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항거 다룬 영화, 해방 후 80년간 3편에 그친 까닭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권위주의 시대 의도적 기피했을 수도
영화는 조선 독립에 대한 유관순의 내적 의지가 얼마나 강인했는지,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의지란 사실 얼마나 본래적이고 생래적인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유관순이 18살에 죽었다는 사실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독재 정부에 항의하다 고문으로 사망한 학생들의 나이를 연상시킨다. 왜 젊은 영혼들(유관순이나 박종철이나)은 이리도 맹목적일 만큼 순수하고 강고한 것일까. 영화 속 대사처럼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죽음을 무릅쓰는가. 학생들이 갖는 불굴의 자유의지가 표출되고 오버랩 될 수 있다는 점에서 1970년~1990년대 권위주의 시대 때는 유관순 영화가 의도적으로 기피됐던 것 아닐까. 물론 그보다는 유관순이란 인물이 갖는 투쟁 이야기를 국내외 안팎 정세, 세계사적 흐름 등등과 제대로 엮어내지 못한 서사의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여, 누군가 3.1운동과 유관순의 희생을 세계사적 흐름의 의미로 잡아내야 할 때이다.
3.1운동이 아시아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불을 지른 신호탄이 됐는지 여부, 곧 그 내적 연관성을 파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같은 해인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도 유사한 반일 학생 데모가 크게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5.4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견강부회(牽强附會)일 수 있으나 3.1에서 5.4 그리고 이후로 죽 이어졌던 아시아 반일 반군국주의 항쟁의 흐름은 마치 2003년 조지아의 장미 혁명이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05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 혁명으로, 또 2010년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 보면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다. 독립 투쟁의 역사 역시 반복되고 순환된다.
신해혁명의 드라마틱한 과정을 스펙터클한 무협 씬과 함께 펼쳐 보인 영화가2009년 작품 ‘8인: 최후의 결사단’이다. 홍콩의 진가신 감독이 제작하고 진덕삼이 연출했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주목을 끌고 대중에게 회자됐던 이유는 역사를 무협 활극으로 엮었기 때문이다. 무협영화의 기본 골격은 할리우드 서부극 구조와 같다. 권선징악. ‘8인: 최후의 결사단’은 여기에 희생과 헌신이라는 유교적 미덕을 2단·3단 케이크처럼 쌓아 놓는다. 더욱이 꽤나 비장하다. 모두 죽음을 불사하고 자유와 탈(脫)계급, 민주주의, 아시아 평화를 향해 나아간다. 정서적으로 휘발성이 꽤 높고 후반부에는 계속해서 인물들의 행동반경이 누선(淚腺)을 자극한다. 한 마디로 매우 재미있는 영화다.
때는 신해혁명의 전조기인 1906년의 홍콩이 배경이다. 쑨원은 중국 전역에 (혁명)동맹회를 조직하고 지부 결성을 위해 홍콩을 방문한다. 당연히 청조(靑朝)의 자객들은 그런 그를 암살하려 혈안이 된다. 쑨원을 보호하기 위한 8명의 결사대는 청나라 자객을 한 명 한 명 몸으로 막는다. 인력거를 끄는 하층계급의 청년(사정봉), 평생을 도박중독 탓에 부패한 경찰로 살았던 인간(견자단), 지식인 혁명가(양가휘), 홍콩의 부호(왕학기)와 그의 아들(왕백걸), 무엇보다 유부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귀족가문에서 파문당한 후 거리의 걸인으로 살아가는 무예 고수(여명) 등이 쑨원의 홍콩 입성과 탈출을 돕기 위해 몸을 바친다.
무예 고수가 온 몸에 칼을 맞고 갈퀴에 꽂혀 가며 손문의 탈출로를 방어하는 장면은 홍콩 무술영화의 고난도 기술이 겹쳐져 실로 볼만한 장면으로 꼽힌다. 홍콩의 부호는 자신의 부를 대물림할 아들이 혁명사상에 물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혁명적 지식인과 그룹을 돕는 그를 어쩌지 못한다. 극 후반 이 아들을 비롯해 8인의 결사대 모두는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대륙으로 돌아가는 배편의 갑판에서 쑨원은 자신 하나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며 눈물을 흘린다. 실제로 신해혁명은 미완으로 그친다. 이후 쑨원이 맡았던 총통직은 군벌인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넘어가고 이 군벌정치의 무도함이 일본제국주의를 방어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5.4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3.1이든 5.4든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혁명은 위대한 길이지만 실로 슬프고 안타까운 서사들로 가득 차 있다. 홍콩이나 중국이나 대만이나 한국, 심지어 군국주의 일본에서조차 그랬다.
‘박열’ 결이 다소 다른 독립투쟁 영화
‘바람의 검심’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사토 타게루)은 신흥 권력층을 대표하는 3개 번(藩)의 다이묘(최고 지도자급 사무라이, 막부시대에는 일종의 영주)들이 고용한 칼잡이다. 켄신은 이들에게서 새로운 시대(막부의 부패한 권력을 일소하고 백성이 나은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미래비전을 약속 받고 신센구미의 우두머리들을 하나씩 처치해 나간다. 켄신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새로운 국가 창출의 이데올로기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인물은 사쓰마 번의 다이묘인 사이고 다카모리처럼 그려진다. 그는 이 시리즈의 최종편 격인 ‘바람의 검심: 비기닝’에서는 카츠라란 이름의 인물(타카하시 잇세이)로 나온다. 그리고 곧 이들 3개의 번 모두를 대표하는 신흥 권력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바람의 검심 2편: 교토 대화재’편에서는 오자와 유키요시가 이토역을 맡아 연기한다. 일본의 파시즘이 도래하는 순간이어서 영화에서조차 섬뜩하다.
히무라 켄신은 비천어검류를 구사하는 검객이며 일명 밧토우사이, 발도제(抜刀斎)라 불린다. 이는 곧 발도술 혹은 발검술의 달인이라는 의미로 칼집에서 칼을 빼는 속도, 정확성 등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사를 말한다. 실제 영화에서 그가 칼을 휘두르는 속도는 전광석화와 같다. ‘바람의 검심’ 시리즈 총 5편은 초기 메이지 유신의 개혁 정신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보다 왜,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변질됐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도 그렇게 쉽게. 이 활극 시리즈 영화는 그런 면에서 비교적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건 근대화란 미명 하에 일본사회의 지식인을 탄압하고 줄곧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런 사정의 일단이나마 볼 수 있는 영화가 이준익 감독이 만든 수작 ‘박열’이다. 박열은 아나키스트이고 기본적으로 극단적 리버럴리스트이다. 박열의 독립운동은 불가침의 사상적 자유에의 추구로 연결돼 있다. 1923년 박열이 감행한 일 황태자 폭탄 테러 계획은 파시즘을 향해 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영화 ‘박열’은 때문에, 다소 결이 다른 독립영화이다.
다시 한 번, 3.1절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비극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열찼던 독립운동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늘 영화(적)이다. 반면 영화는 늘 역사(이야기로 쓰이는 예술)이다. 그건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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