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시렁] 서먹한 사이, 산에 가면 친해질까

윤성중 2023. 3. 22.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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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사 R사에서 근무하는 이진우 매니저. 산에 가자는 말에 바로 나왔다.

친하지 않은 사람 혹은 싸운 친구와 산행하면 어떨까 상상했다. 그렇게 산에 가면 둘 사이를 채우는 어색한 공기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러면서 더 친해질까? 저절로 화해가 될까? 둥그런 능선을 같이 타고 나면 끝에 가서 부둥켜안을까? 산에 가면 긍정적인 기분이 충만할 때가 많으니까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거 좀 궁금한데? 옛날에 싸우고 연락 끊은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락했다. 처음에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몇 차례 전화하자 그제야 받았다. 나는 말했다. "야, 뭐하냐." 친구가 대답했다. "뭐냐, 너." 나는 용건을 얘기했다. "내일 산에 갈래?" 그러자 친구는 한참 뜸들이다가 대답했다. "내가 너랑 왜." "그냥. 산에 함 가자." "됐어." 전화가 끊어졌다. 다른 친구를 물색했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귄 불X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쾌활한 목소리를 전화를 받았다. "어이! 웬일이야." 나는 불쑥 얘기를 꺼냈다. "내일 나랑 산에 갈래?" 친구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왜 그래? 뭔 일 있어?" 나는 사연을 털어놨다. "이번에 사이가 어색한 친구와 산행하기에 관한 기사를 써야 해. 너라면 딱일 것 같아. 내일 시간 돼?" 친구가 답했다. "어, 그래? 잠깐만, 내일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 산 가려고?" "왜, 거기 있잖아. 예전 우리 아파트로 올라갈 때 갔던 산. 가자!" "내일 아무 일도 없긴 한데, 아, 어쩌지?" 나는 얼마간 졸랐다. 친구는 계속 뜸들였다. 나는 폭발했다. "됐어. 꺼져."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어색한 사이랑 산행하기란 불가능한 일일까? 며칠 동안 고민했다. 이번 달에도 등산시렁 기사가 펑크날 위기였다(지난 달에 휴재했다).

파격적이고 콘셉츄얼한 이 산행에 관해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나는 회사에서 팀장이라고 불린다), 이번에 우리, 그거, 하기로 한 거. 잘 되고 있는 거죠?"

경쟁사 R사에서 근무하는 이진우 매니저였다. 그와는 일 때문에 자주 연락한다. 하지만 친하지는 않다. 만나면 재미없는 얘기를 해도 대뜸 웃는 사이다. "하하하하하!" 이렇게 아주 크게. 그래, 바로 이 사람이다! 나는 그가 묻는 질문에 답하면서 슬쩍 얘기를 흘렸다.

"아, 네 그거 잘되고 있죠. 그건 그렇고요. 우리 오늘 저녁에 만날까요? 산에 잠깐 가시죠."

그는 당황했다. "네? 오늘이오? 갑자기요? 네, 네. 그.. 그러지요. 뭐. 시간 맞춰서 나가겠습니다." 성공했다. 어색한 사이끼리는 부탁이 잘 먹힌다는 걸 알았다.

전화를 끊고 몇 시간 후 우리는 각자의 회사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그의 회사와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웃었다.

"하하하하하!" "허허허허허!"

나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이고 매니저님. 늦게까지 계셨네요. 오늘 멋지게 입으셨는데요? 호카(트레일러닝화로 유명한 브랜드)까지 신으셨군요! 산에 가실 줄 알고 계셨구나!"

그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이고, 아니에요. 아닙니다. 팀장님. 갑자기 산에 가자니요. 하하하!"

"네, 제가 이번에 어색한 산행을 해야 하거든요. 사이가 어색한 사람과 함께. 매니저님이 딱이지 뭡니까."

"하하하, 그렇네요. 제가 딱이네요."

"그럼 갈까요? 멀리 가지 않을 거예요. 저기 회사 뒤에 있는 산에 잠깐 갔다 오시죠."

"네, 하하하. 가시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도중에 날씨 얘기를 했다. 뜬금없이 결혼 얘기도 했다(나는 그가 결혼한 걸 몰랐다). 그래도 역시 어색했다.

이진우 매니저의 회사는 앱을 기반으로 한다. 그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R사는 '소셜 러닝 플랫폼'이다. 달리기Run 기록을 측정하거나 저장할 수 있는 앱을 만들고, 그 안에 국내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관한 정보를 넣고 또 앱을 통해 참가신청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그는 여기 콘텐츠팀 소속이다.

그러고 보니 R사는 디지털 중심의 '뉴 미디어'였고, 내가 다니는 회사 월간산은 종이책을 메인으로 한 '레거시 미디어(전통 매체)'다. 우리는 최근 두 회사 간 뜻밖의 협약 건이 대두되면서 만났다. 올드&뉴!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에 관해 얘기 하려고 우리는 몇 차례 대면한 적이 있다. 이번이 두 회사의 성격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겼다. 나는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그에게 회사 일에 관해 물었다.

"매니저님이 몸담고 있는 회사도 우리와 비슷한 미디어 업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R사는 휴대폰 앱을 통해 콘텐츠를 생산한다. 월간산은 종이 책에 기사를 싣는다. 정보성 글과 이미지를 퍼뜨리는 방식만 다를 뿐 두 회사는 결국 같은 미디어 업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진우 매니저가 말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플랫폼 사업인데요. 뭐, 어찌 보면 콘텐츠 회사죠. 뿌리는 미디어 사업이 맞겠네요."

그렇다면 일하는 과정에 차이가 있을까? 나는 쉴 틈 없이 그에게 질문했다.

"아무래도 R사는 사업 영역이 디지털 쪽에 더 가까운데, 어떤가요? 회사 생활이 좀 치열한가요?"

"비슷한 앱이 많이 나와서 내부적으로 치열하다고 설명하긴 좀 그렇고. 업계 전체가 치열한 상황이라서 그에 따라 우리도 바쁜 편이죠. 우리는 스타트업이라고 할 만하니까요. 요즘 스타트업이 대개 그렇잖아요. 월간산은 어떤가요?"

"우리도 바쁘긴 한데, 치열하다고 하긴 뭣 해요. 한국에 등산 잡지가 많이 없고, 그리고 우리는 회사가 오래됐으니까, 고정된 업무 시스템이 있어 그에 맞춰 일하고 있죠. 취재 가고, 갔다 와서 기사 쓰고. 이런 식으로. 최근엔 우리도 디지털 쪽으로 변환을 조금씩 시도하느라 살짝 바빠지고 있어요."

늘 일 때문에 만난 우리는 서로의 업무에 관해 세세하게 얘기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새롭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걸 물어봤다.

"그렇게 바쁘면, 아침에 눈 떴을 때 회사 가기 싫을 때가 많겠는데요? '아, 오늘은 정말 회사 가기 싫다!' 이런 느낌이오. 어때요?"

"아, 최근엔 좀 그래요. 요즘 바빠질 때라서. 팀장님은 어떤가요? 일하러 가는 게 신나나요?"

"저는 신나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회사에 가기 싫다는 마음도 아니고. '빨리 가서 일처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요. 그 때문에 자동으로 몸이 움직인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면서 산에 올랐다. 회사 얘기를 하니 말이 술술 나왔다. 오르막이 나왔지만 힘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떠드느라 나는 걷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어색함? 그런 기분은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버린 것 같았다. 나는 초반의 어색한 분위기보다 그가 다니는 회사 분위기에 관심이 쏠렸다. 스타트업을 표방한 사무실 분위기는 어떨까?

"스타트업은 자유로울 것 같아요. 새로운 생각을 마음껏 말하면서 그걸 바로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 절대 그렇지는 않아요.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해도 우리는 그걸 실행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걸 따져요. 머릿속 생각을 실생활에 실현시킨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어떤 콘텐츠를 개발해 앱에 내놓으면 꼭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우리 일 중 많은 비중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요. 문제 발생, 해결, 문제 발생, 해결. 이런 과정이죠. 그래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굉장히 신중하게 접근해요.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에요."

"와, 그건 또 우리와는 다른데요? 그리고 의외예요. 스타트업은 굉장히 크리에이티브하고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우리는 재미있는 아이디어 떠오르면 바로 실행해요. 우리는 문제가 발생할 게 없어요! 책에 재미있는 기사를 내면 그걸로 끝, 독자 반응이 좋지 않다면 안 하면 되죠. 혹시 그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게 PPT(Power Point의 약자. 발표자료를 만들 때 많이 쓰는 컴퓨터 프로그램 명) 인가요?"

"오!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PPT가 없으면 안 돼요.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려면 이걸 함께 실현시켜나갈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말로만 할 순 없어요. 정리된 글과 이미지를 보여 주면서 '이거 어떠냐?' 하는 게 일이 진행될 확률이 크죠. 그래서 PPT 작업을 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들이 버려져요."

"우리는 PPT를 거의 쓰지 않는데!"

"와, 우리 서로 회사를 바꿔서 일해보면 어떨까요?"

"그럴까요? 이번 협업 때 그런 조항을 넣어볼까요? 와하하하하!"

"재미있겠네요. 으하하하하!"

즐거웠다. 산이 아니었다면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공원에서? 커피숍에서? PC방에서? 맥줏집에서? 내 성향으로선 우리의 이런 대화가 산 말고 다른 공간에선 쉽게 나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사이의 남자 둘이 공원에서 만나는 건 좀 그렇고, 커피숍은 딱딱하고, PC방은 상대에게 집중하기 어렵고, 맥줏집이 그나마 가능성 있겠는데, 나는 술을 잘 못 마시니까 제외! 다 탈락시키니 나에겐 산밖에 남는 게 없었다. 이진우 매니저도 즐거웠던 모양인지 헤어지면서 말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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