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현장의 기록들- 용인·이천 [친일잔재, 부(負)의 유산으로 기록되다]

정자연 기자 2023. 3. 16. 19:32
음성재생 설정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천 창전동에 카페로 개조된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
日 경찰 무도·검도 단련하던 곳… 현재 유일하게 남아
역사 가치 높아 안내판 설치… “문화콘텐츠 활용 기대”
(왼쪽부터)①구 용인문화원 친일 상징물 전시관 앞에 팔굉일우비 등에 대한 설명이 기재돼 있다. 정자연기자 ②이천시 창전동 소재의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 서강준기자

역사적 장소와 뼈 아픈 친일 잔재의 흔적을 남기고 이를 기억하는 일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2021년, 2022년 설치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은 도민들의 일상 속 역사교육과 항일의식 고취 자료로 자연스럽게 활용되고 있었다. 

■돌에 새겨진 친일의 흔적…구 용인문화원 친일 상징물 전시관

용인특례시 처인구 용인중앙시장 내 마련된 친일 상징물 전시관. 서강준기자

용인시 처인구 용인중앙시장 내 구 용인문화원에는 ‘친일 상징물 전시관’이 있다. 시장 골목 한쪽 끝에 카페를 옆에 두고 설치돼 골목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띈다. 전시관 입구에는 상징물에 대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벽에 걸렸다. 전시관에는 돌에 새겨진 친일의 흔적인 ‘팔굉일우비’와 ‘송병준 선정비’, ‘송종헌 영세기념비’가 전시돼 있다. 

팔굉일우비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 조선인 착취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념물이다. ‘팔굉일우’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란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제국주의 논리이자 구호였다. 일제는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홍보하기 위해 1940년 일본과 조선 전역에 팔굉일우비를 건립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찾을 수 없다가 2008년 용인 양지초등학교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팔굉일우비가 발견된 데는 필연과 같은 우연이 있었다. 2008년 양지초등학교는 운동장 인조잔디 조성을 위해 공사하던 중 비석 2개를 발견했다. 일제에게 귀족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친일파 송병준과 그의 아들 송종헌을 기리는 ‘현감송공병준선정비’와 ‘백작송종헌영세기념비’다. 

‘송병준 선정비’는 일제의 국내 침탈과 매국 행위에 앞장섰던 인물인 송병준을 공로로 1891년 세워졌다. ‘송종헌 영세 기념비’는 1927년 건립된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의 기념비다. 송종헌은 송병준 사후에 백작 작위를 물려받고 일진회 평의원 활동하고, 조선소작인상조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의병 체포에 앞장선 인물이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이 팔굉일우비가 지닌 역사적 의미 등을 답사 현장단에게 설명하고 있다. 서강준 기자

비석 발견 소식을 들은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은 흥사단 소속 교사들과 함께 이를 확인하고자 학교를 방문했다. 이들이 기념비 확인을 위해 학교 정문 옆 넓적한 돌덩어리에 앉아 있던 중 때 마침 돌덩어리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띄었다.

돌의 상단에는 큰 글씨로 ‘팔굉일우(八紘一 宇)’ 글자가,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삼위 백작 야전종헌 근서(三位 伯爵 野田鍾憲 謹書)’란 글자가 한자로 새겨졌다. 1941년 송종헌이 쓰고 당시 양지초등학교 동창회가 후원해 건립한 팔굉일우비였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은 “해방이 되자 한국인들은 팔굉일우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땅에 묻거나, 비석을 옮기고 석재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비석 중 일부는 파손해서 폐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팔굉일우비는 우리의 시야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해방 후 처음으로 용인에서 비석이 발견된 것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중요한 역사자료라는 측면에서 팔굉일우비는 경기도교육청과 동문회의 동의를 얻어 용인문화원에 기증됐다.

팔굉일우비와 송병준 선정비, 송종헌 영세기념비가 설치된 ‘친일 상징물 전시관’ 내부. 감옥과 같은 느낌을 연출하고자 창살이 난 문을 설치한 점도 인상적이다. 정자연기자  

용인문화원은 굉일우비와 송병준 선정비, 송종헌 영세기념비를 창고에 임시로 보관했다. 추후 용인시에 독립기념관이 건립되면 전시 장소를 옮길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기문화재단은 2021년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사업의 기획 지원으로 2천만원의 예산을 지원했고 창고를 개조한 전시관이 지난해 3월1일 개관했다.

전시관은 서대문 형무소 출입문을 본 떠 개조됐고 상징물을 설명하는 리플렛과 영상물도 제작됐다. 전시창고에 잠겨 보관되어 있던 팔굉일우비와 송병준 선정비, 송종헌 영세기념비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친일잔재 전시물로 전시됐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은 “큰 관심을 받을 줄 몰랐는데 전시관을 만든 이후 역사교육 현장으로 반응이 뜨거웠다. 교사들과 학생들의 단체관람 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휴일이나 장날에는 전시물을 보려 방문하는 이들로 더더욱 늘 붐빈”고 전했다.

■안내판 설치로 ‘역사교육 문화 콘텐츠’ 활용 기대

이천시 창전동 소재의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 서강준기자

이천시 창전동의 한 주택가 골목에는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카페 꼬꼬동이 있다. 현재 이천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지역 어르신 일자리 창출 사업장인 이 곳의 입구엔 지난해 안내 표지판 하나가 설치됐다.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 그 내용은 이렇다. 

‘일제는 식민통치와 독립운동의 탄압의 첨병인 경찰들이 무도와 검도를 단련할 수 있도록 주요 경찰서에 무덕관 혹은 무도관 등의 이름으로 연무장을 설치했다. 그 중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옛 이천경찰서 무도관이다.…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인 이수흥, 유택수 지사도 이천경찰서에 수감된 뒤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지상 1층, 면적 165㎥ 규모로 1914년에 건립된 이곳은 식민통치와 독립운동 탄압의 첨병인 일제 경찰들이 무도와 검도를 단련하던 곳이다. 일제가 주요 경찰서에 무도관 혹은 무덕관 등의 이름으로 연무장을 설치한 곳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은 “한국전쟁 때도 큰 피해를 당하지 않고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역사와 교육의 측면에서 보존하고 활용해야 할 일제 유형잔재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역사·교육적 측면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역사적 유물 가치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이나 역사학자들만이 기억하고 되새기던 장소였다. 

이에 경기문화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역사 문화 콘텐츠’의 가치를 내세워 안내판 설치를 주장했고 지자체와 주민 등을 설득해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 동의를 얻었다. 

친일잔재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의미가 객관적으로 기술되다 보니 일상 속 역사교육과 항일의식 고취자료로 활용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박준하 이천시의원은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안내판이 설치된 이후 지역주민들과 학생들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물론, 타 지역에서도 많이 방문하러 오신다”면서 “특히 인근에 이수흥 열사의 동상이 있어 항일과 일제잔재의 살아있는 역사 교육현장이 된 만큼 지역에서 가진 의미가 크다고 본다”고 밝혔다.

창전동엔 무도관 뿐만 아니라 청춘의 꿈을 오직 조국의 독립에 쏟아 붓다 스물다섯살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수흥 의사를 기념하는 이수흥 공원과 그를 도와 독립운동을 펼쳤던 유택수의 추모비가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징성을 살려 역사 교육의 현장과 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가치도 높다고 내다봤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긍정적인 역사이든 부정적인 역사이든 지역에 남은 역사문화를 콘텐츠로 활용해 후세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안내판’이 세워진 것 자체가 향후에 여러 가능성을 실현하게 할 큰 역할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서강준 기자 seo97@kyeonggi.com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