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음악의 김칫국물

2023. 2. 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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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 영화배우
아기 입술에 김칫국물 묻히면
오만상을 찌푸리며 울지라도
커서는 김치 잘 먹는다고 한다
콘서트에 온 초등학생 관객들
일찌감치 음악의 국물 맛보면
음악을 친구처럼 사랑하게 돼

MBC 라디오에서 ‘여성 시대’를 진행하던 시절 녹음하러 방송국에 일찍 나온 코미디언 김혜영 씨를 복도에서 만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 할 정도로 격하게 인사했는데, 그것은 먼저 마음을 열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의 활달하고 선한 인품 때문이었다.

어느 날 PD·작가·진행자 몇몇이 복도에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냥 지나치기 애매한 분위기여서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그 무리에 어설프게 섞이게 되었고, 그때 듣게 된 그의 말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갓난아기일 때 눈 딱 감고 김칫국물을 아기 입술에 살짝 묻혀 주는 거야. 그러면 아기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우는데, 그 경험이 나중에 김치를 잘 먹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거야.” 내가 김치를 엄청 좋아하는 걸 보면 어쩌면 우리 부모님도 내게 그랬을까. 김칫국물 때문에 찡그리는 어린 내 모습이 떠올라 빙그레 웃으면서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올해가 시작되면서 예술의전당의 장수(?) 프로그램인 ‘11시 콘서트’의 해설을 맡게 되었다. 오전 공연이니 그 시간에 오려면 일찍부터 서둘러야 해서 번거로울 텐데 많이들 오실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층의 절반 정도라도 채우면 다행이겠다 하는 생각과, 그래도 비대면 풀리고 새해 첫 공연인데 1층은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많은 관객은 예상 밖이었고, 20년을 이어 온 ‘11시 콘서트’의 위상에 놀랄 뿐이었다. 무대에 등장할 때 객석에서 들려 오는 박수 소리는 무대 뒷벽에 부딪혀 돌아 나오는 소리와 섞여 나를 엄청난 파도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갖게 했다.

객석 어둠에 적응되면서 부모를 따라온 초등학생 관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어린이와 눈을 마주치게 되자 ‘지금 입술에 음악이라는 김칫국물을 묻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회에 온 어린이 중에는 익숙지 않은 분위기가 힘들어서 몸을 꼬는 친구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잠을 청하려고 자세를 잡는 친구도 있지만, 음악에 대한 관심이 초롱초롱 눈동자에 가득한 아이도 있었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이런 웅장하고 근사한 콘서트홀에서 ‘음악의 국물’을 입술에 묻힌 어린 친구들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나는 어린 시절 이런 큰 홀이 있는 줄도 몰랐고 음악을 들을 전축은커녕 라디오도 변변치 않았으나, 일찍이 ‘음악의 국물’ 맛은 보게 되었다. 테클라 봉다제프스카라는 폴란드 여성 작곡가의 이름도 몰랐고 그가 작곡한 곡의 제목도 몰랐지만, 길거리에서 듣고 알게 된 그 곡을 흥얼거릴 수는 있게 됐다. 집채만 한 청소차가 후진할 때 주변 사람들 조심하라는 경고성 음악(?)으로 흘러나오던 ‘소녀의 기도’는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지만 많은 이에게 안전을 선물했고, 나에게는 거기에 더해 훗날 거부감 없이 클래식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준 새큼한 ‘김칫국물’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런 음악은 어려워. 아는 게 없어서인가…”라며 전혀 클래식과 무관하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는데,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있다는 걸 인식 못 해서 하는 말이다. 존 덴버의 ‘애니 송(Annie’s Song)’, 에릭 카먼의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 세라 본의 ‘어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 루이스 터커의 ‘미드나이트 블루(Midnight Blue)’ 등 우리가 좋아하는 그 팝송은 클래식 곡에 가사를 붙였다는 사실을 모를 뿐. 팝송은 클래식이 없었더라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많은 곡이 클래식 음악과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요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초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했던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베토벤의 가곡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로 시작되고,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은 난로가 있어 아늑한 분위기와 차가운 겨울비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그린 짧은 시(소네트)를 소재로 작곡된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으로부터 시작되며,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2악장과 무관치 않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마치 모든 음악은 사라지고 한 가지 장르만 존재하는 듯 트로트 열풍이 거세다. 서양 춤곡인 ‘폭스트롯(foxtrot)’이 일본을 통해 그들의 발음인 ‘도롯도’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트로트. 바로 그 트로트에서도 클래식을 들을 수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 혜린의 테마로 귀에 익숙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6번’을 듣다 보면 태진아의 ‘미안 미안해’가 흥얼거려지는 건 어쩔 수 없고,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2악장에서는 동요 ‘깊은 산속 옹달샘’과 가곡 ‘해는 져서 어두운데’가 반복적으로 들린다.

재미난 영상도 1분이면 족하다고 여기며 쇼츠(shorts)라는 영상이 빠르게 확산하는 지금, 짧은 것은 몇 분 안 되는 곡도 있지만 30∼40분은 보통이고 한 시간이 넘는 클래식 곡도 많다. 그런데 그런 긴 곡을 ‘늘’ 듣는다는 건 어린 날 김칫국물을 맛본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진대 하물며 어린아이에게야! 이제 곧 개학이 되면 아이들은 그나마 접하던 음악을 뒤로하고 교과서로 돌아가야 한다. 음악은 방학에만 듣는 게 아닌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날 예술의전당에서 부모님을 통해 맛본 ‘김칫국물’에 잘 적응해서 음악을 좋은 친구처럼 서로 사랑하며 사는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11시 콘서트’에서 반짝반짝 눈동자가 빛났던 어린 친구들 여름방학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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