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1위 스위스]② 모듈가구의 조상, 명품이 된 쓰레기...USM·프라이탁 본사 방문기

뮌징엔·취리히(스위스)=이용성 국제부장 2023. 2. 2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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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M, 세 가지 부품 조합으로 수없이 많은 가구 창출
첨단 로봇 공정으로 모방 불가한 품질 구현
방수포로 만든 프라이탁 가방에 젊은 소비자 열광
’디자인·품질·지속가능성 타협 없는 정진’ 공통점

지난 15일 오후, 스위스 제3의 도시 바젤을 출발한 버스는 30분을 달려 아레(Aare)강변의 소도시 뮌징엔에 도착했다. 기후변화 탓인지 산 정상부를 덮은 눈과 빙하의 면적이 생각보다 작아 보였지만, 멀리 만년설 덮인 알프스가 바라보이는 목가적인 풍경이 인상적이다.

USM의 4대 경영자 알렉산더 쉐러가 지난 15일(현지 시각) 뮌징엔의 USM 본사에서 사무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용성 기자

그런데 샬레(Chalet·스위스의 전통 오두막집)라도 한 채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위치에 철골과 유리로 지은 현대식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서 보면 1층인데 지대가 낮은 반대편에서 보면 2층이 되는 독특한 구조다. 세계 최초의 ‘모듈형 가구’ 브랜드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USM의 본사 건물이다.

모듈형 가구는 하나의 덩어리로 제작된 가구가 아닌 규격화된 부품을 내 마음대로 조립해서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가구를 뜻한다. USM 제품은 볼 모양의 스틸 조인트와 크롬 파이프, 패널 세 가지 부품만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 부품을 조합하면 수납장과 책장, 파티션, 오픈형 선반, 워크스테이션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가구를 만들 수 있다.

USM은 1885년 스위스 뮌징엔에서 자물쇠와 금속공예, 창호 시스템 등을 만드는 철공소로 시작했다. 지금의 본사 건물은 1961년 창업 3세 경영자 파울 쉐러(창업자 울리히 쉐러의 손자)가 본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하면서 건축가 프리츠 할러에게 의뢰해 지었다.

철골·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에 당시 유행하던 무거운 나무 가구는 어울리지 않아 사무실에 쓸 가구를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모듈 시스템 가구 USM의 시초다. 사무실 때문에 ‘업의 본질’이 새롭게 정의된 독특한 사례다.

스위스 뮌징엔에 있는 USM 본사 건물. /USM

쉐러와 할러는 어느 공간에서나 목적에 따라 유연하게 변경할 수 있는 가구를 만들고 싶어했고, 수많은 연구 끝에 1965년 ‘할러 시스템’으로 불리는 USM의 모듈식 가구 시스템을 개발했다.

USM은 1969년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이 사무실에서 사용할 가구로 할러 시스템의 워크스테이션 600대를 주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치렀다. 이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모마)이 USM 할러 시스템의 영구 소장을 결정하면서 USM은 현대 디자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했다.

6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대를 앞서간 건물과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 있는데, 안쪽에서 금테 안경을 낀 풍채 좋은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1993년 USM에 합류한 4대 경영자 알렉산더 쉐러다.

짙은 파란색 셔츠에 회색 바지 차림의 쉐러는 풍채와 잘 어울리는 ‘사람 좋은 미소’와 느릿한 영어로 근처에 있는 USM 공장 투어를 권했다.

USM 할러 시스템으로 꾸민 공간. /USM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레이저 빔으로 자른 패널을 부지런히 운반하는 첨단 로봇들이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언젠가 자동차 공장에서 본 차량용 문짝을 운반하는 로봇들의 모습과 비슷했다. 보안상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쉐러는 “과거에는 일일히 손으로 패널을 자르고 운반했는데 이제 로봇이 한다”며 “(부품을) 매우 정밀하게 절단해 정확하게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봇을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은 비싸지만 대량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도 했다. 공정 말미에는 생산이 끝난 부품의 품질을 3D(3차원)로 체크하는 로봇도 가동 중이다.

점(볼)·선(파이프)·면(패널) 세 가지 부품의 결합을 기본으로 하는 USM의 할러 시스템의 근간은 첫 등장 이후 달라지지 않았지만, 부품간 이음새와 결합이 더 견고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첨단 기술을 통한 시스템 개선은 부단히 이뤄졌다. 디자인 자체는 복잡할 것 없어 보이는 USM 제품들이 만만치 않은 가격에도 오랜 세월 독보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듯 했다.

국내 주요 백화점에도 입점한 USM은 거실용 TV 받침용 거실장 가격이 개당 300만원이 훌쩍 넘을 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다. 쉐러에게 “가격이 너무 비싼 것 아닌지” 물으니 “대를 물려 오래 쓸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며 정색을 한다.

그는 “한번 만든 부품으로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게 지속가능한 경영”이라며 “진출 역사가 긴 독일의 경우는 USM 전용 중고시장도 큰 인기”라고 덧붙였다. USM 뮌징엔 공장은 전체 전력 사용량의 20% 가량을 태양광으로 충당하는 등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모듈형 가구 업체로 제2의 창업 후 60주년을 바라보는 USM의 앞에 놓인 과제는 해외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는 것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취약한 미국 시장 공략이 큰 숙제다. 미국은 가구를 직접 만들고 고치는 ‘DIY(Do It Yourself) 문화’가 발달했다. 쉐러는 이를 의식한 듯 큰 기업들이 많은 뉴욕과 캘리포니아, 부유한 은퇴자들이 많은 플로리다 등 하이엔드 시장 중심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말했다.

◊ 명품 가방이 된 ‘나만의 쓰레기’...개당 수십만원 가격에도 젊은층 열광

스위스 특유의 실용주의와 타협 없는 품질 제일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계적인 ‘강소 혁신기업’의 사례는 패션 분야에도 있다. 화물트럭 덮개로 쓰던 방수포로 가방을 만들어 연간 수백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프라이탁(Freitag, 독일어로 금요일이란 뜻)’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색상의 프라이탁 가방들. /프라이탁

프라이탁은 1993년 취리히에 거주하던 20대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마커스 프라이탁, 다니엘 프라이탁 형제가 창업했다. 형제는 사흘에 한 번 꼴로 비가 오는 변덕스런 취리히 날씨에도 젖을 걱정 없는 견고한 가방을 찾던 중 트럭 방수포를 떠올렸고, 색색의 방수포 천과 자전거 튜브, 차량용 안전벨트를 재봉틀로 박음질해 그들의 첫 프라이탁 가방을 만들었다.

당시 이들이 만든 가방은 프라이탁의 스테디셀러인 메신저백(한쪽 줄을 어깨에 메는 형태의 가방, 어깨끈이 크로스백보다 짧다) ‘F13 톱 캣(TOP CAT)’의 원형이다. 형제가 만든 첫 프라이탁 가방은 뉴욕 MoMA에 전시돼 있다.

프라이탁은 현재 전 세계 10개국 400여 개 직영 및 편집매장에서 매년 30만 개 이상의 제품을 판매 중이다. 가방과 노트북 케이스, 휴대폰 케이스, 지갑 등 판매되는 모델만 80여 개에 달한다. 매출은 약 700억원( 2019년 기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버려진 트럭 방수포로 만든 가방 가격은 개당 수십만원을 호가한다. 명품 가방 뺨치는 가격이다. 그런데도 전 세계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젊은이들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만의 쓰레기’라며 열광한다. 독특한 발상으로 개성과 품질, ‘착한 소비’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모두 만족시킨 결과다.

1 프라이탁 가방을 만들기 위해 가방 템플릿을 트럭 방수포에 놓고 자르는 모습. 2 미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전시돼 있는 프라이탁의 첫 메신저백인 ‘F13 톱 캣(TOP CAT)’ 모델. /프라이탁

프라이탁 제품의 핵심 원료인 타폴린 소재 방수천은 10년 이상을 사용해도 찢어지거나 물이 샐 염려가 없다. 여기에 자동차 안전벨트, 고무 튜브 모두 방수가 되는 제품이다. ‘품질’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프라이탁이 로고를 달고 세상에 나오는 가방이 연간 수십만개에 달하지만, 디자인과 색상은 저마다 다르다. 방수포 하나로 여러개의 가방을 만들어도 부분별로 낡은 정도(사용감)가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프라이탁이 지향하는 ‘착한 기업’의 면모는 지난 13일 프라이탁의 취리히 공장 방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프라이탁 공장에서는 화물차 방수포의 수집과 세척, 재단 등 제품 제작 과정 전부를 수작업으로 진행 중이었다. 먼저 방수포는 색깔 별로 크게 조각을 낸다. 잘린 천을 세탁한 후 재단사들이 본래 디자인과 색감을 고려해 가방사이즈에 맞도록 아크릴 본을 이용해 재단한다.

프라이탁 취리히 공장의 빗물 저장고. 프라이탁은 제품 생산에 필요한 물의 30%를 빗물로 활용한다. /이용성 기자

엘리자베스 이세네거 프라이탁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조선비즈에 “본격적인 디자인에 들어가기 전, 프라이탁 공장에서 트럭 방수포를 자르는 일도 디자인 과정 중 하나”라면서 방수포를 자를 때, 색 조합과 글자, 새겨진 숫자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고 말했다.

방수포의 경우 5년 이상 사용됐던 것만 사용한다. 또, 공장의 50%는 재활용 열로 운영되며, 빗물 저장고를 이용해 필요한 물의 30%를 빗물로 활용한다.

공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취리히 프라이탁 플래그십 스토어는 버려진 화물 컨테이너 박스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최근에는 자연 분해되는 의류 개발에도 나섰다. 이와 관련해 이세네거 CMO는 “우리 의류는 셔츠 단추, 라벨, 실 모두 퇴비 더미에서 완전히 생분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됐다. 즉,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분야는 다르지만 USM과 프라이탁은 일상의 필요에 따른 참신한 발상의 전환이 전에 없던 사업 아이템으로 이어졌다는 점과 디자인·품질·지속가능성에서 타협 없이 최고 수준을 향해 묵묵히 정진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 기업과 창업자들이 참고할만한 스위스식 기업 혁신의 표준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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