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이순신의 백골을 핥고, 정다산을 하수구 속에서 찬양한다고?’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3. 3. 11. 06: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지식인의 전통 무시 비판한 안재홍, 카프 출신 청년작가 김남천과 치열한 논전
1930년대 조선학운동에 앞장선 민세 안재홍은 일부 지식층이 전통을 무시하고, 천대한다고 비판했다. 스물 넷 카프 작가 김남천을 반박하면서 쓴 '천대되는 조선'(조선일보 1935년 10월2일~5일)은 격한 찬반논쟁을 유발했다.

민세 안재홍(1891~1965)이 도발적 제목의 글을 썼다. 1935년 조선일보에 쓴 ‘천대되는 조선’.(10월2일~5일,총3회) 전통문화를 무시하는 일부 지식인의 자기비하를 지적했다.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뒤져내어 사당(祠堂)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런 것은 한번 웃음에도 차지않는 듯이 마구 깎는 것이 그들 일부의 태도이다.’(조선일보 1935년10월2일)

조선일보 주필,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민세는 전통 문화를 업신여기는 세간의 풍조와 이를 부추기는 일부 지식인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세 안재홍이 조선일보 1935년10월2일자에 쓴 '천대되는 조선' 첫회. 민세는 전통을 무시하는 사회 풍조와 이를 부추기는 일부 지식인의 행동을 비판했다.

◇'두루마기 입고 전차 타면 푸대접’

민세는 글 초반 이런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나는 전차를 흔히 탄다. 양복에 넥타이라도 반듯이 매고 앉았으면 차장이 가위를 들고 ‘어디를 가시옵니까’(공손히 묻는다) 언제는 물색이 아니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여전히 점잖은 체하고 안심코 앉았더니 차장이 와서 ‘어데!요??’(한다). 이는 개인이 당하는 천대가 아닌지라 냅다 일어서며 ‘괴안놈’하고 주먹으로 볼치를 우리기로 하였었다. 단 이것은 내 아직껏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민세는 심지어 조선인 거지까지 ‘이까짓 조선 동네에 와서’ 운운하는 것을 보았다며 개탄했다.

◇안재홍, 정인보 등 조선학운동 이끌어

민세가 언급한 ‘조선 천대’는 식민지 시기 ‘근대’와 맞닥뜨린 한국인의 복잡한 심리를 드러낸다. ‘망국을 초래한 조선의 모든 것(전통)’은 일제 식민지배와 함께 맞이한 휘황찬란한 근대와 비교되면서 평가절하됐다. 부정의 대상이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한국인의 역사와 전통을 깎아내리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 일제와 일본인 관학자들의 주장도 한몫했다. 민세 안재홍, 위당 정인보를 중심으로 1930년대 ‘조선학운동’이 일어난 배경이다.

조선학운동은 일제의 식민사관과 식민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면서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민족, 전통을 경시하는 일부 공산주의운동을 비판하면서 한국사와 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탐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약용과 실학(實學)을 주목했다.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의 가능성을 제시한 전통으로 본 것이다.

◇대대적인 다산 100주기 기념

마침 1935년 다산 서거 100주년을 앞둔 해였다. 당시 신문, 잡지는 100년을 단위로 기념하는 서구식 관습에 따라 괴테, 푸시킨, 헤겔 같은 문호나 학자는 물론 베토벤, 슈베르트, 파가니니 같은 작곡가까지 ‘발굴’해 100주기 특집 기사를 실었다. 도스토옙스키, 입센, 차이콥스키, 비제의 ‘탄생’ 100년까지 기념할 정도였다.

마침 다산 서거 100주기였다.(원래 1936년이 100주기인데, 당시엔 1935년을 100주기로 기념했다). 조선, 동아일보는 약속이나 한듯 1935년7월16일자에 각각 사설 ‘逝世 백년의 다산선생’ ‘丁茶山先生逝世百年을 記念하면서’를 실었다. 다산학의 현대적 의미를 알리는 특집도 만들었다. 조선일보는 두 개면을 펼쳤다. 안재홍은 ‘조선 건설의 총계획자-지금도 후배가 의거할 조선의 태양’이란 제목으로 한 페이지를 썼고, 이훈구, 문일평, 김태준이 각 분야에서 다산학의 의의를 짚었다. 동아일보도 위당 정인보가 ‘다산 선생의 일생’을 소개한 것을 비롯, 현상윤, 백남운이 다산의 사상을 소개했다.

안재홍은 ‘민주적인 합리의 사회’ ‘입헌적인 정치 경륜’ ‘평등과 호조(互助)하는 신시대의 창조’ ‘산업적 민주주의 실현’ 등의 현대적 개념으로 다산 사상을 평가했다. 그는 다산 저작이 루이스 모건의 ‘고대사회’, 에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황종희의 ‘명이대방록’같은 고전보다 앞서거나 맞먹는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안재홍은 월간지 ‘삼천리’(1936년4월호)에 실은 ‘다산의 사상과 문장’에서도 다산을 ‘근세 국민주의의 선구자’ ‘근세 자유주의자의 거대한 개조(開祖)’로 높이 평가했다.

◇1930년대 초 충무공 유적 보호, 선양 운동

1931년 충남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유적이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금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충무공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34년 다산 시문을 모은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는 작업에 들어가 1938년 신조선사에서 발행됐다.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에 참여한 ‘여유당전서’가 발간되면서 다산 연구의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전통을 재평가하고 우리 역사의 영웅을 기리는 운동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들은 전통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이들을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뒤져내어 사당(祠堂)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라며 비아냥댔다.

◇카프 작가 김남천의 정면 비판

카프 작가 김남천은 1935년 스물 넷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김남천은 안재홍의 '천대하는 조선'을 반박하는 글을 조선중앙일보에 8회나 연재했다.

안재홍의 ‘천대하는 조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카프(KAPF) 출신 작가 김남천(1911~1953)이었다. 해방 후 월북해 조선문학가동맹 서기장,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남천은 조선중앙일보에 ‘조선은 과연 누가 천대하는가-안재홍씨에게 답함’(1935년 10월18일~27일)을 8차례나 연재했다. 횟수도 회수려니와 문장 또한 격했다.

김남천은 한달 전 같은 신문에 새로 나온 ‘이광수전집’을 평하면서, 문제의 구절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뒤져내어 사당(祠堂)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을 쓴 장본인이었다. 김남천은 이순신과 다산을 치켜세우는 지식인들을 ‘독일 나치스의 고전 부흥과 고전 예찬’에 견주면서 ‘이네들을(이순신 등) 자기의 국수사상 도취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현금 조선의 ‘애국지사’들과 이른바 문화적 ‘선배’들을 운위하였음에 불과하였다’고 반박했다. 단군,이순신, 정다산, 이광수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이들을 이용해서 국수주의를 고취하는 세력을 공격했을 뿐이라는 반론이었다. 전통에 반항하고, 전통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작가다운 비판이었다.

김남천은 조선중앙일보 1935년10월18일~27일자에 '조선은 과연 누가 천대하는가'를 여덟차례 실었다. 안재홍의 '천대되는 조선' 을 반박하는 글이었다.

◇서양철학자 전원배의 비판

김남천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1932년 교토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전원배(1903~1984)였다. 서양 철학을 공부한 그는 ‘천대되는 조선에 대한 시비’(동아일보 1935년 11월15일)를 썼다. 그는 안재홍이 스탈린 체제하 소비에트 러시아도 푸시킨 100년제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우리가 다산 100년제를 그렇게 치르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며 다산과 푸시킨을 직접 비교한 데 대해 비판적이었다. ‘(안재홍씨는)역사적 유산의 현대적 계승방법에 대하여 좀 더 반성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면서 ‘씨가 러시아문호 푸시킨을 예로 들어 정다산의 역사적 가치를 동일시한 점에 대하여는 자못 의문을 갖지 않을 수없다’고 지적했다.

전원배는 ‘정다산의 역사적 의의를 분석, 파악, 비판하는 대신에 ‘싸베트 러시아’의 푸시킨 기념제를 모방하야 축제소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고 썼다. 역사적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지 냉정하게 따져봐야지, 무턱대고 기념하고 추앙할 일은 아니라는 문제제기였다.

안재홍과 정인보같은 조선학운동 지도자들이 김남천의 주장처럼 잇속을 차리기 위해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거나’, ‘정다산 (茶山)을 하수구속에 끌고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념에 치우친 스물 넷 문사(文士)의 과격함이 이런 극단적 표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민세와 김남천은 꼭 20년 차이다. 둘의 논쟁은 세대간 논쟁이라는 생각도 든다. 욕설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논쟁이 격화되면서 초점이 흐려진 건 아쉽다. 그래도 ‘천대받는 조선’은 전통의 비판적 계승, 발전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소모적 논쟁만은 아니었다.

◇참고자료

안재홍, 다산의 사상과 문장, 삼천리 제8권제4호, 1936, 4

김미지, 우리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생각의 힘, 2019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