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은 왜 '원안' 됐나…목포로 떠나는 시간여행
[목포=뉴시스] 박주연 기자 = '삼백년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 /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1935년 발표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2절 가사다. 원래는 '삼백년 원한(三百年 怨恨)품은' 이었지만 '삼백년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은'으로 바꿔 일제의 검열을 통과했다. 임진왜란부터 이어진 일제에 대한 원한을 담은 가사였지만 '삼백연 바람이 편안하게 분다'는 내용이라고 둘러댄 목포의 기개이자 위트다.
목포는 개항 후 일제강점기, 해방을 겪으며 격동의 세월을 보낸 도시다. 일제시대 수탈의 관문이 돼야 했고, 강제 동원의 아픔도 겪었다. 유달동과 대성동의 옛 건물과 골목, 거리 등이 모두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11만4038㎡(602필지) 전체가 등록문화재다.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관광 100선'에 오른 곳이기도 하다.
목포는 항구다…1897 개항문화거리 남촌과 북촌
1915년쯤엔 인구가 1만2782명으로 불어났다. 이중 일본인이 전체의 42%였다. 평지에 형성된 일본인 거주구역 남촌은 휘황찬란했다.
수도와 전기가 완비된 신식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긴자 사거리와 유곽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유달산 산자락의 북촌은 조선인 거주지역인 빈민촌이었다. 아낙네들이 물동이를 이고 쉼 없이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호텔 델루나' 속 그 곳…수탈·강제동원의 역사
을사늑약 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부터는 목포이사청으로 사용됐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해방될 때까지 목포부청으로 사용됐다. 해방 후 목포시청으로 잠깐 사용되기도 했다. 2014년부터 목포 근대역사관 1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9년엔 드라마 '호텔 델루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다.
건물 뒤편 방공호의 사연이 슬프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대규모 방공호를 만들었다. 높이 2m, 폭 최대 3.3m, 길이 72m의 미로형 요새로,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다. 이들은 단단한 화강암을 정으로 파내야 했다. 해설사는 "건물이 먼저 지어진 후 방공호를 만들다보니 폭탄을 쓰지 못했다"며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돼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곳"이라고 했다.
동약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한국의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1908년 세워진 회사다. 1920년 6월 나주 영산포에 목포지점이 개소됐고, 1921년에 11월 건물을 신축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해방 후 해군 목포경비부 건물로 활용됐고, 일제식민지의 상징적 장소로 철거될 뻔 하기도 했다.
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남아 일제의 만행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조선 농업이민 모집 안내장', '정명여학교 3.1 독립선언서' 등 일제의 수탈과 저항운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식민지배 속 한국인이 세운 은행·백화점
일제시대 목포에는 제일은행·식산은행·18은행 등 일본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들이 즐비했다. 이곳에 1920년 호남은행 목포지점이 세워졌다. 한국인을 위한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이었다. 무안통 6번지에 설립했다가 1929년 건물을 신축해 현재 위치로 옮겼다. 현대그룹 현정은의 할아버지가 호남은행 창립자다. 그는 일본 메이지대학 재학 중 유학생 모임 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은행 설립을 꿈꿨다. 이후 호남지역 대지주·상업자본가들을 모아 광주에 호남은행을 설립했고, 직원을 전원 한국인으로 채웠다.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은 현재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이 됐다. VR드라마를 감상하며 목포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100년전 목포로 떠나는 시간 여행' 1편은 고종이 들려주는 목포 개항 이야기, 2편은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이야기, 3편은 극작가 김우진과 소프라노 윤심덕에 관한 이야기다. 각 편이 7분 안팎으로 짧아 VR기기를 쓰고 감상하기에 적당하다.
일제강점기 '긴자거리'로 불렸던 목포 핵심 상권에는 한국인 상점 '갑자옥모자점'이 자리잡았다. 상점은 "모자상점은 갑자옥"이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로 잘 됐다. 100년 가게를 바라보던 갑자옥모자점을 2020년 목포시가 매입했고, 현재는 모자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이난영, 최초의 걸그룹이자 프로듀서
이난영은 목포에 공연 온 태양극단을 만나 합류하게 된 것을 계기로 가수가 됐다.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를 다니던 이난영은 중퇴하고 극단을 따라나섰다. 오케이레코드사에 등용돼 가수로 활동하게 되고 1935년 '목포의 눈물'로 일약 스타가 됐다. 조선악극단 소속 여가수들로 구성된 '저고리시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초로 공식 팀명을 내세운 걸그룹이었다.
이난영은 가수일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자신의 딸 2명과 친오빠 이봉룡의 딸 1명으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다양한 악기들을 다룰 수 있도록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김시스터즈'는 1950년대 당시 가수의 등용문이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고, 1959년 미국에 진출했다. 2009년 원더걸스보다 무려 50년 전이다. 김시스터즈는 한국가수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유명했던 '에드 설리번쇼'에 비틀스보다 많은 22번의 출연을 기록하기도 했다.
목포에는 이난영과 김시스터즈를 기념할 수 있는 곳들이 있다.
다도해의 금빛 낙조와 야경 한 눈에…목포 해상케이블카
목포 시내 북항스테이션을 출발해 케이블카에 탑승하면 유달산 정상부를 지나고, 해상을 건너 '고하도'에 이른다. 크리스탈 캐빈을 타면 발밑으로 펼쳐지는 유달산의 풍광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고하도에 내려 잠시 걸으면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 13척을 격자형으로 쌓아올린 형태의 전망대가 나타난다. 정상에 오르면 고하도의 해안 절경과 목포해안, 목포대교, 유달산을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고하도 해상데크도 놓칠 수 없다. 총길이 1818m로 전체 구간이 해상에 조성된 데크를 걷다보면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기암괴석으로 둘러쌓인 유달산, 다도해의 관문 목포항, 자연절경 해식애 등을 즐길 수 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준비를 위해 조성한 해안동굴도 관람할 수 있다.
유달산에 인접한 서산동 꼭대기에는 아기자기한 벽화로 가득찬 '시화골목'이 있다. 2020년 방영된 도도솔솔라라솔의 촬영지다. '연희네 슈퍼'는 1987년 6월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의 촬영지다.이곳은 1980년 당시의 소품들로 재현돼 당시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추억의 과자를 먹으며 과거의 향수를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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