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당한 깡통전세 누가 사겠나”… 경매 나선 피해자 ‘셀프 낙찰’

전혜진 기자 2023. 3.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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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눈물]
경매 현장 찾은 피해자들 대책 호소 “전세보증금 돌려받을 방법 없어”
보증보험 못든 세입자들 집 떠안아… 전문가 “경매자금 일부 대출 지원을”
“올해 스물이 된 아들이 군대 다녀오면 독립시켜 주려고 모은 돈이었는데…. 그동안 차곡차곡 세웠던 인생 계획들이 모두 물거품이 돼 버렸어요.”

1월 18일 낮 12시경 서울남부지법 경매법정. ‘낙찰됐습니다’라는 법원 직원의 말을 듣는 A 씨(50)의 표정이 어두웠다. 낙찰 직후 법정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A 씨는 방금 서울 양천구의 한 빌라 경매에 단독 응찰해 3억 원에 낙찰받았다고 했다. 그는 “보증금 3억1000만 원을 내고 살던 집을 ‘셀프낙찰’ 받은 것”이라며 “보증금이 집값보다 높고 전세사기범인 집주인과는 연락도 안 되는 집을 누가 사겠느냐. 이렇게라도 안 하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날 빌라를 낙찰받은 이들 중 상당수가 A 씨와 같은 전세사기 피해자였다. 동아일보는 1월 18, 31일과 지난달 23일 총 세 차례 서울남부지법 경매법정 현장을 찾아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 “울며 겨자 먹기로 셀프낙찰”

전세사기 피해자 중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경우 경매를 통한 보증금 회수가 사실상 유일한 구제 방안이다. 그런데 경매에 넘기더라도 전세보증금이 집값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깡통전세’가 대대수이다 보니 응찰자가 없어 경매를 신청한 세입자가 셀프낙찰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 씨는 “전세사기에 당했다는 걸 알게 된 후 지난해 4월 전세금 반환 청구소송을 냈고 승소해 경매를 신청했다”며 “전세대출 이자와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비용, 경매 대행 법무사 비용 등으로 약 2500만 원이 들었다”고 했다. 또 “금전적 피해도 크지만 주택을 낙찰받는 바람에 1주택자가 돼 청약도 후순위가 됐고 주택 마련 및 아들 독립 계획까지 모두 엉망이 됐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날 법정에서 만난 김모 씨(65·여)는 “딸이 전세사기를 당해 울며 겨자 먹기로 경매로 집을 떠안게 됐다”며 “결혼을 앞두고 더 큰 집으로 옮길 계획이었는데 엄마로서 안타까운 마음뿐”이라고 했다. 김 씨의 딸은 변호사 선임 비용 등 전세 보증금 반환 청구소송에만 900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1월 31일 법정에서 만난 이모 씨(42·여)도 전세로 살던 서울 양천구 신월동 신축 빌라를 셀프낙찰 받았다고 했다. 보증금보다 400만 원이 낮은 2억3000만 원에 빌라를 낙찰받은 이 씨는 “낙찰은 받았지만 자금 계획이 전부 엉망이 돼 우울증에 걸렸다. 소송을 진행하느라 일까지 그만뒀다”며 울분을 토했다.

● 경매법정에 나도는 ‘빌라왕’ 리스트

경매법정 안팎에선 이미 ‘빌라왕’ 리스트가 나돌고 있어 이들 소유의 빌라인 경우 정상적인 매매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경매법정을 자주 찾는다는 한 입찰자는 1월 31일 법정 앞 게시판에서 임대인의 이름을 가리키며 “김○○, 우○○ 이런 사람들이 다 ‘빌라왕’ 같은 사람들”이라고 주변에 알렸다. 둘은 언론에는 아직 보도되지 않은 이름이었다. 지난달 23일 법정 앞에서 만난 경매 사이트 관계자도 경매 전단을 나눠주다가 일부 이름을 가리키며 “이런 건 다 깡통전세다.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1월 18일 서울남부지법 경매에선 다세대주택과 연립주택 물건 53개 중 8개만 매각됐는데 유찰된 물건 중에는 ‘광주 빌라왕’ 정모 씨 소유의 물건도 2개 있었다.

전세사기 우려가 퍼지면서 최근 빌라 가격은 급격히 하락하는 추세다. 여기에 전세사기에 악용된 빌라가 대거 경매에 나온 뒤 유찰되며 빌라 가격 하락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손실만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전세사기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진형 전 대한부동산학회장은 “피해자들에 대한 전세자금 대출, 저이자 융자, 새 주거지 제공 등과 같은 대책을 마련해 피해 발생 즉시 구제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경매로 낙찰받고 싶어 하는 피해자에게 신용대출이나 특별대출 형태로 경매가격의 30%가량을 대출해주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김수연 기자 syeon@donga.com
송진섭 채널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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