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3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이영관 기자 2023. 3. 2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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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4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이달 독회 추천작은 2권. ‘우리의 환대’(장희원) ‘툰드라’(강석경)입니다.

우리의 환대
장희원. /안희진씨 제공
툰드라
소설가 강석경/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정과리 문학평론가

◊장희원 ‘우리의 환대’

한국적 ‘글쓰기의 영도’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는 아주 이색적인 작품들을 모아 놓고 있다. 여기에는 사건이 없고 상황만이 있다. 사건이 원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배경에는 엄청나게 격렬한 사건들이 큰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여파로 현재 인물들의 삶은 매우 곤란하고 궁핍한 처지이다. 그런데 소설 텍스트의 문면에서는 그 사건들은 좀처럼 발설되지 않는다. 은폐되거나 얼버무려지거나 함구되거나 외면된다.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격한 일들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인물들은 마치 그것들을 병풍 그림들처럼 스치며 관조한다. 따라서 화자 및 주인공의 묘사에는 감정이 묻어나지 않고 의미 탐색도 없으며, 단지 막연한 느낌들만이 있다. 그 느낌들은 ‘열적은’ 상태로 환원된다. 그리고 뜨겁거나 차가운 사물들, 타인들을 낯설어 한다. 따라서 텍스트의 글들은 무색무취하고 파삭파삭하다. 반면 얼마간의 행동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작품은 구성의 실패 쪽으로 기운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이런 상태의 글쓰기를 글쓰기의 ‘영도’라고 지칭하고 “순수하게 가리키기만 하는 글쓰기écriture indicative, 즉 무가(無價)적amodal 글쓰기”(‘글쓰기의 영도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1953)라고 풀이하였었다.

한데 이런 글쓰기의 원인에는 매우 넓은 스펙트럼이 있는 것 같다. 롤랑 바르트가 관찰한 서양에서의 ‘영도 현상’과는 다른 게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장희원의 경우에는 현재 한국의 정치·사회적 정황이 일차적인 원인이다. 즉 지나치게 격렬한 심성의 표출이 미만해져서 일종의 관성이 되어버린 상태가 그것이다. 이런 격렬한 움직임이 특정한 사회적 효과를 낳는다면 움직임엔 가속이 붙는다. 가속이 붙으면 덩어리에 무게가 가중되며 어느 순간 움직이기가 버거운 상태에 이른다. 한때 한국의 정치판은 저 ‘특정한 정치적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써먹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 보니 때마다 벌어지는 폭력과 고함과 혼잡이 일상화되었고 이제 그것 자체가 그냥 삶이 되었다. 즉 모든 행동들은 관성화되었고, 아무런 효과나 의미가 없다. 충격도 반성도 없다. 그것들은 그냥 벌어지는 것이다.

장희원의 무색의 글쓰기는 이 사회적 정황에 ‘사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사후적으로’이라는 말은 그 결과만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에 대한 정직한 인식의 실례를 이룬다. 이 안에서 자질구레한 사생활의 세목들을 물신들처럼 만지작거리는 현재 한국 소설의 일반적 관행과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물론 정직한 게 항상 올바른 건 아니라는 점도 덧붙여야 하리라. 문제는 이 서로 다른 글쓰기들이 독자와 어떤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으며, 독자의 인식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정황의 일상적 폭력화, 혹은 폭력의 무감각화를 우리는 사회적 환경에서의 엔트로피(혼잡도)의 비정상적 증가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혼잡도의 증가는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린다. 장희원은 놀랍게도 관계의 붕괴를 넘어서 관계의 전도를 보여준다. 표제작인 ‘우리[畜舍]의 환대’를 예로 들어보자.

고전적 정신분석은 가족 관계를 모형으로 성립하였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자라나는 가운데 어느 순간 억압을 감지하며, 이 부정적 상황의 원인을 캐묻는다. 탄생에서 가장 가까운 시간대에 아이는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판단한다. 즉 지금의 부모는 나를 지극히 보살피던 진짜 부모가 아니라, 나를 납치한 악당 부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어린이의 이런 의식을 ‘업동이enfant trouvé’의 사유라고 불렀다. ‘우리의 환대’에서는 이 관계가 완벽히 전도되어 있다. 즉 여기에서는 호주로 유학 간 아들을 만나러 간 부모가 아들의 변신에 당혹하는 상태에 빠져든다. 간단히 말해 “아들이 사라졌다!” 혹은 “이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다!” 부모는 지금 심리적으로 ‘고려장’을 당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의 원인은 앞의 언급들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작품은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서 아주 행복했던 과거를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그런 시절이 사라졌는데, 그냥 사라지기만 한 게 아니고, 세상의 주도권이 ‘아들’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여전히 학생이다. 그 결과는 작품 제목이 그대로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吾等’에서 ‘畜舍’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이 현상이 무작정 개탄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무심결에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일 게다. 핵심은 이 현상이 과거의 인습과 현재의 야만상을 동시에 반성케 한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의 마지막 대목을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글쓰기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것이다. 사회 자체가 궁지에 몰린 것이다. 오늘의 작가들은 그것을 잘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비-문체’를 탐구할 것인가? 아니면 구어 문체로 갈 것인가? 즉 ‘영도’로 갈 것인가? 아니면 ‘말의 수준degré parlé’으로 갈 것인가?, 이 문제는 요컨대 사회의 절대적인 동질적 상태에 대한 예견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시민 사회가 실질적으로 단일성universalité의 상태에 놓여야만 보편 언어langage universel가 가능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작가들은 잘 알고 있다. 신비적 단일성이나 명목상의 단일성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재의 모든 글쓰기에는 두 개의 판이 부딪치고 있다. 단절의 운동이 있고 도래를 향한 운동이 있다. 이것은 모든 혁명적 상황의 구도 그 자체이다. 이 상황의 근본적 모호성은, 혁명이 획득하고자 원하는 것의 이미지 자체를 그가 무너뜨리고자 원하는 것 안에서 길어올려야만 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현대 예술 전반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글쓰기도 역사로부터의 소외와 역사를 향한 열망을 동시에 내장한다. ‘필연’으로서의 문학적 글쓰기는 언어들의 찢김을 증거한다. 이는 계급들의 분열과 불가분리의 것이다. 다른 한편, ‘자유’로서의 문학적 글쓰기는 이 찢김에 대한 의식이며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 그 자체이다. 끊임없이 문학 고유의 고립성이 가진 유죄성을 유념하면서, 문학적 글쓰기는 말들의 행복을 탐식하는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도 하겠지만, [정반대의 방향으로] 새로운 꿈의 언어를 향해 질주하기도 한다. 후자의 언어의 신선함은 일종의 이상적인 예견을 통해, 언어가 더 이상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창세기의 완벽성을 그려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글쓰기들이 새로운 문학을 세울 가능성은, 그것이 하나의 기획으로서 자신을 정비할 때만이 자신의 언어를 발명할 수 있다는 문제가 어느 정도로 진척되느냐에 달려 있다. 문학은 언어의 유토피아가 되어가고 있다.”

길게 인용한 것은 장희원의 소설이 중요한 분기점에서 호랑이의 안장에 올라탔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안장에 오른 것이 작가라면, 그 호랑이를 여하히 몰고 가느냐 하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강석경 ‘툰드라’

노작가의 귀환이 의미하는 것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꽃샘 추위는 봄을 재촉하는 간지럼이었다. 이제 곧 아지랑이가 오를 것이다. 자연의 이치다. 한데 여기에서 시간을 빼보자.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흐르지 않고, 겨울이 통째로 그냥 봄이다. 추위 속에 열탕이 끓고, 햇살이 냉동고다.

이런 구상을 한 사람들이 옛날부터 있었다. 그런 생각의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아이 밴 노파’ 점토에서 보인다. 러시아의 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은 이 테라코타를 두고 ‘신생아를 품은 죽음’이라고 풀이하고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노장 강석경의 문학적 열정이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숲속의 방’이 큰 화제를 일으켰던 1986년 이후, 난해한 침묵 속에 빠졌었다. 13년 만에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출간하고, 이후 다문다문 소설을 상자하였다. 그리고 이제 소설집 ‘툰드라’를 냈는데,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대로 멀찍이 놓인 징검돌들처럼 35년 사이를 띄엄띄엄 잇고 있다.

그러나 작품들을 읽어 보면, 이는 분명 처절한 귀환의 도정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요컨대 그는 자기에게 닥친 요령부득의 멈춤으로부터 삶으로 귀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귀환 속에서 작가는, ‘아이 밴 노파’처럼 죽음의 아가리에서 생명이 튀어나오기를 꿈꾼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의 작가는 ‘시간’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때의 계기와 지속성을 끊임없이 묻는다. 문제는 이 그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같을 수가 없다는 것. 왜냐하면 자연은 순환하지만, 인간은 단 한 번뿐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적인 삶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경로’에 일방적으로 갇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생명으로의 역진 루트를 찾을 수 있는가? ‘아이 밴 노파’는 시간이 없어도 그걸 해냈는데, 그 증거는 바로 그녀의 웃음이다. 배가 불룩한 할머니가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가?

동양의 선사들은 그런 생명의 모습을 미지로 남겨두고 자주 일갈을 했다. 스님이 담뱃대로 제자의 머리를 때리며 말한다. “이 놈아. 네 똥이 부처다.” 이마에 멍이 든 제자 중 누군가는 깨달음을 얻고 그도 제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긴다. 하지만 누군가는 영원히 깨닫지 못해 면벽을 하고, 손가락을 자르고, 옷을 발기발기 찢고... 기타 등등을 하다가 죽는다.

우리의 작가는 능청스러울 수도, 해탈의 초입에 머무르는 걸 반복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간의 알고리즘을 계속 찾는다.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절해고도의 자아”(p.113), “굶주린 허무의 나비”(119)는 어떻게 “봄의 변방”(p.118)에서 봄 한 복판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인용한 대로 그의 물음은 시시각각으로 이미지들을 탄생시킨다. 그렇게 해서 생명의 꽃그림들이 지면을 부단히 채색한다. 이미지들은 현실과 작별할 수 있게 하는데, 그렇지만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효과는 만만치 않다. 작품의 결락은 독자를 부추긴다. 독자는 그 안에 묘사된 비유들의 힘에 매혹되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경로를 스스로 찾고 싶어진다. 독자의 의욕은 불끈불끈 솟는다. 그게 ‘툰드라’에서 피어나는 “석양꽃”들이다. 작가에서 독자에게로 생의 의지가 이월되는 것. 작품의 승리는 거기에 있다.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마르트 로베르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아주 요령 있는 풀이를 제공할 것이다.

“문학은 그 가장 깊은 의미에서, 작품들과 작가들 둘레에 특별한 경배와 열정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이미지들, 정념들, 생각들의 뜨거운 순환 안에서만 존재한다. 사람들이 그걸 인정하건 안하건 관계없이 문학은 언제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신앙, 거의 종교적인 열정을 전제하노니, 그 열정은 가장 차분한 정신에게조차, 인생을 표현하고 의미부여하는 작가들의 천품을 두고 작가를 존경하도록 인도한다.” (Marthe Robert, ‘인쇄물의 독재 La tyrannie de l’imprimé’, 1984)

마르트 로베르가 언급하지 않은 게 있는데, 그것은 저 “이미지들, 정념들, 생각들의 뜨거운 순환”이 작가와 독자를 같은 회전 목마대에 올린다는 것이다. 그게 없다면 작가에 대한 독자의 순정은 한 여름밤의 환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뒷 담화

두 가지를 추기한다.

임국영의 ‘헤드라이너’(창비)를 후보작에 올리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다. 한 위원은 이 소설집에 ‘B급’이라는 등급을 매기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원래 영화에서 비롯된 ‘B급’이라는 용어의 뜻은 ‘저예산으로 다발 상영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와 더불어 널리 알려진 이 용어는 “비관습적인 소재와 제재, 그리고 일탈적인 주제가 기술적인 미숙함을 통해 거칠게 표출되어 있지만, 미래의 예술을 예견케 하는 것” 정도의 뜻으로 흔히 쓰인다. 임국영의 소설은 후자의 정의에 적합하다. 그의 혁신은 모든 연령대의 인물들을 철없는 모험가들로 환원함으로써 세대 간의 간극을 무화시켰다는 것이다. 엉뚱한 얘기 같지만, 실은 이런 게 새로움의 시작이다. 언제까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을 따지고, 소년을 어여삐 여기며, 청년에게 기대를 걸 것인가?

그러나 그 덕분에 임국영 소설의 인물들은 얼마간 돌발적인 놀이공간 속에 위치하게 된다. 소설집 하나로 사회의 인습과 제도적 장벽들이 무너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울타리 바깥에서 벌이는 놀이는 충동적이고 자족적이며 향락적이다. 충동이 좌절되어 슬픔이 터지고 세상이 야속할 때조차도 그렇다. 또한 ‘B급’의 장래는 불투명하다. 같은 상상력과 같은 구도의 ‘A급’이 출현하면 금세 생명력을 잃고 만다. 작가 스스로 다리를 건너가야 하리라.

또 하나의 얘기는 오늘날 작가들의 교체 주기가 급격히 짧아지고 있는 사정에 관한 것이다. 4.19세대의 작가들은 문학사에 남을 분들이 다수이다. 1990년대 작가들은 30년 동안 풍미했다. 21세기 들어 작가들의 교체 주기가 좁혀지더니, 이젠 그게 5.6년대로까지 좁혀진 모양새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소설들이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한국 소설은 1990년대의 ‘작은 이야기’ 파문 이후, 점점 더 사소해지는 쪽으로 나아갔다. 즉 혁신적이긴 커녕 점점 ‘재능화’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작가들이 독자와 싸우는 걸 포기하는 대신, 출판사의 ‘스타트 업’ 관리망 안에 포섭되어 갔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에 힘입어,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한국 문학인들은 국가의 재정 지원에 빈번히 의존해 왔다. 그게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독자와의 전쟁에서 실지(失地)한 것은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각개 약진을 통해 획득하던 국가 재정 지원은 이제 출판사의 기획관리라는 판을 덧댐으로써 차원을 바꾸었다(이건 유사한 문학적 이념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같은 장소에 모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얘기라는 걸 부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소설 독자는 지난 2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 간곡히 말하지만, 책 속지에 손글씨 인사말 인쇄해 넣는 게 독자와의 만남이 아니다. 독자에게 영합하지 않고 독자의 뒤통수를 치고 독자의 생각을 경신하고, 그 경신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글쓰기의 전술을 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은 박남철이 ‘독자놈들 길들이기’(‘지상의 인간’, 1984)라는 시를 쓴 것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독자와의 격렬한 대화에 도전해야만, 독자도 살고 작가도 산다고 생각한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런 문제의 심각성에 꼭 작가와 문학 종사자들만이 원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게 당사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직업 시장에서 지난해 하반기 가장 높은 해고율을 기록한 업종은 ‘예술, 엔터테인먼트, 레크리에이션 산업’의 3.1%라고 한 언론(포춘코리아(FORTUNE KOREA), 2023.1.11)은 전한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연방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실제로 해고될 가능성이 13배 더 높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만큼 먹고 살기가 힘든 게 소위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형편이다. 한국처럼 적은 인구의 시장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런 위험 직종에 발을 내디뎠을 때 당사자들은 저마다 결심한 게 있었을 것이다. 그 결심이 결실을 이룰 수 있기를 정말 바란다.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외부와의 대화가 그 결과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이다. 문학의 외부는 독자인가 회사인가? 게다가 당장의 결과가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이 분야의 특성적 문제에 해당한다. 지난 세기에 때마다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주기적으로 출현했다. 그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작가가 있는가, 조사해 볼 일이다. 외부와의 대화를 전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소이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김연정 객원기자

◊장희원 ‘우리의 환대’

한 때 사랑했던 사람. 더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람.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났기에 더러는 잊고 살았던 사람.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만날 수 없게 된 망자. 어느 날 현재의 배우자 무릎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혼자 여행하고 싶다고 말하고 떠난다. 옛 사랑과 함께 했던 장소를 찾는다(‘남겨진 사람들’). 왜? 소설의 화자는 말하지 않는다. 얕은 잠의 꿈처럼 단속적인 기억을 더듬으며 걷고 숨 쉬고 잠시 쉬며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다. 왜? 화자는 말하지 않으나 소설은 끝내 말한다. 말하므로 소설이 끝나면서 왜? 라는 질문도 함께 끝난다. 그러니 끝까지 다 읽은 이더러 이제 말해보라고 하면 말할 수 없다. 말하는 순간 소설이 한 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장희원의 소설들은 이렇다.

역시 한 친구가 죽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이사했다며 딸의 두 친구를 초대한다. 친구 아버지와 두 친구들 사이에도, 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별다르다고 할 말은 없다. 친구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모아 태우고, 딸의 친구들에게 양배추를 잔뜩 싸 주며 배웅한다. 친구들은 돌아오는 길에 어둠 속에 반짝이며 떨어지는 눈을 보면서 친구 아버지가 태우던 모닥불 불빛을 떠올린다(‘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친구 아버지도 딸의 두 친구도 별달리 한 말은 없었는데 그들의 아니 한 말이 들린다. 그게 무엇이더냐고 읽은 이에게 물으면 역시 말할 수 없다.

장희원의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말할 수 없을 때거나 말하지 않을 때 비로소 전해지는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아들 일행이 보여준 무조건적 환대의 강렬한 여운에 대해, 그런 환대 밖에서만 살아온 아버지는 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움찔움찔 어떤 빛을 마주하는 것으로써 말을 대신한다(‘우리의 환대’). 장희원의 소설은 없는 것에 대한 말일 뿐 아니라, 없어 보이는 것을 있게 하는 말하기이기도 하다. 인종을 초월해 너나없이 코로나 의료진들에게 집단박수를 보내는 저 성숙한 미국시민에게 ‘없는 듯 보이는’ 인종차별의 ‘있음’까지 안 보이게 말한다(’Give me a hand’). 말하지 않을 때라야 더 선명하게 전해지는 말하기다.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대충 말하기에 대한 거부며, 자기와 타인을 기만하는 확증편향의 언어에 대한 부정이어서, 이러한 말의 방식은 다시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여 말의 신념화를 끝없이 유보하거나 와해시키는 전략을 따른다.

장희원의 소설은 그래서 평이한 문장이 주는 밀도에 주목하게 한다. 글자 하나마저도 그 밀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서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목적한 곳에 정확히 승객을 내려놓는 노련하고 매혹적인 이동장치가 그의 소설이다.

말이 부족할 때, 즉 말이 가난해져 위선의 말 따위에 기대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말에 의해 밀려났던 말이 급습하듯 복귀한다. 은연중에 혜주는 미웠던 아버지의 언어로 말해버리고(‘혜주’), 현주는 답답했던 어머니의 언어로 말해버림으로서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되기도 하니까.(‘기원과 기도’)

“그런 거잖아요.”라는 작가의 뚝심 있는 태도, “그게 뭔지 꼭 말해야 아는 것은 아니잖아요.”라는 그의 되물음이 소설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듯 보인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게 독자인 나에게 당도했으니까. 말이 가난한 소설은 복이 있나니…….

◊강석경 ‘툰드라’

소설집에 실려 있는 단편 ‘가멸사’에서는 두 인물이 무장사지를 찾아간다. 무장사라는 신라의 절이 있던 곳. 흔적만 남은 곳.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에서는 인물들이 감포 바다의 문무대왕릉을 지난다. 앞의 단편에서는 간첩죄로 상처받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인물이 등장하고, 뒤의 단편에서는 올가미 같은 인연에 얽혀 보름 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인물이 나온다.

상처와 근심을 안고 흔적뿐인 깊은 절터를 찾거나 고대의 왕릉을 지나는 애달프고 고즈넉한 풍경이 어딘지 낯익다. 그 풍경은 두고 온 고향이거나, 한 때 친했으나 세월 따라 멀어지고야 만 친구를 떠올리게도 하여 비애까지 깃든다.

무장사지를 찾아가면서 소설은 가멸, 즉 소멸을 이야기한다. 상처 난 가슴에 서린 원한의 가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얽힌 인연에 번민하면서 소설은 업보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현실의 고통과 갈등을 저 멀고먼, 무려 2천 5백 년 전 사성제(四聖諦)의 법단 위에 올려놓는다. ‘툰드라’의 시간은 이처럼, 아득히 먼 정등각(正等覺)의 세계를 지금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가 하면, 지금 우리 앞의 번뇌라는 것도 보리(菩提)에 다름 아니라는 누천년 전 지혜의 말씀에다 불쑥 연결한다.

이러한 서사에 어울리고도 꼭 필요한 배경이 우리에겐 신라며 경주가 아닐까. 무수한 소멸의 흔적이 역설적으로 크고 생생한 곳. 오래되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곳. ‘툰드라’의 몽골초원, ‘보루빌에서 만난 우리’의 보루빌, ‘오백 마일’의 광저우가 어찌 신라가 아니며 사바세계이면서 니르바나인 경주가 아닐까.

어째서 ‘툰드라’의 낯익음이 애틋했는지 알겠다. 강석경이 작가로서의 ‘기나긴 길’을 업(業)으로 살아왔다는 것, 저녁마다 능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경주에 살고 있다는 것, 무려 37년 만에 출간된 소설집이라는 것, 무엇보다 별이 사라진 하늘을 더는 바라보지 않게 된 시대에 오늘도 고개를 들어 먼 별빛을 응시하는 작가이기 때문인 것 같다. 루카치의 별 하나가 사라졌다고 하늘의 모든 별들이 사라진 것은 아닐 터, 강석경이 바라보는 별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전하다.

37년 전에 등단하여 그동안 하늘의 별이 사라졌다는 핑계로 온갖 무능의 작태를 정당화하려했던 나 자신에게 다시 고개 들어 잊었던 밤하늘을 보게 하니 ‘툰드라’의 낯익음이 실로 반갑고 애틋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잊지 말아야 것은 그 별이 소멸 뒤에도 있는, 소멸 뒤에라야 있는 진공묘유의 별이라는 점이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오종찬 기자

◊장희원 ‘우리의 환대’

누군가 가볍게 툭 던진 말을 되씹는 경우가 있다. 정색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더 집중해야 하고 자세하지 않기 때문에 상상해야 하는. 장희원의 소설을 읽으면 받는 느낌이 그렇다. 긴장하지 않고 말하는 그의 어투가 읽는 사람을 더 긴장하게 한다.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 아버지의 초대를 받아 하루를 보내거나(‘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아버지를 간호하는 친구의 복잡한 심정을 들어주거나(‘혜주’)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 방심한 것 같은 문장을 통해 전달된다.”그게…… 표현을 못 하겠어. 그때도, 지금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투병 중인 아버지를 돌보는 혜주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이상한 기분에 대해 하는 말이다(‘혜주’). 장희원의 인물들은 자주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고, 번번이 누구인지 모르는 타인의 시선을 느끼고,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복잡한 감정들이 떠도는 장소가 인간의 내부라는 것, 일어나는 무슨 일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순간(의 지속)이 핵심이라는 걸 사유하게 하는 단서가 문장 곳곳에 매설되어 있는데, 대개 독자들은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다.예컨대 독자는 이 책의 표제작인 ‘우리의 환대’의 재현과 처지가 같다. 그는 아들을 모르고, 아들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벌어질지 모르고,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모르는 채로 의혹과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끌려간다. 아들과 아들의 동거인들은 먼 곳에서 온 그들을 손님처럼 극진히 환대하지만, 아무리 환대해도, 손님인 그들이 그곳을 집(가정)이 아니라 우리(축사)로 여길 때, 아들과 아들의 동거인들이 주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환대는 부정당한다. 환대의 거부는 ‘집’을 ‘우리’로 만든다. 저 먼, 과거의 자기 집에서 가지고 온,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은 상자가 이 가까운, 현재의 아들 집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결말은 날카롭고 우울하고 의미심장하고 예언적이고 무섭기도 하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이명원 기자

◊장희원 ‘우리의 환대’

표제작인 ‘우리의 환대’는 그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책의 제목으로는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동명의 단편 소설에서는 ‘우리’가 ‘축사’인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제목은 축사의 환대. 축사 안에 있을 것은 당연히 짐승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짐승들의 의미는 또 당연하지가 않다. 당연히, 겹이 있겠다. 짐승은 무엇을 짐승이라고 하나. ‘우리의 환대’는 어쩌면 그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장희원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짐승들이 모여 있는 축사가 아니라 ‘우리들’의 우리로 읽힌다. 왜일까. 인간 사회와 짐승 축사의 무차별성이 고스란히 읽혀서일까.

호주에서 어학연수 중인 아들을 찾아가는 부모가 있다. 아들이 잘 지내고만 있으리라고 여겼던, 그저 짐작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아들의 일상을 생각했던 부모에게 아들이 살고 있는 집의 풍경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늙은 호주 남자와 청소 일을 하는 한국 여자아이와 동거하고 있는 아들. 그 이상한 동거의 결속감은 그때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일순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모욕과 폭력이 완전히 민낯으로 드러나 버리는 순간이다. 나와 너, 우리, 우리들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서슴없이 가했던, 가하면서도 가한 줄도 몰랐던 폭력은 아들에게 전하지 못한 박스처럼 주인공인 화자 부부에게 영원히 남을 것이다.

‘우리의 환대’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낯선 관계의 결속감은 그 형식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내용으로도 보여진다. 사고로 죽은 친구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상의 하루. 맺어진 듯 풀어진 듯 ‘우리’가 되어 있는 그들의 어느 한순간. 그런가하면 어머니의 시체가 실린 차 트렁크를 폐차해야하는 형제. 그들 사이에서 이어졌다 끊겼다 하는, 마치 점멸하는 것 같은 관계의 순간들.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환대받는 짐승일까, 거절당하는 사람일까.

◊강석경 ‘툰드라’

소설집의 표제작인 ‘툰드라’는 시인 허연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툰드라와 소설 사이에 시가 있었다는 얘기다. 소설과 작가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시로 새겨진 툰드라, 작가의 삶으로 새겨진, 혹은 작가의 삶에 새겨진 툰드라가 있었겠다. 작가가 말하듯 툰드라는 ‘수만 년 동안의 동토’ 그러나 죽지 않은 땅이다. 죽지 않은 땅이어서 여전히 ‘인고하듯 무거운 뿔을 이고 풀을 찾아 떼 지어 가는 순록들’ 이 있는 곳이다. ‘장엄한 기나긴 길’이며 ‘실존 자체로 각인’된 길이기도 하다.

소설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수록된 소설들 보다 먼저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 소설집이 작가가 펴낸 35년만의 것이어서이다. 이 소설집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작가의 길일 터. 그래서 이 소설집은 한편 한편을 나누어 뜯어보기보다는 전체로 보는 것이 더 옳다. 어디로부터 시작하여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소설집에서 일관되게 읽히거나 느껴지는 단어는 ‘구도’. 단어만으로는 참으로 거창하다. 그러나 ‘구도’ 또는 ‘구도의 길’이 구체적인, 현실적인 삶과 만나게 되면 이 단어는 거창하기보다 비루해지고, 성스럽기는커녕 속되어진다. 멀리서보는 순록은 아름답고 툰드라의 땅은 장엄하지만, 순록의 삶은 고달프고 툰드라의 땅은 어쩔 수 없이 동토인 것처럼. 그 언 땅에 새겨지는 언 발자국이 아마도 소설의 길, 작가의 길일 터. 번뇌를 깨고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어쩌면 남은 것은 언 발자국과 그 발에 동상으로 남은 흔적뿐일지도.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래도’, ‘그래서’ 멈출 수 없다는 것.

이 소설집에는 1987년에 발표된 단편소설 ‘석양꽃’이 실려 있고,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2022년 11월에 발표된 ‘툰드라’가 있다. ‘석양꽃’은 무슨 일인가로 상처를 입고 사찰에 머물고 있는 한 여자와 그를 둘러싼 사찰 식구들의 이야기이다. 상처와 상처를 보듬는 순간들은 그림처럼 그려진다. 잔잔하고, 흐릿하고, 따듯하다. 툰드라는 ‘불륜’ 관계인 연인이 몽골여행을 하는 이야기이다. 관계는 일종의 상처. 이 소설에서 역시 상처는 ‘석양꽃’에서처럼 보듬어진다. 소설의 무대가 사찰이 아니라 몽골이라는 나라로 바뀌었지만, ‘석양꽃’에서나 ‘툰드라’에서나 작중 인물들이 구도의 장소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것은 다름이 없는 듯하다. 구도를 희구하는 사람들, 그 과정에서 상처의 맨살을 드러내는 사람들. 툰드라에서의 상처는 정면으로 직시된다. ‘석양꽃’에서 말과 말 사이에 숨어있던 것들이 ‘툰드라’에서는 발화되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말라’

‘석양꽃’에서는 스님의 입을 빌려 그렇게 말하던 등장인물이 ‘툰드라’에 이르면 ‘넌 와이프랑 별 문제없으면서 왜 나를 만나고 다른 여자를 만났어’라고 직설적으로 묻는 여자로 대체된다.

보다 더 직접적인 질문은 보다 더 직접적인 대답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질문이 겹으로 쌓이고 쌓이다보면 발화되어 나오는 질문은 가장 원초적인 것이 아닐까. 혹시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도의 질문은 아닐까. 어떤 식으로 발화된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을 들여다본다면.

그러므로 작품집 툰드라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스토리 라인이라던가 작품들로부터 던져지는 이데올로기적인 질문들은 아닌듯하다. 그 작품들이 쓰여진 세월 자체에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삶은 나의 그리움’이라고 말하는 작중 화자의 말이 있다. ‘자연’에 방점을 두기 보다 ‘그리움’에 방점을 두면 어떨까. 수만 년을 동토에서 걸었어도 멈출 수 없는, 멈춰지지 않는 어떤 ‘희구’. 말하자면 살아있는 것. 다시 또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또 묻고 있다는 것.

한 세월이라고 말해도 좋을 시간의 작품들을 공들여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김연정 객원기자

◊장희원 ‘우리의 환대’

국어사전에서 ‘우리’를 찾으면 두 가지의 대표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인데, 다른 말로 하면 축사(畜舍)이다. 또 다른 의미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라는 설명인데, 이때의 우리는 가족, 학교, 사회, 국가 등과 같은 공동체를 연상하게 하는 근원적인 표상으로 기능한다. 장희원의 소설 ‘우리[畜舍]의 환대’는 우리라는 단어가 갖는 동음이의어적 양상을 참조하며, 가족제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무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주인공 재현은 3년 동안 만나지 못한 아들 영재를 보러 아내와 함께 호주로 간다. 호주에서 영재는 부모에게 자신의 거처를 소개하면서, 짐승 우리처럼 지저분한 공간에서 늙은 흑인 남성과 어린 한국 여자아이와 함께 마치 한 가족처럼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린 여자아이와 성적인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늙은 흑인 남성과 동성애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짐승 우리와 같은 곳에서 가족처럼 살고 있고, 부모는 짐승 우리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 아들을 보러온 낯선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소설에 의하면, 고등학교 시절에 영재는 근육질의 두 남성이 뒤엉켜 있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아버지인 재현이 목도했고 무자비하게 영재를 폭행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부자지간이니까 한 가족이고 당연히 우리(공동체)라고 생각했던 관계가 붕괴된 것은, 아마도 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호주의 우리(축사) 같은 곳에서는 성 정체성이 애매한 사람들이 가족(우리)처럼 지내고 있지만,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우리)는 그 내부에는 일방적이고 동물적인 폭력을 숨기고 있던 짐승 우리(축사) 같은 것이었다는 것. 따라서 영재가 자신의 사는 모습과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부모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로 최고의 환대이다. 부모를 타자로서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숨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이 소설은 작품을 읽는 우리들을 타자의 윤리학의 문턱으로 이끈다. 짐승 우리에서나 있을 법한 폭력이 우리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었음을 우리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상의 후보 작품으로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강석경 ‘툰드라’

표제작 ‘툰드라’의 주인공 주영은 불륜관계에 있는 초등학교 동창 승민과 몽고로 여행을 떠난다. 주영에게 사회 제도나 시스템은 근원적인 억압이나 구속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자신을 받아줄 적소(謫所)의 공간을 찾아 다녔다. 16년 전의 주영은 영어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여행을 갔다가 모계사회의 족장 같은 티베트 여인 돌마를 만났다. 돌마의 아들과 결혼하지 않은 채로 딸을 낳았고, 소담이라는 이름의 딸을 돌마에게 맡기고 티베트를 떠나왔다. 출산은 여성으로서 스스로 욕망한 것이었고, 결혼과 양육은 그녀를 사회 제도 속에 주저앉히는 것이었기에 거부했다. 그렇다면 나이 49세가 되어서 몽고의 평원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몽고의 툰드라는 혼자 생존하는 곳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생존을 위해 부부가 함께 노동하고 자식을 키우며 유목민의 삶을 이어간다. 그냥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과정에서 노동의 본질적인 성격이 되살아나고, 생존이라는 절박한 의무 앞에서 소유나 제도와 같은 사회적인 것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 유목민의 삶은, 사회가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이 사회적인 것을 창출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몽고의 툰드라에서, 주영은 해탈을 본다. 불교의 가르침을 좇아 경주, 인도, 티베트를 떠돌았던 작가의 걸음이 몽고의 평원에 이르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소설집 ‘툰드라’에는 1987년에 씌어진 ‘석양꽃’부터 2022년에 발표된 ‘툰드라’에 이르기까지 35년 동안 쓰인 단편들이 함께 묶여져 있다. 35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록된 작품들을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한결같다. 세계와의 근원적인 불화를 넘어 자유로운 삶을 찾아나서는 구도의 과정, 그리고 구도의 과정처럼 씌어졌을 소설들을 떠올린다면, 잠시나마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문학상의 후보작으로 다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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