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훈장 거부’ 오에 겐자부로를 추모하며 / 황석영

한겨레 2023. 3. 2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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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오에 겐자부로를 추모하며
지난 3일 별세한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왼쪽)와 한국 작가 황석영이 2005년 7월 <한겨레>가 주최한 광복 60주년 기념 대담을 위해 일본 도쿄 세타가야구 오에의 자택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내가 오에 겐자부로 선생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2월쯤이었을 것이다. 그 두달 전인 크리스마스 직전에 나는 뉴욕에서 도쿄로 갔다. 내가 광주항쟁의 기록과 진실에 관하여 유럽과 미국의 도시를 돌며 이른바 ‘북 투어’를 하고, 뉴욕의 미주한인청년연합 사무실에서 우연히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 교수를 만나 그의 초청을 받아들였던 터였다. 이와나미 출판사의 야스에 료스케 사장 주선으로 오에 선생과 대담을 하게 되었다.

나는 선생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와 그의 작품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그가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던 <사육>이라는 작품을 읽었고 간간이 번역되는 중단편 소설들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이라는 연속적인 참화 속에서 거의 멈추어 있었던 출판계는 4·19를 기점으로 근대 세계문학들을 번역 출판하기 시작했고 특히 일본의 전후문학은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우리 세대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인사동과 청계천의 헌책방들을 뒤지며 금지된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말똥 종이’ 세대라고 자처했던 것은 저러한 일제 말과 해방공간 안의 근대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에서 내려준 민주주의와 전후 복구의 영향 아래서 과거와 현재의 억압과 자유에 대하여 되씹어 반성하고 고뇌하고 있었다. 적어도 전후의 일본 문학은 그러한 생생함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김지하 석방 운동을 진정성 있게 전개해준 데 대하여 감사 인사를 드렸다. 여러 가지 한·일 문학에 대한 담론이 오간 뒤에 그가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서사가 많은 나라의 작가라는 점을 부러워합니다.”

당시에는 유럽과 미주의 도시를 돌아다니고 광주의 비극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사회의 상처를 드러내고 하소연하고 다니는 처지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일본은 전후 가장 번성한 시대를 보내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개발독재 아래 사는 제3세계라는 모멸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표정은 좀 어두워졌을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오에 선생은 연이어 조용하게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히카리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히카리는 출산하면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뇌수술을 했고 그 결과로 지체장애인이 되어 태어났다.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된 아이를 기르면서 두 부부가 겪었던 고초를 몇마디의 말로 표현했으나, 아마 작가였던 그에게도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겪은 데 비하면 나의 체험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내 아이가 준 긴장 때문에 나는 작품을 계속 쓸 수 있었습니다.”

나는 간발의 차이였지만 먼저 그가 내게 해주었던 말에 대하여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가 일시에 부끄러움과 감동을 느꼈다. 지금도 그 순간에 나는 오에 선생의 겸손함과 진지한 태도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 예로 르 클레지오와 만났을 때도 그가 나에게 오에 선생과 똑같은 말을 해주었을 때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파리를 싫어하고 세계의 주변부를 평생 떠돌지 않았던가 하며.

내가 방북하고 베를린에서 망명하고 있을 때도 인편을 통하여 몇차례 안부를 물어오기도 했다. 1994년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 야스에 료스케 사장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고,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나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은 구치소에 있는 나에게도 호텔에서 부친 듯한 편지를 보냈다. 그는 나의 건강이며 옥중 집필권에 대하여 염려해주었고 김지하를 만났다는 것까지 적어 보냈다. 자신은 그의 사상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잘 경청했고 그를 존경하며 많이 배웠다고 나에게 전했다. 아마도 당시의 지하가 생명사상에 대한 견해를 얘기했을 테지만, 시인의 날아다니는 상상력을 철저한 현실주의적 산문가인 그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배우는 자세로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오에 선생은 일본 ‘천황’이 노벨상에 연이어서 문화훈장을 주려고 했을 때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아무도 없으므로’ 공식적인 거부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서 배웠다.

내가 석방된 뒤에 대산재단에서 기획한 ‘세계작가대회’에서 오에 선생을 만났다. 우리는 일정이 바쁜 중에도 다른 나라 작가들과 더불어 판문점 방문에 동행했다. 그는 남북의 군인이 대치하고 있는 판문점 회의장을 보고 나와서 이전에도 와본 적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지난번에는 오히려 북쪽에서 내가 살아온 남쪽을 보았고, 이제야 남쪽에서 북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개의 거울 사이에 서 있는 것 같군요.”

오에 선생은 고개만 끄덕였는데 버스 안에서 내 뒷자리에 앉았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저곳이 유엔사령부 관할 구역이라 하더군요. 엄청난 악몽이 실제는 농담처럼 보이지요.”

그리고 또 몇년이 흐르고 그의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어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고 어느 대학 강연에 내가 도움을 주러 동행했다. 그는 어느 식당에선가 한국식 소꼬리찜을 맛있게 먹었다며 나를 초대했는데 갈비찜과 비슷했다. 몇해 뒤에 도쿄 교외에 있는 오에 선생의 집에서 대담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배운 소꼬리찜을 직접 요리했다고 자랑했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아들 히카리에 대하여 밝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우리 아이는 작곡을 합니다.”

아들에게 오랫동안 모차르트와 바하 등의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반응이 예민했고 절대음감이 있는 것 같아서 전문가에게 지도를 시켰다고 한다. 이제 자기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모두 아름답고 평화롭다고 칭찬했다는 것이었다. 내 아들도 작곡으로 먹고산다고 말하자 그는 반가워하면서 내 아들의 음반이나 녹음된 것이 있으면 꼭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나와 아들 둘 다 게을러서 그 약속은 그만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소설가 황석영.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2005년 5월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 작가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오른쪽 끝이 황석영이고 오른쪽 셋째가 오에 겐자부로. 연합뉴스

나의 소설 <바리데기>가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오게 되자 그는 출판기념회에 나와서 축사를 했고 몇차례의 대담도 했다. 우리는 문학 얘기보다는 주로 일본 우익들이 해치우려는 평화헌법 9조의 개헌 위기에 대하여 언급했다. 패전 후에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면서 군대를 가지지 않고, 무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는 내용을 철폐하여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든다’라는 것이 일본 집권당과 우익들의 오랜 염원이었고 미국 또한 이를 부추기고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을 엮는 삼각 안보 동맹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2015년에 문학동네에서 소설 <익사>를 출판하면서 서울 연남동 북카페에서 조촐한 행사를 할 때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제 그만 쓰겠다며 절필 선언을 했고 비장하기보다는 어려운 한자어로 쓰자면 ‘염결’한 태도였다. 나는 뒤에 그가 부인과 함께 암이라는 말을 들었고 몇번인가 홍삼을 보내드린 적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외우 이부영 형이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한 동북아 모임을 추진하면서 오에 겐자부로 선생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등도 동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제 오에 겐자부로 선생의 작고 소식을 들으면서 여러번 확인해 본다.

‘근대의 극복과 적응’이라는 화두가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면, 분명히 한국, 일본, 중국은 아직도 근대를 극복하는 과정에 서 있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외교적 날씨는 매우 흐림이지만, 하찮은 한줄기 회오리바람 따위야 곧 지나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또 겪어내고 이겨낼 것이리라.

황석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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