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미 35살 이하 작가 5’의 이다지도 강렬한 질감

임인택 2023. 3. 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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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서 빨강, 하양, 핑크, 갈색 따위 색은 무척 중요하다.

대체로 이야기의 중턱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이 가령 유색인이라는 사실, 이민자란 사실, 죽음과의 조우는 누군가에겐 실상 필연적이라는 함의 따위가 무방비의 독자 앞에 무심한 듯 툭툭 던져지는 식인데, 마르셀 프루스트는 '되찾은 시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까지 왜 그리 장황했어야 했나 '불경'한 질문을 상상하게 할 만큼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고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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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l 모모 l 1만5000원

이 소설집에서 빨강, 하양, 핑크, 갈색 따위 색은 무척 중요하다. 생의 원형(적 기억)을 빚어내는 방편이자 결과로, 다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색감이 아닌 질감으로서 더듬어 만져지며 때로 진한 냄새를 발산한다. 이다지도 감각적인 소설이 그 ‘색’을 드러내는 방식은 ‘놀랍게도’ 닮아 있는데, 매번 그 채색에 ‘놀란다’. 대체로 이야기의 중턱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이 가령 유색인이라는 사실, 이민자란 사실, 죽음과의 조우는 누군가에겐 실상 필연적이라는 함의 따위가 무방비의 독자 앞에 무심한 듯 툭툭 던져지는 식인데, 마르셀 프루스트는 ‘되찾은 시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왜 그리 장황했어야 했나 ‘불경’한 질문을 상상하게 할 만큼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고 강렬하다.

미국 흑인 여성 작가 단시엘 W. 모니즈(33)가 11편 단편을 묶어낸 2021년 데뷔작 <우유, 피, 열>. 10대 유색인 여자아이(또는 그 시절 기억)를 주된 화자로 삼아, 여러 편에서 생의 고비를 감당해내며 트라우마가 트라우마로 곪게 두지 않으리란 믿음을 ‘불굴의 감각’으로 그려낸다.

처음 걷게 됐을 때 발끝을 내려다보지 않는 법까지 가르쳐줬다며 아버지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여성 세실리아는, 반대로 “남자가 되지 않는 법을 알려줬”다며 아버지를 극도로 원망하는 오빠 루카스와 1년여 만에 만나 한 차에 동승하게 된다. 유골을 사막 일대 산타페에 묻어달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남매가 이뤄달라는 엄마의 부탁 때문. 저 먼 유년 시절은 “기억나?” 한마디로 거슬러 따라붙고, 둘은 마침내 웃다 추억의 온도가 엇갈리고, 급기야 더 싸늘한 침묵에 이른다. “늘 함께였다”는 남매가 틀어진 결정적 배경이었을 아버지 “그 인간이 한 짓”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사건이 뭐든 중요한 건 “내가 풍기는 냄새들이 나를 어떤 궁지에 몰아넣을지, 나를 두고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두려웠다”고 고백할 만큼 멕시코 남매가 도리 없이 포박된 사회적 구조와 관습 탓이리라.

이것은 표제작 ‘우유, 피, 열’에서 단짝인 흑인 여자아이와 백인 여자아이의 삶을 대비시키되 백인 여자아이의 자살에 이르는 에피소드로 흑인 여자아이가 짊어지는 미국 사회를 여러 층위로 은유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품 저마다 한 방향으로만 향하리 짐작해선 안 된다. 모든 단편에서 주제를 떠나 아름답고 고유한 문장들이 독자들을 불들므로, 작가가 “고독한 연습”이라 표명한 글쓰기의 ‘색’을 짐작하게 한다.

2021~22년 ‘35살 이하 작가 다섯’ 중 한 명으로 단시엘 W. 모니즈를 꼽아 소개한 전미도서재단. 누리집 갈무리

전미도서재단(NBF)의 2021년 ‘35살 이하 작가 다섯’(5 Under 35) 중 하나로 뽑힌 단시엘은 축하연에서 “예술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지 않고 여전히 느끼고 배우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궁극적 신뢰”(NBF 누리집)라고 말했다. 그 믿음으로 한국에서 좋은 번역가도 만난 듯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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