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 쓰지 않으려면 시장의 언어를 배워야 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2023. 3.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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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중년 남자]

선반처럼 쓸 테이블이 필요하던 차에 중고 물건이 1만5000원에 나왔다. 새 것도 아마 5만원 안팎 정도 될 듯한 제품이었다. 집에 가져와 보니 다리 하나 끝에 고무 패킹이 빠져 있었다. 파는 사람이 말해주지 않은 게 괘씸했지만 잘 살피지 않은 내 잘못도 있고 또 가져오는 사이 빠져 달아났을 수도 있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그런 부품 살 수 있는 곳을 찾아보는데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철제 책상다리 패킹’ 식으로 찾아보니 대형 철물점에서 팔고 있었다. 개당 700원이지만 배송료가 3000원이었다. 동네 철물점에 가서 물어보니 그런 건 없다며 을지로 가구 상가 근처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700원짜리 물건을 사려고 을지로에 다녀오느니 택배로 사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어느 날 을지로에서 저녁 약속이 잡혔다. 좀 일찍 나가 미리 검색해 둔 철물점에 들렀다. “철제 책상다리에 끼워서 높이 조절도 할 수 있는 패킹…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아, 조절발요?” 하면서 “우리는 없고 옆 상가에 ‘빠킹 가게’가 있는데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무 패킹은 빠킹 가게에서 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알려준 상가 쪽으로 가는데 ‘볼트 백화점’이란 집이 있기에 혹시 그런 물건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가게 앞에 내놓은 바구니 속 패킹 무더기를 뒤져 내가 원하는 규격의 부품을 찾아냈다. 얼마냐고 물으니 5000원이란다. 을지로 부품 가게들이 대개 도매 전문이긴 하지만 너무 심했다. 게다가 그 집 물건은 폐가구에서 떼어낸 것이 분명한 중고 제품이었다. 1만5000원짜리 책상에 다리 하나 새로 다는 것도 아니고 패킹 하나에 5000원이라니. “너무 비싸다”고 하자 주인은 싫으면 말라는 듯 물건을 바구니에 도로 던져 넣었다.

철물점에서 알려준 가게를 찾아갔더니 ‘OO박킹’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 빠킹이 아니고 박킹이구나 하고 문을 여는데 출타 중인지 잠겨 있었다. 인터넷 지도에 ‘박킹’을 검색하니 그 주변에 박킹 가게가 여럿 있었다. 그 중 한 곳에 가니 여사장님이 익숙한 솜씨로 물건을 찾아냈다. 얼마냐고 물으니 한 개를 판 적이 없는 듯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500원만 주세요.”

첫 번째 가게에선 왜 5000원이나 불렀을까 생각해봤다. 행색이 그렇게 어리숙해 보였나 싶어 유리창에 모습을 비춰 봤다. 만약 그 집 주인한테 바로 “20미리 빠킹 조절발 하나만 필요한데 있느냐”고 물었다면 아마 5000원까지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장의 언어를 배우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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