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라…동백 ‘레드카펫’ 펼쳐진 장흥 [ESC]

한겨레 2023. 3. 2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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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여행 _ 전남 장흥
안중근·이순신 모신 ‘의향’
팔레트 느낌의 논·숲·바다엔
제철 삼합 등 먹거리 ‘잔뜩’
지난 17일 찾은 전남 득량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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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북반구 한복판인 한반도에선 봄은 북진한다. 꽃샘이 제아무리 매서웠대도 비가역적인 자연의 불변 이치다. 춘삼월 제주에 상륙한 봄이 추자도를 노둣돌 삼더니, 지난주 기어코 전남 장흥 땅에 두발을 디뎠다. 곳곳에 곧 터질 듯한 꽃망울과 수양버들의 신록이 한창이란다.

아직 봄이 요원한 서울 북부 위성도시 추위에 진력나서 나들이 삼아 봄마중을 다녀왔다. 그야말로 ‘남쪽으로 튀어라’(south bound)다. 길게 흥하라. 문림의향(文林義鄕:문인이 많이 나는 의로운 동네) 정남진 장흥(長興) 땅의 이름 뜻이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남도의 오랜 고장답게 요즘 봄내음이 한 가득이다. 장흥으로 내려가는 차창 사이로 달걀 노른자처럼 샛노란 오전 볕이 파고든다. 기름진 득량만 봄바다를 끼고 호남 명산 천관산을 등에 이고 선 장흥이다. 읍내로 탐진강이 그대로 관통하는 등 뭐 하나 모자람이 없다.

정남진의 동백, 슬프도록 아름다운

수도권 거주자에게 ‘남쪽’이란, 왠지 뭐랄까 이상향이나 도피처의 이미지다. 그러니 정남진은 오죽할까. 광화문에서 쭉 일직선을 그으면 북으론 중강진 남으론 정남진이 나온다. 장흥군에서 정확한 정남진 지점은 관산읍 신동리다.

논이며 밭·들·숲·습지·산·바다는 각각의 색을 품고 있었다. 작품에 한창인 수채화 팔레트와도 비슷한 느낌.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몸이 훈훈해진다. 정남진에는 비옥한 득량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남도의 봄 바다는 유독 그린과 블루를 섞어놓은 파스텔의 색이다. 타지역에선 보기 힘든 다양한 색의 향연이며 심지어 다른 계절의 장흥과도 다르다.

정남진 전망대 입구에는 안중근 장군(의사)의 동상이 있다. 왜 남도 땅 장흥에 황해도 해주 출생에 뤼순 감옥에서 서거한 안 장군의 기념물이 있을까? 잘 알려진 것처럼 안 장군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대신 장군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은 장흥에 있다.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위치한 사당 해동사는 안중근 장군을 모시고 그 옆 만수사는 순흥 안씨의 문중 선조 6인을 모신다. 해동사에는 장군의 영정과 친필 유묵 사본이 있다.

장흥에는 또 다른 항일 기념명소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복권 후 삼군수군통제사로 취임한 회령포다. 당시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뒤, 경상우수사 배설이 수군통제영을 장흥 회령포로 옮겨 피신했다. 통제영이라 해봤자 부서진 배 12척(영화에서 ‘아직 남아있다’는 바로 그 12척)뿐 아무것도 없었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진영을 가다듬고 전장을 명량으로 옮겨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는 대승을 거뒀다.

장흥에선 매화와 벚꽃뿐만 아니라 동백도 봄을 알리고 있다. 이름엔 ’겨울 동’자가 들어가는 동백은 이른 봄에 고혹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꽃이다. 특히 꽃송이가 툭툭 떨어진 모습은 봄이 오는 길을 환영하는 ‘레드 카펫’이라 보면 된다. 꽃잎 날리는 환상적 풍경은 없지만 대신 활짝 핀 모가지 채로 떨어진 붉은 동백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가수 송창식은 동백 떨어지는 모습을 “눈물처럼”이라 노래했다. 아쉽고도 슬프다는 느낌은 인지상정인가 보다.

사실 동백꽃이 떨어지는 이유는 벌과 나비가 아직 귀할 적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이다. 수분을 마치고 나면 다른 꽃들을 위해 먼저 떨어져 차가운 땅바닥에 깔린다. 그 희생의 성정이 고와도 너무 곱다.

2007년 단일 수종 최대 군락지로 한국 기네스 기록에도 등재된 국내 최대 동백 자생지가 천관산(723m) 자연휴양림 근처에 있다. 하늘같은 관을 썼다는 그 산이다. 동백숲 꽃 터널을 걷는 산책길도 있다. 20만㎡ 공간에 무려 2만여그루가 모여있다. 동백 터널을 이룬 봄그늘에 들어서면 더욱 잘 보인다. 매끈한 이파리 사이로 툭툭 붉은 꽃잎 노란 꽃술이 터지고 있다.

먹을거리가 풍요로운 전남 장흥에서 가장 핫한 메뉴는 ‘장흥삼합’이다. 한우와 키조개, 표고버섯을 곁들여 먹으면 감칠맛이 폭발한다.

낙지·주꾸미 등 맛있는 바다

눈만 즐거운 봄이 아니다. 제철 먹거리가 잔뜩 나는 맛있는 바다가 있다. 낙지와 주꾸미가 유명하고, 키조개·바지락·꼬시래기·갑오징어·미역·굴·피조개 등 다양한 해산물이 득량만 기름진 바다에 모여있다. 특히 청정해역이라 ‘산(酸) 처리’를 할 필요없는 김, 즉 무산김의 고향도 이곳이다.

정남진 부근 남포마을에는 아직 철이 끝나지 않은 굴과 키조개가 난다. 특히 연중 사리 때면 귀하다는 자연산 키조개가 눈길을 끈다. 할머니들이 봄볕 아래 키조개를 다듬고 있었다. 바다와 면한 작업장은 비록 고된 삶을 이어나가는 곳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풍경은 눈이 부신다.

산·숲·강·호수·바다를 품은 고장답게 좋은 식재료가 많다. 천관산 한우야 워낙에 유명하고 진한 풍미의 표고버섯도 국내에서 최고로 꼽힌다. 그래서 ‘장흥 삼합’을 빼놓을 수는 없다. 삼합이란 세 가지 어울리는 것을 이른다. 보통은 삭힌 홍어와 묵은지, 돼지고기를 이르지만 장흥에선 한우와 표고, 키조개(관자)다. 들·산·바다에서 나는 진미가 한데 모인 삼합이다.

고기를 구우며 옆에서 살짝 익힌 키조개 관자와 표고를 한 번에 싸먹으면 된다. 부드러운 고기, 졸깃한 관자, 탱탱한 표고가 각각 다른 식감과 풍미를 낸다. 이 세가지 구성 요소는 모두가 천연조미료로 쓸 만큼 감칠맛의 집합체다. 읍내 토요시장과 다리 건너 시가지엔 삼합을 파는 식육 식당이 많다. 때마침 갑오징어와 주꾸미 등도 한창이다. 바지락과 버섯을 잔뜩 넣은 국물에 살짝 데쳐 먹으면 그리도 좋다. 해맑은 봄볕에 몸을 기대고 나른한 포만 상태로 허리띠를 느슨히 풀어놓는 풍요로운 남도의 봄, 지금 장흥에서 만날 수 있다.

장흥 여행수첩  🚌

· 둘러볼만한 곳 = 40년 이상 편백나무가 오밀조밀 모여있는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에선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통나무주택, 황토주택, 한옥 등 숲속 숙박시설과 목재문화체험관, 목공건축체험장, 편백 톱밥 산책로 등 부대시설을 갖췄다.
소등섬 앞바다 남포마을에선 자연산 굴구이를 마지막으로 맛볼 수 있다. 봄기운은 반드시 꽃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신풍 갈대습지공원에 신록이 물들고 있다. 가지산(510m) 보림사는 인도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으로 불리는 선종 명찰이다.
경내 3층석탑과 석등(국보 44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17호)을 비롯해 동부도, 서부도, 보조선사 창성탑 등 보물이 수두룩하다. 절집 뒤에는 수령 400년이 넘은 비자나무 군락이 있다.
· 먹거리 = 장흥삼합은 토요시장 근처와 시내 부근에서 쉽게 맛볼 수 있다. 정남진 만나숯불구이가 유명하다. 식육식당이라 고기와 삼합세트를 구입 후 불판에 구워먹으면 된다.
봄조개라고 바지락회도 좋을 때다. 데친 바지락 살에 미나리 표고 양파 고춧가루, 막걸리식초를 넣어 무친 바지락은 탱글탱글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바다하우스가 잘한다. 득량만에서 많이 나는 주꾸미는 장흥읍 ‘삭금쭈꾸미’에서 맛볼 수 있다. 요즘은 주꾸미 샤부샤부에 새조개까지 즐기는 호사를 누릴 때다. 남도 아니랄까봐 곁들인 찬도 죄다 맛있다. 갑오징어도 데쳤다가 다시 먹물을 입혀 비벼준다. 감칠맛이 폭발한다.
소머리국밥을 잘 끓이는 한라네 소머리국밥에, 갖은 찬에 백반이 맛있는 시골식당도 있어 아침도 해결된다. 짜장면 하나를 시켜도 반찬 여럿을 깔아주는 경성식당, 장흥 겨울 특산물의 궁합을 자랑하는 매생이굴국밥을 맛볼 수 있는 황손두꺼비식당도 각각 이름난 곳이다. 장흥읍과 안양면과 용산면, 관산면 등에는 분위기 좋은 베이커리 카페도 많아 여행 중 잠시 쉬어갈 곳이 수두룩하다. 약 1200년 역사를 간직한 전통차 청태전도 따로 즐길 수 있다. 

글·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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