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아틀리에]① 단색화가 넘어 담화 작가로… 김택상 작가의 물과 바람이 그린 그림

연지연 기자 2023. 3. 2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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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황홀색 그대로 담는 담화작가 김택상
내 그림 그리는 건 물·중력·바람·시간
물의 특성 고민해 얻은 독특한 작업법 눈길

[편집자 주] 지난해 프리즈를 시작으로 서울은 아시아 최대 미술시장인 홍콩의 아성을 위협할 잠룡으로 거론된다. 기본기 탄탄한 한국 작가들과 갤러리, 거침없는 미술 애호가(컬렉터)까지 이젠 한국도 세계 예술 시장의 당당한 일원으로 평가받는다. 이에 조선비즈는 앞으로 한국을 넘어 해외까지 뜨겁게 달굴 작가와 그 아틀리에(작업실)를 조명해 본다.

경기도 일산 그의 작업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택상 작가.

지하철 3호선 정발산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20분. 일산에서 택시만 10년을 했다는 기사가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 생활 10년 만에 난생처음 와보는 곳이라는 장소에 도착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작은 밭고랑과 큼지막한 컨테이너 창고 몇몇이 보였다. 철문 한 켠에 스튜디오(STUDIO)라고 적혀있지 않았다면 작가의 아틀리에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곳이다.

철문을 열었더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커다란 난로와 고무 대야, 돌돌 말린 고무호스, 그리고 세탁기. 작가의 아틀리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붓이나 이젤이 없어 당황하던 찰나, 한쪽 벽에 켜켜이 걸려 있는 그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었다.

한국 단색화 후기 대표 화가로 불리는 김택상 작가는 허리를 굽혀 물을 내리고 있었다. 긴 장발에 작업복, 고무장화까지 차려입은 그 모습은 흡사 농번기를 맞아 모내기에 여념이 없는 농부 같았다.

“스스로도 농부라고 생각해요. 매일 이렇게 작업을 하거든요. 농부가 아침에 논밭을 돌보듯 매일 같이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작품이 나올 수 없죠.”

그는 붓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붓 대신 물로, 이젤 대신 바닥에 깔린 철판을 도구로 삼는다. 철판 위에 헝겊으로 산과 들의 지형을 만들고 캔버스를 올린 다음, 안료가 녹아든 물을 붓는다. 찰박하게 물을 채우고 안료가 가라앉아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산과 들의 지형에 따라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니 그 자욱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엔 캔버스를 말린다. 가을날 벼가 익어가듯 햇볕을 담고 어느 날 다시 또 물을 내리길 여러 차례. 이 작업을 수년간 반복하면 그의 그림 한 점이 탄생한다.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캔버스에 얇게 저민 안료가 스스로 맑은 빛을 낼 때, 그의 작품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꾸덕꾸덕한 물감을 쌓아 올린 유화, 여느 붓으로 그린 그림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의 작품을 사람들은 한국식 모노크롬, 한국의 단색화라고 말한다. 또는 그가 한국의 추상미술을 만들고 이끌었던 화가인 박서보의 뒤를 잇는 작가라고도 표현한다. 하지만 김택상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 작품은 ‘맑을 담’자를 쓴 담화(淡畵)입니다.”

지하철 3호선 정발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 만난 김택상 작가의 작업실. '김택상 스튜디오'라고 적혀있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컨테이너 창고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연지연 기자

작업실 분위기가 독특하다. 컨테이너 창고인데 퀴퀴하지 않고 빛도 잘 들어온다.

“이곳에 자리 잡기까진 쥐가 들끓는 곳에 작업실이 있었다. 2020년 교단에서 은퇴하면서 마침 받은 퇴직금으로 작업실을 사고 설비에 투자했다. 30년간 작가 생활을 하면서 늘 광(光)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작품을 잘 감상하기 위해 자연광과 인공광이 잘 조성돼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갤러리도 미술관도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짓는다. 그래서 작업실이라도 제대로,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여기선 시시각각 광량(光量)을 조정할 수 있다.”

김택상 작가가 작업실 천장의 롤스크린을 올리자 햇볕의 각도가 다르게 비췄다. 그때마다 작품 속 색깔도 다채롭게 변했다.

빛에 유난히 중점을 두는 것 같다. 이유가 있을까.

“어릴 때 초가집에서 자랐다. 주위엔 들과 산뿐이었고 냇가에서 예쁜 조약돌을 줍는 것이 어린 시절 놀이의 거의 전부였다. 냇가에 띄워진 꽃잎, 허리 굽혀 조약돌을 고르다가 마주한 하늘,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 비늘색, 하루 종일 그런 걸 보고 컸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서는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다. 얇고 투명한 자연의 색, 사실 자연을 논할 땐 색이라는 표현보단 빛깔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그리는 건 빛이니까 빛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자연을 마음에 담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30년 전엔가 다큐멘터리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본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화산 분화구 물빛이 강렬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 물빛은 그냥 파란색이 아니었고 무지개색이었다. 빛이 회절하고 굴절하고 산란하면서 그 황홀한 색이 만들어지더라. 그걸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진짜 내 것이 뭐지?’라는 생각에 골몰할 때였다. 사회 참여적 예술을 한답시고 선무당 노릇은 말자고 다짐하던 때다. 진짜 나를 생각했더니 천문학자가 되고 싶던 어린 시절 나, 들과 산에서 바라봤던 자연이 떠오르더라. 그때부터 작품이 시작됐다.”

독특한 작업방식도 자연에서 힌트를 얻었나.

“붓에 물감을 묻혀 쓱쓱 그려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 빛깔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고민하다가 알았다. 자연의 색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색이 조금씩 침잠되어 그 빛깔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감을 분해하고 해체하는 작업부터 했다. 물감은 안료 입자에 바인더(오일)를 섞어서 끈적거리게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다시 물에 풀어 넣는 작업부터 했다. 색이 있는 듯 없는 맑은 물을 만드는 것이다. 캔버스에 그 물을 올리고 빼고를 반복하면서 입자만 캔버스에 남도록 했다. 입자와 입자 사이엔 늘 틈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작업을 반복하는 만큼 더 많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천만 개의 공간에 빛이 들어가면 스스로 빛이 산란하면서 자연의 빛깔에 가까워진다. 가장 자연 빛깔에 가깝다.

그래서 내 그림을 그리는 건 중력, 물, 바람결, 일조량, 습기, 시간이다. 중력이 이끄는 물의 깊이에 따라, 물의 양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여러 날의 일조량과 습기에 따라 그림이 그려진다. 나는 적절하게 간섭할 뿐이다.”

김택상 작가가 작업실에서 그의 담화를 작업하고 있다./아르떼케이 제공

중력, 물, 바람, 햇빛, 그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으니 원하는 대로 그림이 나오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왔다고 할 때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럴 땐 그냥 옆에 걸어둔다. 그리고 다시 마음에 들어오는 날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지난날엔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나 마음에 쏙 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때 맘에 들지 않았다고 버렸다면 몰랐을 일이다.

재밌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시간을 두고 작업한 작품이 결과적으로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많다는 점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은 틀에 박힌 지난날의 방식이고 우연과 의지의 결합으로 나온 작품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미적으로 아름다울 때가 더 많다. 이 작업의 묘미다.”

그런데 단색화(한 가지 색 또는 비슷한 톤의 색만을 사용한 한국의 미학을 담은 그림)라고 했는데 색이 분홍, 하늘, 연두 등 다양하다.

“교단에서 내려오며 생긴 가장 큰 변화는 형광색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김 작가는 1991년부터 2020년까지 청주대학교 디자인 조형학부 교수로 일했다). 학교생활, 조직 생활은 내게 쉽지 않았다. 장발에 군복과 군화를 입은 나를 조직이 좋게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 시선만큼 나도 억눌려 있었던 것 같다. 색채가 과감해졌다.”

자연을 담고 싶다고 했는데 자연엔 형광색이 없는 것 같다.

“형광색을 인공색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자연 곳곳에 형광색이 있다. 물고기 비늘, 나비 날개, 쇠똥구리의 등판, 공작 깃털새까지.”

김택상 작가는 매일 아침 이곳에 나와 작업을 한다. 그런 성실성 없이는 빛깔을 제대로 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그의 아들과 함께 작업 중인 작품 한 점을 벽에 거는 사진./연지연 기자

단색화 화가로 소개하는데 다채롭게 색을 쓴다. 단색화 화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굳이 분류하자면 단색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고 나 자신도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단색화는 우리 고유의 겸양 문화를 담고 있다. 내 작업도 비슷한 한국 문화의 정서, 미학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단색화 사조에 내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굳이 분류하자면’이라고 전제조건을 달았다. 그 이유는 단색화의 정신을 발전·계승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세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단색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단색화 1세대와 나는 30년 가까이 차이가 나고 담고 있는 시대정신도 다르다. 나는 단색화의 전통을 새롭게 이어 나가야 하는 세대다.

그래도 이건 분명하게 하고 싶다. 단색화는 서양미술사에서 나오는 모노크롬페인팅과는 분명 다르다. 서양미술사조에 우리의 그림을 끼워 맞춰 해석하다보니 단색화를 두고 코리안 모노크롬페인팅이라는 부르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단색화는 ‘Dansaekwha’로 불러야한다.

분류와 정의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나는 아주 정말 제대로 된 언어로 내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 역사를 쓸 수 있겠더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하면 타인에 의해 왜곡될수 밖에 없다.”

이런 고민에서 나온 용어가 담화인가.

“맞다. 물 수(水)에 불 화(火) 두 개가 어우러진 맑을 담(淡)자를 썼다. 욕심과 욕망과 거리를 두고 마음의 평화를 잠시라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못에 비가 오면 흙탕물이 되지만 시간이 흘러 부유물이 가라앉으면 차츰 맑은 물이 되는 그런 ‘담(淡)’의 상태로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안료를 풀어 가라앉혀 빛을 품도록 하는 내 작업방식으로 보나,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정신으로 보나 이 글자와 꼭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언어학자인 홍가이 전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7년간 대화를 주고받으며 2013년쯤 작품을 개념화할 수 있었다.”

담화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개인 작가로서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싶다. 지금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게 싫고, 선배 세대에서 이룩한 걸 계승하고 저희 세대가 보완할 것은 보완해 나아가고 싶다. 이 바람이 이뤄지려면 우리의 미술 생태계와 함께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포츠, 대중문화 등 산업을 넘어 예체능 다양한 문화에서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미술 영역에서도 우리의 존재감을 세계에 확인시키는 역활을 하고싶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가치인 인류의 문화적 종다양성에 기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의 유일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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