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50년 넘게 해온 농사…“내 평생 처음 겨울에 쉬어보네”

한겨레 2023. 3. 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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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머리는 처박고 똥구멍은 하늘로 올려서 똬바리(바닥의 중심부분)를 틀어야 하는데 보통 힘으로 하는 게 아닌기라. 힘들게 만들어도 완성해 놓으면 또 그리 좋을 수가 없어. 자연에서 주는 재료고 내가 관리만 잘하면 영원히 깨끗이 쓸 수 있잖여. 좋은 건 자식도 주고 이웃에 선사(선물)하면서 이어왔던 기라.
필자가 일궈온 밭의 풍경. 필자 제공

문성자 | 농부(경남 함양)

이맘쯤이면 고추 모종 400포기 신청해 놓고 밭 준비를 살살 해야 하는데, 올해 농사는 체념했어. 내 평생 처음으로 겨울에 쉬어보네. 작년까지만 해도 12월부터 유과 만들어 팔고 농사지은 감자, 고추로 부각 만들어 파느라 쉴 새가 없었는데 말이야. 3년 전부터 아픈 다리가 이젠 영 못 움직이게 돼서 올해는 다리 수술을 받으려고. 원래는 나비마냥 훨훨 날아다녔어. 걸음걸이가 얼마나 빠르면 ‘앞정갱이(정강이)가 날 살려라’ 하고 뛰어 다녔다니께.

나는 경상남도 함양 백전면 양백리 서백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집안 어르신들이 일찍 돌아가셔서 반찬 해먹을 줄도 모르고 농사일도 해본 적 없었어. 열일곱에 운산마을로 시집와 5년은 죽만 끓여 먹었제. 콩죽, 팥죽, 무 삐진 죽, 고구마죽…. 종류도 가지각색이었어.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안하고 이웃, 동서 쫓아다니며 등 너머로 배워 농사짓고 논도 사고, 아이들 길러내고 어르신들도 모셨지.

지금 내가 사는 마을이 해발 약 500m인데 여기서 오르막으로 한시간 정도 걸어가면 우리 논이 서너마지기 있고, 밭은 300평 정도 있었어. 일꾼들 먹일 밥을 머리에 이고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네살짜리 딸내미는 걷게 하고 올라가는데, 딸내미가 고 작은 다리로 따라오려면 얼마나 힘들겄어. 따라오다가 우는데, 나는 울거나 말거나 계속 걸어가는 거라. 산길로 들어설 땐 우는 아이 놔두고 혼자 올라가 밥 가져다 놓고 다시 내려와서 데리고 가고 그랬제.

그 어렸던 딸내미가 올해 오십이고 큰아들이 마흔일곱, 막내아들은 서른아홉이 됐구먼. 두세달 뒤면 다리 수술하러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데, 밭이랑 집구석 보면 자식들이 엄마가 이렇게 일을 많이 했나 싶을끼라. 3년 전 다리 시술할 때는 큰아들이 와서 일을 거들었는데 그라더라고. “엄마 참깨 다 베서 타작해 놨어요. 근데 참깨가 하얗지 않고 빨개요.” 안 익었는데 다 베어버린 거지. 그래도 뭐라 하겠어. 엄마 일 거들라고 한 건데.

막내아들한테는 매년 농사지은 쥐눈이콩으로 환을 해줬어. 그 콩은 내가 시집올 때부터 키우던 건데 고게 약성이 좋은가벼. 머리 빠진 사람이 머리도 난다고 하더라고. 신장에도 좋고. 요즘엔 찹쌀, 멥쌀, 흑미, 귀리, 서리태를 쪄서 말리고 냄비에 볶아 방앗간에 가져가 가루를 내서 미숫가루로 보내주고 했는데, 올해는 우째야 하나 싶네.

우쨌든 자식들 해먹이고 이웃한테도 주면서 그렇게 씨앗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올해는 못 하지만 씨가시(가지고 있는 모든 씨앗)를 잘 보관만 하면 내년에 심어 싹을 틔울 테니깐 걱정은 없어. 올해는 다리 낫는 데만 신경 쓰고 내년부턴 또 해야 겄지.

필자가 가지고 있는 토종씨앗. 필자 제공

최근에 오래된 씨앗이 있냐고 묻고, 직접 만든 채반을 보며 예쁘다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데. 쥐눈이콩, 넝쿨콩, 빨간울콩, 메주콩, 콩나물콩, 녹두도 두고두고 쓰던 것들이거든. 귀한 거라고 보여주고 나눠줬제. 우리 마을에서 이렇게 오래된 씨앗은 나만 가지고 있을끼라. 시장에 가 모종을 사서 심지. 씨앗 받는 것도 일이 많거든. 나는 그냥 처음부터 내가 가진 씨앗이 소중하더라고. 쥐눈이콩은 50년이 더 됐는데 처음 받을 때 속이 노란 게 예쁘더라고. 그런데 몇년 있으니 마을사람이 속이 퍼런 쥐눈이콩을 주는데 그건 정이 안 가더라고. 새파란 건 안 심어봤어. 그냥 쥐눈이콩이 약콩이라 하니 맥을 이어가야겠다 싶더라고. 이걸로 콩나물도 키워 먹고, 메주 끓여 간장 담아 약콩 간장 해먹기도 하고, 밥에 넣어 먹기도 하고, 미숫가루도 해먹고. 겨울엔 씻어서 장독대에 뒀다 꽁꽁 얼어 퍼스럭해지면 볶아. 그때 볶으면 연해. 그거 엿에 넣어 콩강정 만들고 튀밥강정에도 던져넣고, 그렇게 많이 해먹었어.

음식뿐일까. 물건도 만들어 썼는데 이제껏 쓰고 있는 채반도 산에 가서 싸리나무 가지 베고 삶아서 껍질 벗기고 칭 가리고(길고 짧은 것을 분리하고) 다듬어서 엮은 거지.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이제 이 마을에서 나 하나밖에 없어. 막내가 돌 지났을 무렵부터 목말 태우고 손으로 꼼지락거려서 아직꺼정 기억하고 있는 거지. 머리는 처박고 똥구멍은 하늘로 올려서 똬바리(바닥의 중심부분)를 틀어야 하는데 보통 힘으로 하는 게 아닌기라. 힘들게 만들어도 완성해 놓으면 또 그리 좋을 수가 없어. 자연에서 주는 재료고 내가 관리만 잘하면 영원히 깨끗이 쓸 수 있잖여. 좋은 건 자식도 주고 이웃에 선사(선물)하면서 이어왔던 기라. 그렇게 내려왔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그걸 젊은이들이 잘 이어가고 또 그다음 세대에 전해준다면 참 고마운 일이겄제.

※녹취 및 정리: 심영지 함양토종씨앗모임 총무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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