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Wall] 울릉도에서 만난 '리틀 히말라야'

김민수 미디어랩 대표 2023. 3. 13.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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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미륵봉 북동벽(907m)
최희찬씨가 미륵봉 북동벽의 설사면을 오르고 있다. 눈이 많아서 등반이 쉽지 않았다.

산정을 향해 이어진 숲길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밟은 이 없는 눈 위로 발자국을 내며 걷자니 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 마냥 즐거웠다. 며칠간 내린 눈의 적설량은 무려 1m가 넘었다. 아랫동네 길을 내느라 밤낮없던 제설 차량은 사흘째가 돼서야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고, 그러자 잿빛 일색이던 구름 사이로 거짓말처럼 해가 솟았다. 해발 400m, 눈보라 치던 산간마을에서의 3일은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사실 1m 남짓한 적설량은 울릉도 나리분지의 명성에 비하면 부족함이 많다. 최대 적설량 2m 87cm. 나리분지는 대한민국의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대 적설 및 최다 강설 일수 등 눈과 관련한 모든 기록을 갖고 있다. 순백색 눈은 울릉도의 수려한 풍광과 어우러져 곳곳에 절경을 빚어냈다. 그중 취재팀의 시선이 멈춘 곳은 미륵봉의 북동쪽 설사면. 세 개의 쿨와르에 소복이 눈이 들어차 흡사 히말라야의 그것처럼 제법 긴 설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눈 쌓인 나리분지를 스키로 이동하고 있다. 취재팀이 찾은 날도 쌓인 눈의 높이가 1m 넘었다.
등반에 앞서 루트를 살피고 있는 박충길(왼쪽), 최희찬씨. 둘은 울릉도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알아주는 등반가들이다.

미륵봉은 성인봉 정상에서 바라봤을 때 북서 방향 능선에 위치한다. 이웃한 나리봉, 알봉 등과 더불어 나리분지를 에두르며 솟은 외륜봉으로, 지역 주민조차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애써 찾지 않는다. 팀은 이번 눈으로 적어도 높이 350m 이상의 설벽이 형성된 북동 사면을 올라 정상부 암벽에서 믹스 등반을 시도할 요량이다. 등반에는 울릉산악회 박충길, 최희찬씨가 동행했다.

"명이 철이나 산행객이 많은 시즌에도 미륵봉을 찾은 적은 없네요. 재미있는 등반이 될 거 같습니다"

산악 구조 출동이 잦은 토박이 산꾼조차 처녀 등반이라는 설명에 묘한 흥분감이 감돈다. 미지의 대상지에 다가서며 느끼는 설렘과 짜릿함은 오름짓이 선사하는 묘미 중 하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너른 설원에 접어들자 눈이 무릎 위까지 차올랐다. 각자 준비한 스키와 스노슈즈를 착용하고 나서야 보행이 한결 수월해졌다.

박충길씨가 먼저 나섰다. 그는 설사면에 신중히 바일을 휘둘렀다.

나리분지를 출발해 30분 정도 지났을까? 경사가 가팔라지며 미륵봉 정상부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본격적인 등반 시작점. 설사면의 각도는 55~60도 정도 되어 보였다. 영상의 날씨에 밤새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눈 표면은 잘 크러스트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등반을 시작하자 많은 곳은 가슴 높이까지 빠지며 고도를 높이는 데 애를 먹었다. 가파른 경사에도 흘러내리지 않은 섬 특유의 깊은 습설에 진행은 더뎠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고, 가쁜 숨은 턱 밑까지 차올랐다. 연등 방식으로 오르기를 두 시간 남짓.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고요한 산중에는 간혹 들리는 산새 울음과 쩔그렁대는 쇠 장비 소리만 가득했다.

"오랜만에 등반 같은 등반을 울릉도에서 해보네요. 작은 히말라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요."

등반 대상지가 도로 옆에도 즐비하고 실내암장이 성행인 요즘. 산을 몇 시간은 올라야 벽 등반이 시작되던 예전이 회상된 듯, 일행들의 얼굴은 비록 땀에 젖고 벌겋게 달아올랐어도 사뭇 즐거워 보였다. 설사면이 끝나고 암벽이 시작되는 포인트에 닿자 벽은 곧추선 기세가 예상보다 훨씬 세 보였다. 적어도 80도는 되어 보이는 암빙 혼합 구간이 미륵봉 정상까지 폭과 높이 모두 100m가량 펼쳐져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울릉도는 산악스키 등반지로 국내 최고의 장소다.

크램폰을 착용하고 바일을 꺼내들어 등반을 시작했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확보 포인트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 내내 만지작거리다 결국 챙기지 않은 하켄에 생각이 닿자 아쉬움이 커졌다. 결국 확보물 없이 박충길씨가 선등을 시작했고, 일행들은 썩은 나뭇등걸에 슬링이 걸릴 때까지 조마조마한 가슴을 달래야 했다. 등반은 거기까지였다. 한 피치를 나아가도 확보물 설치할 곳은 마뜩잖았고, 설사면을 오르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해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톱로핑 방식으로 한 명씩 한 피치만 오르는 것으로 갈증을 달래야 했다.

스키를 타고 하산 중인 최희찬씨. 스키 실력이 상당하다.

하지만 잡목지대가 끝나고, 암벽에 매달려 바라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멀리 남서쪽으로는 울릉도의 주봉인 성인봉이 손에 잡힐 듯 바라보였고,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나리분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드넓은 동해가 펼쳐져 있었다.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일행은 각자의 글리세이딩 방식으로 오르는 데만 두 시간 넘게 걸린 사면을 15분 만에 하강했다. 이번 등반은 겨울철 미륵봉 북동 사면이 설벽 및 믹스 등반 훈련 대상지로 제격이라는 걸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컸다. 적당한 어프로치와 무궁무진한 등반 가능성이 있는 암빙 혼합 구간은 자꾸만 뒤돌아보게 했다. 그렇게 일행은 산을 내려왔고, 미륵봉에는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섬에 있을 때 육지를 그리워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육지로 나가는 순간 섬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터를 확인한 건 다시 울릉도를 찾는 이유가 될 게 분명하다. 그때까지 미륵봉에서의 하루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것 같다.

1m 이상 눈이 쌓인 설사면을 걷는 중. 이곳은 설상등반 훈련지로도 제격이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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