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함과 서정미가 빚어낸 풍성함,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의 황진영

한겨레21 2023. 3. 1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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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22WRITERS]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의 황진영 작가 인터뷰
극적인 상황 속 인간의 본성에 끌리다
황진영 작가. 최성열 <씨네21> 기자

“난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없소. 알고도 모른 척 , 듣고도 못 들은 척 , 슬프면서도 안 슬픈 척할 수 없단 말이오 . 나는 시인이오 .”(<절정 >)

황진영 작가의 이야기엔 주인공의 정체성을 인지하는 과정이 주요한 추동력이 된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 이육사(김동완 분)는 스스로 시인이라 명명하며 시대의 목격자가 되려 했고, <제왕의 딸, 수백향>의 설난(서현진 분)은 자신이 백제 무령왕의 딸 수백향임을 알게 되며 암투와 계책에 극적인 박차를 가한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어린 길동(이로운 분)이 숨겨진 힘을 각성하거나 백성이 “임금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라는 민주적 언어를 체득할 때 극의 카타르시스가 무한대로 증폭되는 이유기도 하다. 황진영 작가가 역사에 잠재된 이야깃거리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확장하는 과정엔 늘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나’와 ‘나를 아는 것’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 그가 드라마를 통해 던진 화두 위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3월1일 서울에 위치한 황진영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벼랑 끝 인간의 격정, 시대극의 매력

―지금까지 작품 목록을 보면 모두 시대극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장르를 특별히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요.

“시대극은 결정적인 감정과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의 모습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게 매력적이에요. 과거의 시대가 가진 한계성이라고도 할 수 있죠. 신분의 족쇄, 사회적 제약 등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격렬한 감정을 표현할 때, 이 일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제 취향이 그래요. 일상의 소소한 지점을 담담하게 풀어내기보다 극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과 원형을 들여다보는 것에 끌리거든요.”

―학부 시절 사학과를 졸업한 것도 작업 과정에 큰 영향을 줄 듯한데요.

“사실… 제가 사학과를 7년 다녔어요. 학사경고를 세 번 받아 3고를 달성하고 4고까지 갔어요. (웃음) 그러니 작가 생활에 (전공이) 아주 큰 영향을 줬다고 보긴 어려워요. 다만 중고등학생 때부터 영화를 하리라 생각해서 그 과정에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기 위해 (사학과에) 가고 싶었죠. 어쩌다보니 지금은 시대극을 주로 다루지만, 소재를 알아보는 눈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광복(일제강점기), 백제 무령왕, 조선 홍길동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작가님은 작품 배경으로 특정 시점과 인물을 활용하고 있어요.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건 중 각 소재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먼저 <절정>의 경우, MBC에서 이육사를 주제로 사내 공모전을 열었어요. 큰 주제는 정해졌지만, 당시 김진만 책임프로듀서에 따르면 이육사의 이야기를 시와 밀접하게 풀어낸 방향이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제왕의 딸, 수백향>은 ‘왕의 딸의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으로 시작했어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끝에 무령왕에게 ‘수백향’이라는 숨겨진 딸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찾게 됐죠.”

―역사적 정보 공백에 상상을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글감을 찾는 거네요.

“그렇죠.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도 우연히 자료 조사를 하다가 연산군 시대에 홍길동이 존재했다는 사료를 발견했어요. 그걸 본 순간 심장이 뛰면서 막 흥분되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자연스럽게 아기장수 이야기까지 연결됐어요. 당시 사람들은 왜 홍길동이 섬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 믿었을까요? 제 생각엔 실제 홍길동이 그랬다기보다, 홍길동이 그렇게 살길 백성이 염원했던 것 같아요. 홍길동의 몰락이나 실패가 곧 자신의 슬픔으로 와닿았던 거죠. 특히 연산군 시대의 일이라면 폭정과 폭압을 견디던 백성에겐 홍길동의 의미가 더 크게 느껴졌을 테고요. 아기장수 우투리도 비극적인 영웅 설화잖아요. 그런 면에서 자연스레 연결됐어요. 사실 대중은 역사에 고정된 정서를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건드리기 어려운 면이 있어요. 하루는 MBC 이병훈 전 국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소현세자와 강빈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운데 너무 비극적이어서 손대기 어렵다고요. 사극 전문가도 이런 말씀을 할 정도죠.”

누군가를 고착된 시선으로 보지 않기를

―그럴 때면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나요.

“풀기 어려운 소재가 많아요. 동학농민운동이나 제주4·3 사건도 그렇고요. <연인>의 배경인 병자호란도 그렇죠. <연인>의 경우 일부러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많이 떠올렸어요.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를 떠올렸던 것처럼요. 영화 속 갈등과 희망, 아름다움을 병자호란의 시대적 상황에 겹쳐두면 어렵게 보이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낼 거라 믿었어요.”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의 촬영 장면. 맨 앞이 아모개 역을 맡은 김상중 배우. MBC 제공

―작가님 작품의 공통점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입니다. 민중의 갈증과 염원, 민중에서 시작된 평등에의 실현 등을 담고 있어요.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작품으로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제 가치관을 드러내기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교감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그 ‘재미’에는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잖아요. 그중 자연스러운 개연성과 간절한 감정을 북돋기 위해 혁명이라는 장치가 필요했을 뿐, 혁명에 대한 제 사견을 더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저는 모든 이에게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 편이에요. 그게 악한 사람이더라도요. 굳이 누군가를 미화하거나 동정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그가 처한 상황의 인과관계만 정확히 밝히면 모두가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그러니 혁명을 위해 주인공을 앞세웠다기보다는, 주인공이 내린 결정의 당위성을 드러내기 위해 혁명이라는 소재를 가져왔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극적인 인물을 오히려 보편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네요.

“그래서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의 연산군(김지석 분)도 사실에 기반해 쓰려 노력했어요. 저만의 특정 기조를 정해두고 인물을 보여주려 하지 않죠. 2023년 공개 예정인 MBC <연인>에도 인조가 등장해요. 막강하게 부상하는 강대국을 상대하기 위해 인조도 나름의 준비를 하지만 그럼에도 패전국의 임금이 되죠.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범하게 상황을 헤쳐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비범하지 못함’을 비난할 수 있을까, 하고요. 물론 인조를 동정하거나 연민할 생각은 없지만, 사람들이 누군가를 고착된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길 바랐어요. 그게 저의 평소 가치관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최근에는 이런 재평가의 관점을 담은 연구도 많이 이뤄졌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작품 속 악역의 감정과 사정을 보여주는 편이에요. 누군가가 온전히 악하기만 한 것도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진짜같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 이야기의 몰입도가 떨어지거든요. 모든 사람은 입체적이잖아요.”

최대한 진실에 다가선 이야기

―저도 작가님이 빌런(악한)을 그려내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이 변모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드러내주거든요. 그런데 시청자가 주인공을 지지하고 안타고니스트(대립 인물)를 견제하려면 빌런을 공동의 악으로 구체화해야 하잖아요. 그 사이에서 고민 지점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런 게 제 작품의 시청률이 고공행진하지 않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해요. (웃음) 빌런을 막강하게, 다 같이 욕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훌륭한 콘텐츠는 역시 인간의 이해를 담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면모를 통해 그 사람을 통찰해가는 작품이요.”

―작가님 전작에 대해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볼게요. <절정>은 이육사의 삶에서 광복을 향한 열망의 절정을 그려요. 이 스토리를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다양한 방식으로 이육사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거예요. 이육사에게는 본부인과 또 다른 연인이 있었기에 그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생애를 풀어나갈 수 있을 테고요, 또 가족의 경험이 워낙 파란만장해서 그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갈래 중에서 저는 이육사의 시를 부각하고 싶었어요. 그가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어떤 감정으로 그 시를 지었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벽 전체에 연대표를 붙이고 시기마다 나왔던 이육사의 시를 붙여 그의 절정에 대해 생각했어요. 삶과 작품을 접목해보려 노력했죠.”

―여러 키워드 중에서 구체적인 중심 키워드를 잡는 거네요.

“정확해요. 스케치 과정에서 범위를 좁히고 구체적인 테두리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거기서 진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쪽에 편중되지 않은 균형 잡힌 관점을 담고 싶어서일까요? 역사물이라 더더욱 그런 부분을 신경 쓸 것 같은데요.

“불가능하더라도 진실에 근접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의 진상은 무슨 수를 써도 알 수 없겠지만 최대한 진실에 가까워지고 싶어요. <연인>에도 이런 고민이 담겼어요. 기존 역사적 관점에서는 최명길과 김상헌이 관념적 대립 때문에 화친파와 척화파로 갈라졌다고 봤거든요. 그런데 연구 자료와 실록을 계속 보다보니 결과적으로 화친파와 척화파 모두 공통적으로 왕을 지키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다만 그 수호의 방식이 달라서 성문을 여네 마네 격렬하게 토론한 거죠. 다만 ‘정강의 변’이라고, 과거에 성문을 열었다가 임금이 끌려가 사직을 지키지 못했던 슬픈 경험 때문에 대립이 첨예하게 나뉜 거죠.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경험에서 체득한 방식의 차이임을 <연인>에서 드러내려 했어요.”

황진영 작가. 최성열 <씨네21> 기자

<역적> 쓰면서 영화 <대부>를 떠올리다

―<절정> 이후 차기작으로 이어진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도 대사에 고어나 시적 표현을 많이 활용했어요. 전투와 계략이 이어지는 강렬한 스토리 안에서 이러한 서정적 장치가 어떤 기능을 하리라 생각하셨나요.

”드라마를 쓸 때 한 신(Scene)을 쓰더라도 전체적 구성을 계속 함께 고민해야 해요. 한 톤으로만 지속하면 너무 지루하니까 다채로운 분위기를 섞어 이야기의 전반적 무게를 맞추죠. 냉혹한 장면 뒤에 서정성을 넣거나, 비장한 장면 뒤에 웃음을 넣는 방식으로요. 전투나 계략이 강렬해 보이려면 서정미가 있어야 더 부각돼요. 두 극단이 조화를 이룰 때 이야기가 더 풍성해 보이기도 하고요.”

―많은 스태프가 협업하는 현장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려면 극본의 힘이 중요할 것 같아요.

“극본이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해요. 결국 콘텐츠의 알맹이는 이야기니까요. 작가님마다 성향이 다 다르지만 저는 머릿속에 그려둔 분위기와 연기 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극본에 설명해두는 편이에요. 극본을 보며 각 팀이 장면을 단번에 인지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그래서 촬영을 더 원활하게 진행하도록 돕기 위한 거죠.”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은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을 모티브로 해서 재해석했어요. 홍길동은 아기장수로서 힘을 잃었다가 찾기도 하고, 봇짐장수로서 자유를 추구하기도 해요. 활빈당은 활빈정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현되고요. 새롭게 재해석한 과정은 어땠나요.

”아까 말한 것처럼 홍길동은 백성의 열렬한 지지와 염원을 받던 인물이에요. 당시 이 사람이 백성에게 어떤 역할을 했을지 상상해보면, 조선 버전의 조폭이었을 것 같아요. (웃음) 어느 정도 조직력과 군사력을 갖춘 조폭이죠. 그런데 이 전 국민적 지지를 받는 조폭이 탄생하기 전, 그를 키워주고 알아봐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함께 해보고 싶었어요. <연인>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면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은 영화 <대부>를 떠올렸어요. 특히 마이클 코를레오네(알 파치노)와 돈 코를레오네(말런 브랜도)의 관계를요. 또 소설에는 홍길동이 서자로서의 울분이 강했지만 제가 생각한 홍길동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 같았어요. 오히려 서자로서의 울분을 넣은 건 많은 백성이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연산군의 폭압에 힘겨워하던 백성이 홍길동의 정의감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홍길동은 천민이 아니고 사실은 로열패밀리였어. 다만 서자인 거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거죠. 이게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 나온 과정이에요. 당시 사정과 상황을 바탕으로 한 상상이자 재해석이에요.”

대본 속 인물들과 끊임없이 대화해요

―역사적 소재를 세공해 새로운 이야기를 빚고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요.

“드라마작가라는 직업은 굉장히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요.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거든요.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20년은 거뜬히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본을 쓰는 동안 저는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니거든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다양한 의견을 경청한 느낌이 들어요. 이야기만이 가진 힘이죠.”

―차기작 <연인>이 2023년 방영을 앞두고 있어요. 남녀 주인공으로 남궁민, 안은진 배우가 한창 촬영 중이라고요. 이번 작품에선 어떤 점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병자호란으로 시작해서 병자호란 이후의 큰 변곡점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될 거예요. 사실 조선이 초기엔 여인들에게 정절을 강조하거나 사각지대로 몰아넣는 풍토는 아니었거든요.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그런데 양난 이후, 조선이 왜 그토록 여인들을 담장 안으로 몰아세우게 됐는지를 보여줄 예정이에요. ‘인간이 시대를 어떻게 통과해가는가’를 알 수 있죠. 특히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이야기를 조명하려 해요. 포로로 잡혀간 사람 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정작 사료는 별로 없거든요. 어찌 보면 기록될 특권을 누리지 못한 이들을 다루는 거죠. 이외에 사극의 보는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세트, 소품, 의상 등 작은 디테일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고 있어요. 열정의 본색을 보여준 남궁민 배우와 반짝이는 안은진 배우의 연기를 만날 수 있고요. 고아한 그림 속에 절절하게 표현될 장면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글 이자연 <씨네21> 기자·사진 최성열 <씨네21> 기자

황진영 작가의 책장.

에필로그

“사람들이 저를 ‘황진영 작가’라 불러주지만 제가 스스로 느끼는 저의 정체성은 이야기꾼에 가까워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완성도 있게 만들 때 쾌감을 느끼고, 어떤 지점에서 이야기가 잘 풀리겠다는 확신이 들 때 이 일의 매력을 느끼거든요.” 그는 이야기꾼의 탁월한 자질을 지녔다. 한 가지 주제를 심도 있게 파고드는 집요함과 자신이 수집한 자료 사이에서 정보 위계를 파악하는 힘은 그가 가진 독보적인 무기다. 누군가 고정한 정의를 무작정 믿지 않고 자기만의 분석을 더하는 재해석이나 자신의 아이디어 곳간을 부지런히 채우는 성실함은 언제나 빛을 발한다. 많은 것이 그가 뛰어난 이야기꾼임을 증명해주지만 오랜 인터뷰 끝에 가장 눈에 띈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인물을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점이다. 왜 ‘창조한’ 인물이 아니라 ‘선택한’ 인물이냐면 역사적 모티브를 통해 발아한 인물을 그려내는 황진영 작가 특유의 기법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그의 말마따나 어떤 인물이든 황진영 작가를 만나면 시청자로부터 공감과 연민, 이해와 납득을 얻는다. 3월의 밝은 햇살이 반듯하게 들어오는 그의 작업실을 보며, 얼마나 많은 역사 속 인물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할까 상상했다. 어떤 역사는 이야기를 통해 다시 탄생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작품 목록

<연인>(MBC, 2023년): 2023년 방영 예정.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연인의 절절하고 아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MBC, 2017년):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홍길동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

<제왕의 딸, 수백향>(MBC, 2013년): 백제 무령왕의 딸 수백향의 생애를 다뤘다.

<절정>(MBC, 2011년): 일제 치하 암흑의 시대에 이육사의 시를 통해 그의 번뇌와 희망, 절망과 열망을 들여다본 2부작 단막극.

한겨레21 1454호 표지. 서점에서 판매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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