 많은 사람인데, 갑작스런 비보에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넥스트 시절 이수용은 신해철과 임창수에게 "나는 짧고 굵게 살다가 빨리 갈 테니, 둘은 가늘고 길게 편한 삶을 오래오래 살다 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거꾸로 신해철과 임창수가 먼저 하늘나라로 투어를 떠났다. 얼마 전 제프 벡을 비롯해 기라성같은 전설들이 하늘나라 투어를 감행한 직후라 이승에서의 공허함은 더 클 것 같다.

넘칠 만큼 다재다능한 아티스트였지만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던 임창수는,

자신보다 남에게 주는 걸 더 좋아한,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지금은 SNS 시대인 만큼 사진촬영이 '일상'처럼 됐으나 임창수가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사진을 찍는 일이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기사 게재를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임창수의 사진을 구하는 게 힘들어 일단 네이버 블로그와 유튜브를 참조했습니다. 가족과 지인들에겐 알렸고, 추후 새로운 사진을 받으면 대체할 예정이니 독자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스포츠한국 조성진 기자 corvette-z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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